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잘 모르겠다. 내가 얠 사랑하는건지, 의리인지, 내 자존심인건지, 그냥 큰엄마 엄마한테 미안하니까 붙잡고 있는건지도....."
"응.그래보여서 물어봤어....."
제부는 이미 내 마음을 알고 있는걸까.
그냥 물어봤을 리는 없다. 그래보인 사람에게 받은 질문에 나도 솔직하게 답해주는 게 예의인 것 같아 숨기지 않고 말했다.
제부는 반대로 내 동생을 많이 사랑한단다.
그래서 내 동생이 상식적이지 않은 행동을 해도 (이를테면 술주정, 시비, 어린애같은 행동들) 다 받아줄 수 있지만 가끔 힘이 들 때 빼고는 다 받아들일 수 있다나.
난 아직 그런 경지에 도달을 못해서인가. 내 마음의 그릇이 간장 종지밖에 안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2. 가치관의 차이는 가까운 둘을 극과 극으로 옮겨 삶의 근간을 흔들기도 한다.
사실은,
너무 이른 결혼(만난지 3개월만에 결정한 결혼)에 후회하는 점도 없지 않아 있고,
나와 너무 가치관이 다른 사람을 맞춰갈 수 있다고 믿은 내 오판과 오만에 대한 책임이 막중해 다리가 풀리고 있다고 표현하는 게 맞겠다.
탄핵이 되든말든 상관없어보이는 저 게임충 무리의 한 명이 남편인 게 싫다.
탄핵이 된지도 모른 채로 술이나 퍼마시는 그 무리들 중 하나인 남편이 집에 돌아와
의무감으로 나 왔어, 를 외치고 나와 강아지에게 귀가인사를 나눈 후 3분도 안되어 안방 침대로 들어가
또다시 게임을 켜고 그 속의 사람들과 하나가 되어있는 남의 사람같은 남편이 너무 싫다.
정치성향까지는 바라지 않지만,
그래도 사회적 공감대나, 일상에서 필요한 사회적 이슈들에 대해 관심이 없어도 이 정도일 줄은 예상을 못했어서.
물론 먹방이나 여행 유튜브를 같이 보는 때도 있고,
쉬는 주말에 드라마나 영화를 같이 보며 웃는 시간은 좋지만,
게임에 빠진 후의 남편이 그 소중한 나와의 시간들을 확연하게 줄여가는 모습이 싫은 게 더 정확한 말이겠다.
쉽게 말해 나에 대한 배려와 생각이 없이, 꼭 혼자 사는 남자들처럼 사는 남편의 모습이 싫은 것 같다.
자극적이고 재미있는 이야기, 웹툰, 숏츠, 유튜브, 게임이 아니면
낚시를 갈 수 있는 계절엔 낚시와 연관된 장소만 가고 싶고,
단 한번도 자기 낚시나 술자리, 자기 관심사가 아닌
나를 위해 온전히 주말을 써본 적 없는 내 남편의 배려없는 모습이 싫은 거겠지.
써놓고 보니 최악인데.?
그래도 게임은 이제 할만큼 하지 않았을까 생각했을 때,
롤에서 멀어질 뿐
라스트워라는 새로운 게임 속 게임충이 될 줄은 예상하지 못했던 내가 한심하다.
사람 쉽게 안바뀌는걸,
계속 눈가리고 아웅하면서,
그래도 이건 좀 나아지지 않았냐, 하며 괜한 정신승리로 내 눈을 가렸던 것 아닌가 싶다.
내가 그간 살아온 9년간 수없이 해 온 고민은
이 남자와 앞으로 50년을 더 살아야 한다면.
나는 정말 행복할까 ?
3. 이성의 사회활동수준과 사회적 관심은 매우 중요한 가치관이다.
