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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은채 Mar 07. 2024

미련이 많은 사람은 아직도 영국 꿈을 꿉니다

영국 교환학생 합격 1주년을 기념하며

4학년 막학기생인데도 오티 시즌만 되면 자기소개를 한다. 그것도 몇 번씩이나. 세 번째 자기소개를 할 때쯤 아무도 집중하지 않는 형식적인 자기소개에 지쳐있던 것 같다. 앞선 두 번의 자기소개와 다른 점은 소개 말미에 자신의 TMI 하나씩을 덧붙이는 것이었다.


방금 교환학생 발표가 났는데, 합격해서 다음 학기에 네덜란드에 갑니다!


몇몇 학우들이 5분 전에 발표된 교환학생 발표 결과를 공유해 준 덕분에 뜻하지 않게 정확히 1년 전의 기억을 소환하고 말았다. 나도 작년 이맘때쯤 마음을 졸이며 교환학생 발표 결과를 기다렸던 적이 있기 때문에.


교환학생을 가고 싶다고 처음 생각했던 건 고등학교 2학년에 올라가던 겨울. 나와 탄생년도가 같은 영화 <해리포터>에 뒤늦게 빠진 탓이었다. 벅차오르는 마음으로 8편의 영화 관람을 마친 지 얼마 되지 않아 <해리포터>의 세 주인공 중 론과 생김새가 닮았다는 이유만으로 에드시런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해 그의 음악을 진정으로 사랑하게 되었고, 매력적인 영국 발음을 더 접해보고 싶다는 생각에 보기 시작한 <셜록> 시리즈는 전례없는 전염병 때문에 이렇다 할 즐길거리가 없던 새내기 시절의 몇 안 되는 낙이었다. 지금은 잘 보지 않지만 한때 새 에피소드가 올라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리던 유튜브 채널 <영국남자>와 파생 채널 <Jolly>도 영국에 대한 내 로망에 불을 질렀으리라 고백한다.


교환학생과 더불어 대학생활 2대 로망이었던 밴드에 들어간 나는 동아리 친구들의 권유로 다양한 밴드의 음악을 접했고, ‘이 밴드 좋은데?’ 싶어 찾아본 그들의 국적은 신기하게도 죄다 영국이었다. 팬데믹 때문에 교환학생의 꿈이 점점 더 희미해져가기만 하던 때에도 언젠가 해외여행을 가게 된다면 그 종착지는 영국이 될 것이라는, 어쩌면 몇 년에 걸친 세뇌의 결과일지 모를 이상한 확신 같은 게 있었다. 그러면서도 현실의 벽에 부딪혀 교환학생의 꿈이 좌절되기 직전이던 2022년, 영원히 풀리지 않을 것만 같던 각종 규제가 풀려나며 유럽으로의 비행길이 보이기 시작했다. 마침 7학기를 앞두고 있던 나는 미뤄왔던 교환학생 준비를 서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8학기생은 해외교환이 불가능하다는 교칙이 있어 이번 기회를 놓치면 내 인생에 ‘교환학생’이란 영영 없을 것이었기 때문이다.



교환학생이라는 도전을 시작한 뒤로, 모든 계획은 차질 없이 착착 진행되었다. ‘이번이 아니면 영영 끝이다!’라는 생각에 꼬박 두 달을 부지런히 토플 공부에 매진한 덕에 목표 점수보다 9점이나 높은 성적을 받아낸 나는 고민 없이 영국 학교들을 희망 파견교 리스트에 적어냈다. 사실 고민이 아예 없었던 건 아니고, 비교적 저렴한 물가와 여행에 유리한 위치 때문에 잠시 독일로의 파견을 고민하던 순간들이 있었으나, 7년 동안 간직해 온 로망을 저버릴 만큼의 매력을 독일에게서 발견하지 못했다. 어떤 학교에 지원하는 게 좋을지에 대한 행복한 고민을 하며 1순위에 영국의 Lancaster University를 적어내던 새벽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언젠가 꼭 영국에 교환을 갈 거라고 몇 년을 떠들고 다니던 무모함이 현실이 되어 코앞에 다가온 순간이었다.


