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출판서평2] 틈

권현우 작가

by 글멋지기

작가 권현우

출판사 닿


권현우 작가의 첫 번째 단편소설집 『틈』은 직접 운영하는 출판사 이름만큼(출판사 닿) 흥미롭다. 외자이기 때문에 흥미롭고 ‘틈’이기 때문에 그렇다. 어떤 틈을 의미하는 것일까. 어느 해변가에 들이치는 파도의 흰 거품과 경계를 이루는 백사장의 장면이 표지에 올려져 있다. 물과 땅의 틈인가. 눈은 책에 고정하고 표지와 제목만을 머리에 담은 채 한참을 음미했다. 지적 즐거움이 이런 것인가 중얼거리면서. 어둠이 깊어진 새벽, 책상 전등의 흰빛이 안개처럼 퍼져있는 침대에 앉아 한달음에 읽어 내린 『틈』. 책 뒤통수에 박힌 ISBN 바코드를 바라보며 떠오른 것은 프리드리히 니체였다. 정확히는 유일하게 알고 있는 그의 문장이었다.


니체는 그의 저서 『선악의 저편(Beyond Good and Evil)』에서 말한다. “괴물과 싸우는 자는 스스로 괴물이 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 오래도록 심연을 들여다보면, 그 심연 또한 그를 바라보기 때문이다.(He who fights with monsters should look to it that he himself does not become a monster. And if you gaze long into an abyss, the abyss also gazes into you.)” 널리 알려진 해당 경구에서 ‘괴물’과 ‘심연’의 상징성은 동일하고 ‘싸운다’ 와 ‘들여다보다’ 또한 같은 행위를 나타내고 있다. 개인의 삶은 봄날의 나무 그늘 아래에 돗자리 펴고 앉아 햇살과 바람 아래 흐드러지게 살랑이는 꽃밭을 쳐다보는 나날의 연속이 아니다. 시도 때도 없이 존재를 드러내는 온갖 괴물들, 이를테면 불안, 혼란, 허무, 질투 등을 뒤집어쓴 심연이 폭풍우 치기 마련이다. 때로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 정면으로 마주하는 이들은 또한 어느샌가 자신이 똑같은 가면을 너무나 오래 쓴 끝에 얼굴 가죽과 붙어버렸다는 사실을 깨닫기도 한다. 혹은 영원히 깨닫지 못하거나. 그렇기에 개인은 심연을 경계해야 한다고, 동시에 스스로를 다잡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고 니체는 역설했을 것이다.


‘문학적 허용’을 구실로 해석의 방향을 다소 바꿔보겠다. 개인의 삶이란, 자신이 추구하고자 하는 이상이 구현된 궁극적인 ‘나’와 자신이 지양하는 비도덕적 가치가 뭉쳐진 반대편의 ‘나’ 사이의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라 볼 수 있지 않을까. 이 거리가 한계 이상으로 좁혀지면 투명한 물에 떨어진 한 방울의 검은 잉크가 순식간에 퍼져나가는 것처럼 니체가 지적한 ‘심연 또한 바라보기 때문에 스스로 괴물이 되는’ 일이 벌어질 것이고, 반대로 너무 먼 거리를 유지한다면 ‘괴물과 싸우는’ 과정을 통해 객관적 성찰을 이루고 이를 토대로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버리게 된다. 그렇다면 이 거리란, 다시 말하면 ‘틈’이라고 할 수 있겠고 작가는 책에 포함한 일곱 편의 이야기와 인물들로 각자가 자신의 인생에서 마주하고 있는, 직면하게 될 틈을 묘사한 것이다.


작가가 조명한 ‘틈’은 수록된 일곱 편의 이야기 자체에 스며들어있다. 그중 처음 세 편의 이야기 <두 개의 흉터>, <신블리>, <시미즈 만숀>를 하나로 묶어야 한다. 인간을 바라보는 작가의 관점 면에서 일곱 편의 이야기가 전부 같은 선상에 있다고 하겠지만 그 시선이 고정되는 층위의 측면에서 방향이 다르기 때문이다. 즉, 처음 세 편은 개인의 내면에 존재하는, 심연을 바라보는 자와 심연 사이의 틈을 직시하는 이야기이다. 따라서 주인공이 어느 한쪽에만 해당한다고 단정 지을 수 없고, 대립 관계가 두드러지는 주인공과 상대(혹은 집단)는 사실상 한 명의 개인인 것으로 읽어야 하고, 개인의 내면에서 발생하는 갈등을 둘로 나눠서 묘사한 것이라고 이해해야 한다.