정치,종교 이야기 하는 것을 기피하는 사람들 중
자신의 생각이 있는데 싸우기 싫어서 이야기만 하지 않는 사람들과
아예 자신이 그에 대한 생각 자체를 해본적이 없거나, 하기 싫어서 회피하는 사람들은
분명한 차이가 있다.
전자는 자신이 가진 생각을 이성적으로 피력할 힘이 있지만 그것으로 싸우기 싫으니 내보이지 않을 뿐이고,
후자는 자신이 있는 자리에서 자기가 관심없는 이야기를 꺼내는 것 자체를 싫어(불편해)한다.
머리가 아프니까.
"정치 얘기 하면 머리아파~."
정치인 욕이 아니라 사회 제도에 대한 이야기 조차 머리아파 하는 사람들이 남편과 동생이다.
오늘 내 일상이 즐거우면 그게 더 중요한 사람이고,
사람이나 사물에 그닥 큰 관심은 없지만 재미와 칭찬은 좋아하는
어떻게 보면 한참 아이같아보이는 사람.
겉으로 보이는 모습과 속마음이 너무 똑같아서
거의 투명하다고까지 봐야 하는 직선적이고 단순한 사람.
나쁜 사람은 아닌데, 나와 맞지는 않는 사람.
나는 이 사람을 어떻게 이해하려는 노력을 해야 할까. 우리는 어떻게 앞으로 남은 몇 십년을 잘 살 수 있을까.
1년에 10번은 넘게, 이런 생각을 하는 것 같다.
갑자기 생각이 났다.
직업상담사 공부를 할 때 유명한 심리학자인 아들러(Adler) 의 개인주의 상담에서
생활양식(활동수준과 사회적 관심도에 따른 유형) 의 분류가.
아들러는 인간이 프로이트가 강조한 성적 충동보다 사회적 충동에 의해 주로 동기화된다고 주장하였다.
여기에서 나눈 생활양식은 다음 네가지의 요소로 구성되며,
1. 출생순서 : 보통 첫째 아이는 책임감, 둘째 아이는 경쟁심이 강하며, 막내아이는 의존성이 강하다.
2. 사회적 관심: 인생의 목표, 자아개념, 타인과 세상에 대한 태도, 문제에 대한 대처방법, 습관을 포함한 개인의 독특한 특징을 말하는데, 모든 행동을 구체화시키는데 기본구조는 4-6세에 결정된다고 본다. 사회적 관심은 개인이 이상적인 공동사회의 목표를 달성하고자 사회에 공헌하려는 성향으로, 문제해결에 있어 상호협동을 요구한다. 따라서 다른 사람에게 기여해야 하는 필요를 느낀 경우에 역경을 극복할 기회를 얻기도 한다.
사회적 관심은 가족관계 및 다른 아동기 경험의 맥락에서 발달하는데,
부모는 협동심,연대의식,동료의식 같은 사회적 괌심의 발달에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친다.
장래의 모든 적응력의 중요한 관건으로 개인의 심리적 건강 측정의 척도가 된다.
사건이나 경험 그 자체보다 그것을 대하는 태도와 의미부여가 중요하다.
3. 자립성 : 자신의 삶을 스스로 결정하고 책임지는 것.
4. 목적성 : 목적성이 높은 사람은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노력하며, 이를 위해 적극적으로 행동함.
위와 같은 요소를 가지는 생활양식, 개인의 생활양식의 개선을 위해서는
자신의 출생순서나 사회적 관심, 자립성, 목적성을 인식하고, 이를 바탕으로 자신의 삶을 변화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실 직업상담사 2급 시험의 내용에는 저렇게 깊이 들어가지는 않는다.
4가지 유형 지, 기, 도, 사 라고 앞머리를 따서 외웠던 기억이 난다.
