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아이들이 이야기한 소속사는 남자 아이돌만 배출하던 곳이었다. 그 소속사에서 정말 여자 연습생을 키우고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루머로도 여자 연습생은 언급된 적이 없었다. 그때보다도 전부터 의심은 하고 있었지만.
솔직히 같은 지역에, 심지어 같은 동네에 있다는데 얼굴 한 번 본 적이 없다는 게 말이 되나? 얼굴을 궁금해하니 사진을 보내준 적이 있는데, 인터넷에서 본 적이 있는 듯한 얼굴-당시 인터넷 얼짱 같은-이었어서 진짜 본인일까, 의심스럽게 생각만 하고 넘겼었다.
뿐만 아니라 당시의 카카오스토리 쪽지로 일호에게서 연락이 오기도 했다. 어떻게 하나 둘 나타나는 건지. 솔직히 귀찮았다. 같잖기도 했다. 다른 친구들에게 그들의 연락을 받았느냐 물어보니 아니라는 답이 돌아왔다. 왜 나한테 그랬을까. 내가 만만 했던 건가.
카카오스토리는 메일만 있으면 계정을 얼마든지 만들 수 있었고, 본인 카톡도 아니고 카카오스토리 언급이나 쪽지로만 연락이 오는 게 이상했다. 그렇지만 그것만 가지고 이상하다고 대놓고 말할 수도 없어서 그렇게 또 몇 주를 지냈다. 얼렁뚱땅 넘어가려고 하는 게 눈에 보였지만 그래도 친구였으니까 같이 또 얼렁뚱땅 화해한 듯 아닌 듯 지냈다. 그게 원래의 관계로 돌아갔다는 뜻은 아니었다. 그 아이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은 것 같았지만.
하나의 관계를 끝내는 과정은 참으로 질척이고 길었다. 살면서 만난 수백 명의 사람 중 한 명 끊어내는 게 뭐가 그렇게 어려웠는지... 한 명을 끊어내기 위해 내가 놓아야 했던 인연은 다섯이 넘었다.
역시나 평범한 날이었다. 온전한 화해를 한 것이 아니라서 알게 모르게 그 아이와의 관계는 불안정적이었지만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지내고 있었다. 우리는 친해질 때부터 A라는 친구와 셋이 잘 붙어 다녔는데, 그날 A는 부모님이 집에 안 계셔서 그 아이를 불렀다. 나는 그날 집에 할머니와 이모등의 외가친척들이 오기로 했어서 A도 굳이 나에게 오라고 권유하지는 않았다. 두 사람의 집은 그렇게 먼 편은 아니었지만 그 아이의 집에서 A의 집까지 가는 사이에 우리 집이 있었다 보니 그 아이는 내가 생각났던 것 같다. 지금 A의 집에 가는 중이라며 전화를 걸어온 그 아이는 같이 가지 않겠느냐 권유했다. 가능했다면 갔을지도 모른다. 지금 생각하면 A도 아니고 왜 본인이 멋대로 권유했을까 싶기도 하지만 그만큼 같이 놀고 싶었... 아무리 그렇더라도 거절하는 친구네 집까지 오는 건 좀 그렇지 않나.
"가고 싶긴 한데... 나 집에 외할머니랑 이모랑 와계셔서 안 돼...~"
"가고 싶어? 그럼 가자."
"응? 아니, 못 간다니까?"
"나 곧 너네 집 앞 버정이야. 내릴게."
"뭐? 아니, 왜? 오지 마!"
어쩌면 내 대답이 그 아이에겐 데리고 가 달라는 말로 들렸을지도 모르겠다. 그게 아니었다면 그렇게까지 올 필요는 없었지 않았을까 싶다. 물론 은연중에 내 말속에 놀고 싶다는 의지가 강하게 묻어났을 수도 있다. 혹시 몰라 부모님께 여쭈어보고 들은 안된다는 대답까지 전화기 너머로 들렸으리라 생각했는데, 그 아이에겐 들리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가고 싶다고 투덜대는 내 말만 듣고 와준걸 수도 있지만...
끊겨버린 전화를 허망하게 보며 무슨 일이냐 묻는 할머니께 상황설명을 하는 사이, 그 아이는 정말 우리 집으로 왔다. 밑에 있으니 내려오라는 문자를 받고 보내고 오겠다 말했을 때, 당신은 괜찮으니 놀고 오라는 할머니께 얼마나 죄송했는지...
급하게 뛰어내려 간 곳에서 그 애는 그저 웃으며 어서 가자고 말했다. 혼자 웃는 게 얼마나 얄미웠는지 말이 곱게 나가지 않았다. 얼른 돌아가라는 말에도 왜 안되냐는 말만 반복하던 그 아이는 결국 저를 두고 가려고 하는 나를 쫓아와 집까지 고개를 넣었다. 다급하게 밀어내도 기어코 집 안에 있는 가족들에게 말을 걸기까지 했다. 깜짝 놀란 동생에게 여유롭게 인사말을 건네고 우리 부모님께 가장 먼저 한 한 마디.
" ― 왜 안 돼요? "
요즘 유명한 비비지의 응원법-뻔뻔해 당당해 기막혀-이 그때도 있었으면 분명 머리에 맴돌았을 것이다.
부모님도 비슷한 생각이셨는지 어색하게 웃으시며 안된다고 말리셨는데 그게 어쩌면 당연한 반응이지 않았을까. 부모님 입장에서는 무작정 찾아온 아이가 허락도 받지 않고 침범해 온 거나 마찬가지였을 테니까. 참 우스운 건, 그 상황이 당황스러우면서도 얘는 이런 애지 싶었다는 거다. 거기서 끝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다시 이끌고 밖으로 나와 왜 그러냐고, 제발 그냥 가라고 말하는 나의 팔을 붙잡고 같이 가자고 당기는 게 -이런 비유를 쓰고 싶지는 않지만- 요즘 이래저래 많이 보이는 전남친 같았다. 버스 정류장에 데려다주고 보낼 생각으로 그 아이를 데리고 가는데, 살 게 있어서 나온 이모와 마주쳤다. 이모 입장에서는 여전히 실랑이를 벌이고 있으니 적당히 끊어줘야겠다고 생각하셨는지 지나가면서 '-이 안된다.'라고 말하셨지만 그 아이는 다시 한번 왜 안되냐고 물을 뿐이었다.
읽는 입장에서도 지겨울 걸 안다. 왜 그걸 그렇게까지 끌었나, 그냥 화 한번 내지. 애초에 가고 싶다고 하지를 말지. 그런 생각이 들 수도 있을 것 같다. 이걸 쓰면서 나도 왜 그러지 못했나, 답답하게 느껴지기도 하니까.
거듭 이야기하지만 우리는 16살이었다. 아직은 친구가 소중했고 온전히 끊어내는 방법을 몰랐으며, 내가 본 그 아이는 위태로웠다. 그때의 나는 혹여 내 말 한마디가 문제를 일으킨다면, 이라는 가정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