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선변호인은 경제학과 무관합니다.
최근 ‘강북 모텔 연쇄살인 사건’의 뉴스가 포털을 도배하고 있다. 피의자의 잔혹함에 치를 떨던 대중의 화살은 어느덧 그 옆에 선 변호인에게로 향한다.
“저런 놈을 변호하다니, 변호사도 돈에 미친 것 아니냐.” “영혼까지 팔아서 얼마를 벌고 싶은 건가.”
서초동 법무법인 필 사무실에 앉아 이런 댓글들을 읽다 보면, 내심 억울한 마음이 든다.
변호사가 돈에 미친 사람이라는 말, 절반은 맞다. 나 역시 자본주의의 정점에서 내 가치를 증명하고 싶은 지극히 세속적인 30대 남성이니까.
하지만 변호사는 생각보다 훨씬 더 '손익계산'에 밝은 동물이다. 그리고 그 계산기 속에는 대중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시시하고도 엄중한 논리가 들어있다.
솔직해지자. 이런 사회적 공분을 사는 사건은 사선(私選)으로 수임한다고 해도 변호사에게는 '독배'다.
과거 n번방의 조주빈이나 가평 계곡 살인 사건의 이은해를 수임했던 사선 변호인들이 겪은 이미지 타격과 실명 거론, 그리고 쏟아지는 비난을 보라. 웬만한 거액이 아니고서야 장기적인 커리어와 평판을 고려했을 때 이런 사건은 '거절'하는 것이 훨씬 더 경제적이다.
즉, 변호사가 정말 돈에 미쳤다면 이런 사건은 안 맡는 게 남는 장사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번 강북 사건은 애초에 사선 변호인조차 붙지 않았다. 결국 국가가 나서서 국선변호인을 ‘배정’했다. 여기서부터는 선택의 영역이 아니라 ‘숙명’의 영역으로 진입한다.
우리 법에는 '필요적 변호'라는 제도가 있다. 사형, 무기, 혹은 단기 3년 이상의 중죄 사건은 변호인이 없으면 재판 자체를 열 수가 없다. 법정이라는 거대한 기계를 돌리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부품’ 하나가 바로 변호인인 셈이다.
이번 사건에서 첫 국선변호인이 사임 허가를 받고 물러났다는 소식이 들렸다. 재판부 입장에서는 골머리가 아픈 일이다. 구속 기간은 정해져 있고, 재판은 끝내야 하는데 변호인이 없으면 법정은 ‘올스톱’ 되기 때문이다.
새로 지정될 국선변호인은 아마 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쉴 것이다. 하고 싶어서 하는 게 아니다. 국가가 명한 업무이고, 특별한 사정이 없으면 사임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다. 그에게 주어진 미션은 피고인을 ‘무죄’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법치주의 시스템이 정한 절차대로 재판이 흘러가게끔 감시하는 것이다.
변호사는 법정에서 피고인을 위해 법적 변론을 해줘야 할 의무가 있다. 기록에 나타난 절차적 문제점을 지적하고, 피고인에게 유리한 사정이 있다면 현출시켜야 한다. 대중의 눈에는 이것이 ‘괴물을 옹호하는 행위’로 보이겠지만, 우리에게는 ‘기계적으로 수행해야 할 직업적 과업’이다.
의사가 환자의 과거 범죄 이력을 따지며 수술 집도를 거부하지 않듯, 변호사 역시 피고인의 인성을 평가하기 전에 그의 ‘방어권’을 수호한다. 그것이 우리가 배운 법의 논리이고, 밥벌이의 근간인 직업윤리다.
우리는 조국을 구하는 영웅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악마의 앞잡이도 아니다. 그저 퇴근 후 리그 오브 레전드 승률에 집착하고 아내의 눈치를 살피는 시시한 일상을 유지하기 위해, 오늘도 법이라는 정교한 틀 안에서 자신의 배역을 묵묵히 수행하는 직업인일 뿐이다.
누군가는 여전히 우리를 향해 손가락질하겠지만, 그 손가락질조차 법의 테두리 안에서 보호받을 수 있게 만드는 것이 바로 우리가 지키고자 하는 이 시시하고도 무거운 시스템의 본질이다.
오늘도 어느 국선변호인은 한숨 섞인 커피 한 잔을 마시며, 전 국민이 증오하는 그 피의자의 수사 기록 첫 장을 넘기고 있을 것이다.
돈 때문이 아니라, 그놈의 '어쩔 수 없는' 직업윤리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