지배형 : 활동수준은 높으나, 사회적 관심은 낮은 유형
타인지배,독단적,공격적, 외부세계지배, 자신만의 이익추구, 통제상황에서 양육 (첫째 장남)
기생형(획득형,의존형) : 활동수준은 중간, 사회적 관심은 낮은 유형
타인에 의존, 책임감과 부담감에서 벗어나려는 성향, 자신의 이익추구, 과잉보호로 양육
도피형(회피형) : 활동수준도 낮고, 사회적 관심도 낮은 유형
소극적, 불평불만, 실패를 두려워함, 이래도 그만 저래도 그만, 기가 꺾인 양육
사회형 : 활동수준과 사회적 관심이 모두 높은 유형
성숙한 인간, 다른 사람과 협력하며 자신과 타인의 이익 모두를 추구
자세히는 기억나지 않지만 태어난 서열에 의해서 획득하는 생활양식이기도 하고,
성격형성의 위협요인과도 관계가 있다.
예를 들면 지나친 애정이 타인을 의지하고 요구하는 성격으로 과의존하는 양육환경이나 기를 꺾어버리는 양육환경을 만들면 그게 기생형이나 회피형으로 간다는 구조다.
반대로 거부나 무관심, 폭력을 경험한 아동은 세상이 적대적이고 위협적이라는 지각 때문에 사람들에게 반항하고 비협조적으로 나오거나, 타인에게 유익을 끼침으로서 애정이나 존경을 얻을 수 있음을 이해하지 못한다.
나는 아마 약간 거부의 유형을,
남편과 동생은 과잉애정의 유형을 거치지 않았을까 싶다.
소름끼칠 정도로 나와 제부의 성향이 사회형+지배형이면서 염세적인 부분(일부 사회 부정적시각)까지 비슷하고, 남편과 동생은 사회적 관심이 제로에 가깝고, 눈에 보이는 현재에 초점을 두는, 그리고 혼자서 뭘 잘 못하는 기생형 생활양식의 모습을 보인다.
그러다보니 넷이 만나도 이야기 관심사가 동생은 남편과 함께 헬스,먹방 유튜브를,
제부와 나는 다큐,뉴스 같은 걸 보고 있다..... 이 얼마나 어이없는 조합인가.
(가끔은 내 동생이 내 동생이 아니고, 제부가 내 친동생인 것만 같아 여러번 제부 편을 들기도 했다)
또 반대로 남편은 동생 편을 들어서(게임충 모임으로 낮술 먹고 만취한 동생 두둔) 나의 뒷목을 잡게도 했다.
결혼생활 5년쯤 됐을 때, MBTI 만으로도 남편의 성격을 파악하고 나서 내 분노가 많이 줄었는데,
이 아들러의 개인심리학-개인주의 상담 을 통해 보는 나와 남편 사이의 차이점을 알고 나니, 뭔가 머릿 속 안개가 훨씬 많이 걷힌 느낌이 들었다.
지난 이혼각서를 쓸 뻔한 게임충 형님과의 술자리로 혼이 단단히 나고서도 당당하게 또 그 형님을 만나러 가서 (이번엔 내 동생까지 데리고 가서) 기어이 내 경고를 무시한 남편을,
"그래도 아직 날 때리거나 집을 날려먹진 않았지. 그리고 이번 우리집 김장도 가서 열심히 했어. 봐줄 건 봐주고 인정할건 인정하자."나를 달래며 남편이 올 때까지 강아지 산책을 하다가 허기가 져서 집으로 돌아와 저녁을 먹기로 했다. 술은 안 마셨다.
내가 술을 마셔서 둘다 취한 날은 사단이 난다.
나는 객관적인 판단과 남편과의 원만한 대화를 위해, 취하지 않는 것을 선택하기로 했다.
어제 오후 2시에 떠난 남편이 오후 10시에 조금은 술에 취한 눈을 하고 들어왔지만,
오늘 나의 18년지기 친구의 결혼식에 무리없이 잘 참석해주고 싸우지 않고 돌아와 준 것으로
남은 주말의 모든 시간은 게임에 보내든지 말든지 나와의 타협을 마쳤다.