첫 세 편의 묶음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신블리>를 예로 살펴보겠다. 속초 해수욕장에서 10분 정도 떨어진 카페에서 일하는 ‘나’는 “정년까지 여기서 일할 생각은 없고. 고향이니, 집에서 가까우니, 딱히 뭘 하고 싶은지 모르겠으니, 일단 여기서 뭉갤 수밖에” 없고 많은 사람이 찾는 동해 바다를 바라보며 “별다른 감흥이 없다. 넓다. 푸르 댕댕하다. 누가 저기 빠져도 아무도 모르겠다”라고 느끼는 인물이다. ‘나’가 일하는 카페에서 우연히 마주한 ‘신블리(신지숙)’는 학교 동창으로 속초를 떠났다가 (나중에 밝혀지지만) 갑작스레 사망한 부모의 유산을 받기 위해 다시 속초로 돌아온 상태다. 인스타그램 속 팔로워 5만 명을 자랑하는 인플루언서이기도 한 신블리는 자신의 영향력을 자랑하는 장면에서 ‘나’와 다르게 적어도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물려받을 유산에 인플루언서 활동으로 버는 돈 덕분에 어디선가 뭉갤 필요가 없는 것도 추론할 수 있다.


‘나’가 주말마다 하는 플로깅이 소위 인스타 업로드감이 될 것을 느낀 신블리는 억지로 ‘나’를 따라나서고 플로깅 본연의 목적보다 자신의 인플루언서 활동이 더 우선이다. 보정 앱으로 찍는 셀카가 중요하고 잘 나온 사진을 위해 쓰레기를 일부러 버렸다가 다시 줍기까지 하며 사진을 찍어댄다. ‘나’는 그런 신블리를 보며 “그날도 던져 버리고 싶은 게 하나 있었다”라고 느낀다. 이 부분에서 잠시 쉼표를 찍는다. ‘나’ 와 ‘신블리’가 각각 상징하는 것은 무엇일까. 쉽게 헤어나올 수 없는 나락으로 굴러떨어진 현대 사회의 병폐, 그 속에서 신음하며 미래를 꿈꾸지 못하는 절대다수의 일반인이 ‘나’라면, 과정과 방법을 온전히 인정받지 못하는 결과주의 경쟁 사회에서 일확천금의 욕망의 표상이 ‘신블리’인 것일까. 타인의 과실을 부러워할 수는 있어도 탐하지는 않는, 최후의 선을 지키는 ‘나’는 충족함을 몸에 두르고 타인의 최소한까지 경솔하게 침범하는 ‘신블리’를 바라보며 불쾌함을 느끼는 이 지점까지는 심연과의 거리를 잘 유지하고 있는 듯하다.


이후 모종의 사건이 둘 사이에 벌어지고 ‘신블리’의 껍데기를 쓴 채 인플루언서의 삶을 이어가는 ‘나’를 보여주며 이야기는 끝이 난다. 자발적인 투쟁은 아니었어도 괴물을 바라보며 적대감을 느끼는 수동적 싸움을 하던 ‘나’가 수용 가능한 한계 이상으로 가까워진 심연으로 걸어 들어가 결국 심연과 한 몸이 된 셈이라고 할 수 있다.(이 부분에서 펼쳐지는 이야기의 자세한 전개가 작가가 주목한 ‘틈’의 주제를 여실히 보여주므로 둘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을 꼼꼼하게 곱씹기를 바라고, 서평을 구실로 못된 헤살꾼이 되는 것은 피하고 싶은 심정에 결론만 간단하게 요약했음을 밝힌다.) 다른 두 이야기를 읽을 때 추천하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두 개의 흉터>의 ‘나’와 나머지 직원들과의 틈이 사라지는 순간, <시미즈 만숀> 속 ‘나’가 사는 집과 옆집을 아슬하게 분리하는 물리적 틈과 그것이 사라졌을 때 마주하게 될 ‘나’와 ‘옆집 할아버지’가 보여줄 인간의 야만적인 양면성이 부딪히는 순간. 언급한 두 순간을 문맥 속에서 찾아보거나 각자의 상상력으로 그려보는 것을 적극 권한다.