설레기도 떨리기도 하던 몇 주의 기다림 끝에, 드디어 발표날. 솔직히 붙을 것이라 예상은 했지만, 합격을 두눈으로 직접 확인한 뒤의 기쁨의 강도는 상상 이상으로 컸다. 합격한 이후부터가 진정한 교환학생 준비의 시작이라던데, 수많은 서류를 준비하고 제출하는 과정조차 번거롭기는커녕 행복하기만 했다. 단순히 영국에 발도장을 찍고 돌아오는 것이 내가 기대한 교환학생의 전부는 아니었기에, 여행을 위한 예산 마련이 넘어야 할 또 하나의 산이었다. 알바를 아무리 열심히 한다 해도 모아둔 돈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한 돈이 필요했고, 눈여겨 보던 외부 장학금의 모집 공고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내가 지원했던 장학금은 미래에셋박현주재단의 해외교환 장학금이었다. 선발 시 무려 750만원을 지원받을 수 있는! 자소서를 작성하고 면접을 보는 것보다 750만원이라는 금액에 미련을 갖지 않는 마음을 유지하는 게 가장 큰 과업이었다. 수중에 장학금이 들어온 것도 아닌데, AI 면접까지 마치고 나니 이미 750만원의 돈이 내 통장에 들어온 기분이 들었다. 어차피 내 돈도 아니었던 거, 떨어져도 미련 갖지 말자, 잊어버리자, 하고 하루하루를 버티던 날들이 흘러갔다. 최종 발표가 나던 날도 여행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과외를 하고 있었다. 수업을 마친 직후, 닫힌 현관문 뒤에서 실눈을 뜬 채 조심스레 결과창을 확인했다.



잘못 본 게 아닌가 싶어 메일함을 두 번이나 나갔다 들어왔다. 말도 안 돼. 간절히 쓰고, 간절히 말하고, 간절히 기다린 끝에 나는 750만원의 주인공이 되었다. 이 모든 일이 나를 영국에 데려다 놓기 위한 거대한 프로젝트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매 절차가 수월히 진행되었고, 나는 어느덧 영국의 작은 마을에 적응해 한국에서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여유로운 생활을 즐기게 되었다. 많은 일이 있었던 만큼 그 모든 걸 세세하게 나열할 순 없겠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한국에서 했던 끝없는 고민과 걱정들이 단 하나도 떠오르지 않는 시간이었다는 것이다.


한국에서의 나는 늘 단순한 삶을 살고 싶었다. 넘쳐나는 할일과 여러 사람들에 둘러싸여 바쁘게 보내는 시간이 보람차면서도, 한편으로는 그저 흘러가는 대로 살아도 괜찮은 ‘단순한 인생’을 살아보고 싶었던 것이다. 불필요한 생각과 부담을 덜어내고자 열심히 노력했지만, 한국에서는 매일같이 생겨나던 다양한 고민을 내려놓을 여유가 도통 생기질 않았다. ‘나는 평생을 복잡하게 살아갈 팔자인가 보다’하고 운명을 받아들이려던 찰나, 영국에 오게 되었다. 랭커스터라는 새 터전에 적응하고 살아가는 동안, 나는 그 어느 때보다도 안온한 시간을 보냈다. 익숙하던 곳에서 벗어나 조용하고 한적한 영국의 작은 마을에 고립되었다는 사실은 나를 단순하게, 그리고 편안하게 만들어 주었다. 한국에서는 그토록 노력해도 이루어지지 않던 ‘단순한 삶 살기’라는 목표가 숨쉬듯 달성되던 날들이었다.


몇 날 며칠 동안 이어지던 흐린 날씨에 울적하다가도 잠깐씩 갠 하늘에 햇빛이 모습을 드러낼 때면 속없이 행복해졌고, 매일 밤 열리던 파티의 소음을 성가셔하면서도 이제 막 성인이 되어 자유를 만끽하게 된 이들의 젊음이 부러웠다. 끼니를 거르지 않고, 최소한의 학업적 의무만을 다하며 생활 공간을 쾌적하게 꾸려나가는 일만이 고민의 전부이던 날들이 많이 그립다. 그 당시에도 한국에 돌아간다면 그 어떤 맛있는 음식과 멋진 풍경보다도 교환교에서의 평화롭던 시간이 가장 그리울 것 같다 생각했지만, 막상 한국에 오니 상상했던 것보다도 그 모든 풍경과 시간들이 훨씬 더 그립다. 귀국하자마자 자소서니 포트폴리오니 하며 영국에서 미뤄둔 막막함과 조급함이 물밀 듯 밀려왔기 때문이다. 영국에서의 시간이 정말로 꿈이었던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빠른 속도로 꿈에서 깨어난 나는 영원히 익숙해지지 않을 한국에서의 바쁜 삶에 적응하느라 애를 먹고 있다.



오지 않을 것만 같던 개강은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3월 4일자로 마지막 정규학기가 시작되었고, 나는 졸업 학점을 채움과 동시에 포트폴리오를 풍성하게 만들기 위해 4개의 프로젝트 수업을 신청했다. 다시 말해 이번 학기에 팀플만 무려 4개를 진행하게 됐다는 말이다. 매일이 치열하고 피곤한 날들의 연속이기에 겉보기엔 현실에 찌든 한국의 대학생 같아 보여도, 나는 더 이상 영국에 다녀오기 전의 평범한 내가 아니다. 전에는 없던 특별한 자산이 생겼기 때문이다.


