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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멋지기 Apr 14. 2024

완벽히 멈춘 시간

[2023. 2. 4]

아직 잠들어 있는 어둠 속 조용한 읊조림 한 방울에 아차 하는 마음과 안도하는 마음을 안고 눈을 뜹니다. 오늘은 토요일입니다. 약간의 흥분이 담긴 급한 발걸음을 옮겨 어디론가,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오전부터 눈을 뜬 것이라면 조금은 더 기분 좋은 토요일이겠다는 마음을 어슴푸레 밝아진 방 천장에 풀어놓습니다. 


피곤에 넋이 나간 어젯밤의 내가 매정하게 내팽개친 휴대폰에서 저마다 다른 목소리가 운율을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정확히 십분마다 찾아오는 이들의 울림이 평일보다 덜 차가운 느낌이 들어 잠시 눈을 감고 무료 공연을 즐깁니다. 십분이 일곱 번 돌아오면 마지막 무대를 장식하는 러시아 노래 백학이 내려앉아 일분 동안 조용히 울음을 흘리고 퇴장합니다.


벌써 희미해져가는 지난밤 꿈속에서 바빴던 주인처럼 이 네모난 기계덩어리도 밤새 바빴던 모양입니다. 잔뜩 쌓여있는 과외 요청서를 하나씩 띄우며 천천히 그들의 사정을 들여다봅니다. 짧은 답변 속에 그들이 살아온 흔적과 앞서 기다리고 있는 시간이 눈에 들어옵니다. 걔 중 연이 닿는 몇몇 덕분에 밥벌이라도 하니 언감생심 허튼소리는 목구멍 깊게 삼키지만, 영어를 배우지 않아도 전혀 문제없을 세상은 에덴동산만큼이나 닿기 어려운 것일까. 영어에 상처받은 이들을 위한 위로와 괜한 툴툴거림은 큰 한숨으로 흘려보내고 남은 알림창을 누릅니다.


매달 내 품에서 도망가는 5,600원, 12,100원과 작별 인사를 합니다. 하나 걸러 하나씩 문 앞에 두고 간다는 문자는 부끄러움과 자괴감이 진해지기 전에 강하게 삭제 버튼을 누르지만 침대 밑 푸쉬업바(push-up bar)와 문 틀에 달아둔 풀업바(pull-up bar)로 향하는 눈을 지우진 못합니다. 


여전히 사지는 푹신한 이불 속에서 꿈틀거리고 있습니다. 온갖 종류의 추상화를 온몸으로 그리다 보면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구도를 본능의 영역에서 느끼게 되는 순간이 찾아오고, 그때야말로 침대 이불에 녹아내리는 황홀함을 느낄 수 있게 됩니다. 따뜻한 커피보다 음악이 더 필요한 순간이기도 합니다. 재생목록 1, 2, 3... 그 누구도 알 수 없을 특별한 구성은 평범한 이름에서 더욱 빛을 발합니다. 오늘 같은 날은 재생목록 7이 제격입니다. 매일 아침 거울 속 나와 옥신각신거리며 다급한 마음을 달래주는 진한 커피향 가득한 재생목록 7을 눌러 귀 옆에 바투 놔둡니다. 


다시 잘 생각은 없어 안경을 쓴 채로 눈을 감습니다. 벌써 눈꺼풀 위를 비추는 창밖 햇살이 느껴지는 시간입니다. 여전히 사지는 최적의 위치를 고수한 채 미동 없이 이불 속 따뜻함을 한껏 빨아들이고 있습니다. 프랑스어, 러시아어, 일본어, 영어. 머리맡을 울리는 운율은 전 세계를 여행 중입니다. 안경을 벗으면 일등석에 앉아 훨씬 더 편안한 여행을 즐기는 것처럼 될 수 있을까 움찔거리는 팔에 애써 힘주어 제자리에 두고 대신 익숙한 리듬에 휘파람을 얹습니다. 


토요일은 흘러갑니다. 토요일은 이렇게 멈춰있습니다. 내가 누운 곳이 일등석이고 전 세계의 소리가 내 방을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미동 없이 이완된 온몸에서 온기가 흘러나옵니다. 모든 것이 완벽히 멈춰 선 오늘은 토요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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