그 때 세번에 걸쳐 내게 개인상담 해주신 노박사님의 말이 아직도 귀에 꽂혀있어 다행이다.
"내담자 분은 선택할 수 있는 성인이지요? 그래서 앞으로의 상황을 고를 수 있어요. 이혼? 그거 나도 해봤어. 흠 아니고, 내 딸같으면 그냥 이혼하라고 하겠지만 먼지씨는 또 다를거잖아. 지금 경제적인 상황도 있고.
그래서 일단은 자격증 빨리 따고, 그 다음에 생각해. 생각해볼 옵션은,
하나. 남편이 원하는 방향으로 그냥 휘둘려주세요. 그냥 무슨 상관도 하지 말고 냅두세요.이건 남편이 원하는거지 먼지씨가 원하는 방향이랑 반대야. 너무 사랑하면 그럴수도 있지만 자길 놓는거지.
둘. 남편을 조져서 원하는 방향으로 끌고 오세요.이건 반대야. 남편을 억지로 멱살을 끌고 가야 하니까 두배로 힘들지도 몰라요. 남편 성격 잘 알테니까.
셋. 이혼을 하세요. 사람 쉽게 안바뀌는 거 아셨으면 먼지씨한테 이제라도 맞는 사람을 찾던가 혼자 홀가분하게 사세요.이게 셋중에 제일 쉬워. 그런데 먼지씨는 이걸 원하는 것 같진 않아서. 다음에 만났을 때 답이 나온 상태였으면 좋겠네요. 그리고 그 게임 이름 좀 알려줄래요?내가 연구하는 게 있어서.
어렵죠? 이거 생각 잘해야 돼요. 내가 이 남자랑 연애할 때는 잘 몰랐던 부분을 결혼하면 정말 여러가지 모습을 볼 수가 있는 거거든요.
내 인생은 내가 선택하는 거에요. 누군가에게는 일상이 나한텐 지옥, 누군가에게 지옥도 나에게 견딜만 하면 그냥 일상.
먼지씨가 어떤 선택을 할지는 먼지씨가 정하는 거거든요. 그런데 중요한 건 그 선택의 주체가, 그리고 선택하기까지 모든 과정 안에, 다른 누가 아닌 먼지씨가 있어야 해요. 먼지씨 행복이.
그리고 또 중요한 것 하나는, 내가 지금 이 상황에서 바꿀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잘 구분하는 거에요."
정말 차분하지만, 우아하면서 머리를 땡 때리는 상담이었는데, 아. 박사님은 잘 계시는지 모르겠다.
자격증 합격하면 조언 너무 감사하다고 밥 한 끼 꼭 내가 사드리겠노라고 말씀드리면서 헤어졌는데.
남편 게임하든 말든 나는 내 수준의 마지노선을 남편한테 던져놓았다.
"어제 둘다 만취 안되고 귀가 해줘서 고마워. 수고했어. 28일도 잘 놀고 와~ 나도 친구들 만나서 잘 놀고 올게. 31일 연말에는 부부모임 가자!"
모든 걸 통제하거나 내가 싫은 걸 못하게 하려던 나의 남편양육(?)방식을 바꾸어서,
남편보다 나,
쟤보다 조금은 더 소중한 나에 더 집중해보기로 한다. 그리고 요즘 나는 휴식이 필요한 나의 몸 속 외침을 잘 들어주기로 해본다.
오늘도, 내일도, 시간은 계속 흘러가고, 내일 다시 출근해서 일상을 살 것이다.
그러다 보면 크리스마스 연말이 지나고, 새해가 시작되면 2025년도 쏜살처럼 흘러갈테니까.
아직 먼지에게는,
일말의 의리와, 사랑과, 책임감과, 욕망이 있다.
저 게임충들을 내 가족으로 온전히 받아들이기 위한 몸부림도 내년에는 본격적으로 해보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