가장 사소한 것부터 말해볼까. 왼쪽 주머니에 챙겨 다니는 지갑에는 영국에서 쓰다 남은 파운드화 동전이 들어있다. 매일같이 메는 백팩에는 랭커스터 대학교의 굿즈들, 예컨대 뱃지와 키링이 달려있으며 손가락에는 매주 목요일마다 교환교 광장에서 열리던 장에서 구매한 은반지가 끼워져 있다. 취업이니 뭐니 하는 고민들로 머리가 시끄러울 때 이러한 증표들을 보면 적당한 소음이 듣기 좋던 영국 대학교의 도서관에 앉아있는 기분이 든다. 그러곤 금세 마음이 차분해진다. 과장처럼 들리겠지만 진짜 그렇다.


당연히 물질적인 기념품들만 남은 것은 아니다. 혼자 비행기를 타고 무려 경유까지 해가며 한국으로 돌아오던 길에, ‘내가 나에 대한 프레임을 잔뜩 씌우고는 한계를 결정지어놓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나를 미워하는 다른 누군가가 아닌, 나 스스로가. 나는 사실 혼자 비행기도 잘 타고, 음식도 야무지게 해먹고, 살림도 나쁘지 않게 해내는 사람인데, 그동안 스스로 ‘혼자서는 해외여행을 못하고, 본가를 떠나 살아본 적이 없으니 요리에는 조금의 재능도 없으며 생활력 또한 약한 사람’이라 규정지어왔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여행을 싫어한다는 것도, 혼자 살게 되면 외로움을 크게 느낄 거라는 예상도 실제로 겪어보니 사실이 아니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경험하지 않고는 알 수 없는 것들이 많으니까.


교환을 떠나기 전에도 나 자신에 대해 잘 알고 있다는 나름의 자부심이 있었는데, 4개월의 해외 경험은 나에 대한 이해가 여전히 부족하니 앞으로도 스스로를 알아가는 일을 게을리 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시간이기도 했다. 교환을 다녀온 뒤로는, 나에 대한 어떠한 프레임도 씌우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따지고 보면 해보지 않은 것은 ‘못하는 것’보다는 ‘잘 할지도 모르는 것’에 가까울지도. 4개월의 유럽 생활 덕분에 미지의 영역을 두려워하기보단 기대하게 되었다. 4개의 팀플이 기다리고 있는 무시무시한 막학기도, 수료 후 뒤따를 인턴십이나 본격적인 취준의 과정도 지레 겁먹지 않기로 했다. 해보기 전까진 모르는 거니까. 걱정했던 게 우스워질 정도로 잘할 수도 있는 거니까. 이것이 영국이 가져다 준 가장 큰 교훈이자 자산이다.


사실 사람 한 명을 바꿔놓기에 4개월은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라 생각했었다. 그저 오랜 로망을 이루러 가는 거지, 그밖에 교환학생을 통해 얻을 것이 뭐가 있겠냐고. 하지만 직접 다녀오기 전에는 무엇도 단정할 수 없는 법. 교환학생으로 생활한 4개월은 내 인생을 통틀어 가장 밀도 있는 4개월이었다. 교환을 다녀오지 않았더라면 그러한 4개월은 평생 경험하지 못했을 것이다. 영국에서의 시간이 너무 행복했기 때문에 한국에서의 삶이 전보다 더 벅차고 더 각박하게 느껴질 때도 있지만, 그 모든 부정적인 감각을 극복하게 해 주는 것도 역설적으로 영국에서의 기억들이다. 당장은 어렵겠지만 언젠가 나는 영국에 다시 가게 될 것이다. 마치 교환학생의 꿈이 코로나로 얼룩진 상황에서도 ‘난 꼭 영국으로 교환을 갈 거야!’ 하고 무모하게 말하고 다녔던 것처럼. 이제 와 생각해 보니 그건 무모한 게 아니었다. 자기확신이 있었던 거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살아가다가도, 교환학생에 합격해 다음 학기에 출국할 거라는 이름 모를 학우의 TMI가 들려올 때면 나는 영국의 풍경을 떠올린다. 하루 종일 빗방울이 흩날리다 말다를 반복하는 변덕스러운 날씨가 이어지다가도, 가끔씩 찾아오는 맑은 날이 그 어느 때보다 사랑스럽던 영국의 하늘을. TV에서 영국을 배경으로 하는 예능이 방영될 때마다, 인스타그램을 둘러보다 영국의 거리를 찍은 사진을 발견할 때마다 질리지도 않고 그렇게 될 것이다. 누구나 마음에 품고 사는 나라나 도시가 하나쯤 있지 않은가. 나에겐 그곳이 영국이고, 나는 머지 않아 영국에 다시 가게 될 것이다. 내가 그렇게 결심했으니까. 내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언젠가 반드시 현실이 되니까. 그날을 기다리며 지난 추억을 붙잡고 그렇게 살아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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