처음 세 편의 이야기를 제외한 나머지 네 편인 <처음하는 마지막 여행>, <세상에, 배신>, <라오스에는 뭔가 있다>, <틈>을 또한 하나로 묶어야 한다. 이 묶음 속 이야기들은 주인공이 타인과 맺는 관계 속에서 겪게 되는 자기 성찰과 가치관 실현의 과정 가운데에 그어진 틈의 혼란스러움을 그려내기 때문이다. <처음 하는 마지막 여행>의 선희와 태근, <세상에, 배신> 전반부의 태현과 진우 그리고 그들의 자녀이자 후반부를 채우는 하빈과 원영, <라오스에는 뭔가 있다>의 나(주혁)와 펩, 마지막 이야기 <틈>을 장식하는 나와 옆집 남자까지. 작가는 일인칭 시점과 삼인칭 시점을 적절하게 교차시키며 이야기를 전달한다.


두 번째 묶음 속 이야기들을 통해 주목해야 할 것은 앞서 언급한, 주인공과 타인 사이에 그어진 틈 속의 혼돈을 통해 주인공이 깨달음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포기와 선택의 실패 사이의 간극, 혹은 이면에 가려진 진실(처음 하는 마지막 여행)을 직시하게 되고, 속죄와 용서의 대상과 주체는 누가 되어야 하는지(세상에, 배신)를 마주하고, 진정한 봉사의 마음은 무엇인지(라오스에는 뭔가 있다)와 타인을 이해한다는 것의 의미(틈)를 주인공들은 깨닫게 된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편한 방 안에 앉아 느긋한 독서 따위의 행위를 통해 고상한 깨달음을 얻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혼란의 틈 속에 몸을 담근 채 상처 입고 괴로워하며 정신적 고통을 겪은 후에야 그곳에서 빠져나올 수 있게 되고, 만만치 않은 대가를 치르고 얻은 교훈을 손에 쥔 채 현실로 복귀하게 된다.


작가가 고찰하고자 하는 주제의식을 기준으로 전반부 이야기 세 편과 후반부 이야기 네 편을 각각 두 묶음으로 나눌 수 있음을 발견한 것은 큰 흥미였고 지적인 유희였다. 그러나 이 부분이 역설적으로 아쉬운 점으로 남는 것 또한 사실이다. ‘틈’이라는 개념을 주제로 일곱 편의 이야기를 한 권의 책에 담아냈지만 하나로 연결되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전반부 세 편의 이야기는 인간 내면의 역설과 모순을 직접적이면서도 한발 물러선 듯한 오묘한 목소리로 풀어낸 것이 두드러지는 장점인 반면 후반부 네 편의 이야기는 주제의 범위는 넓어졌지만, 인물과 소재의 밀도 그리고 주제의 깊이는 그 확장에 걸맞게 깊어지지 못하고 납작한 밋밋함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따라서 처음 세 편과 나머지 네 편을 처음부터 독립된 각각의 장으로 나눠 따로 제목을 부여하는 방식으로 구성하는 것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첫 번째 단편소설집 『틈』 이후에 권현우 작가가 선보인 『반가움에 꼬리를 흔들었다』에 얽힌 이야기를 소개하고자 한다. 북페어 현장에서 해당 책을 구매한 어떤 독자가 전한 일종의 후기였다. 현장에서 책을 구매했지만 작가의 얼굴이 기억이 나지 않았던 독자는 책을 다 읽은 후 나름대로 작가에 대한 인상을 그렸었던 것 같다. 이후 작가의 인스타그램에서 실제 모습을 보고 책을 통해 떠올린 인상과 너무나 달라서 많이 놀랐다는 말을 후기로 올렸고, 작가가 직접 그 후기를 확인했다고 한다. 이 또한 일종의 ‘틈’이지 싶다. 마지막 이야기 <틈>의 마지막 단락에서, “그 틈으로, 아주 작은 여지로도 사람은 타인에 대해서 이해하는 것이 달라질 수도 있겠다, 나는 일렁이는 가스의 파란 불꽃을 보며 생각했다.”라고 ‘나’가 말한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앞서 지적한 이 책 『틈』의 아쉬움도 달리 바라볼 수 있겠다. 두 이야기 묶음 사이에 존재하는 틈 자체를 인정하고, 오히려 이를 통해 독자 각자가 이해하는 바가 다양해질 수 있겠다는 기대를 가진 채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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