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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정 Dec 02. 2024

인연을 소중하게, 먼 훗날 우리

아트인사이트 에디터 | Opinion | 영화




같은 영화를 또 보는 이유


 몇 번을 봐도 질리지 않는 영화가 있다. 진하게 우려지는 사골처럼 보면 볼수록 더욱 깊어지는 영화가 있다. 그만큼 흡입력 있고 호소력 짙은 영화라는 것이다. 다음 내용이 예상되고 결말까지 모두 알지만, 볼 때마다 마음가짐이 달라 새롭게 느껴지곤 한다. 기분 좋은 마음으로 바라본 영화는 아름다운 장면들이 눈에 띄는 반면, 그렇지 않은 마음에서 본 영화는 어두운 장면들이 유독 선명하게 두드러진다.


 나는 유난히 애정하는 영화는 여러 번 꺼내 본다. 그 영화 속으로 깊게 빨려 들어가, 잠시나마 현실을 잊고 영화라는 세계에 갔다 오고 싶기 때문이다. 그 영화를 찾게 되는 순간은 매번 다른데, 어떠한 감정이 거대하게 느껴질 때 찾는 경우가 많다. 대개 힘든 감정이 부풀어질 때 유독 그렇다. 그 힘든 감정을 작게 부수기 위해서 영화와 그 마음을 나눈다.


 살다 보면 어떠한 감정이 온몸을 돌돌 감싸 버리는 순간이 있다. 몸속 깊숙한 곳에 잘 숨겨놓아 괜찮았던 것이 어느 순간 왈칵 쏟아지는 때. 그럴 땐 애써 그 감정을 떨쳐내기보단 그 감정을 온전히 받아들여 마음껏 흐느끼고 싶을 때가 있다. 나는 그런 날이면 영락없이 영화를 찾는데, 가장 먼저 [먼 훗날 우리]를 찾는다.



 이야기는 춘절을 맞아 고향으로 가는 기차 안에서 시작된다. 그곳에서 처음 만난 린젠칭(남자 주인공)과 팡샤오샤오(여자 주인공)는 많은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가까워진다. 폭설로 인해 멈춘 기차에 따분히 앉아있던 두 사람은 기차에 내려 끝없이 펼쳐진 설경 속을 걸어간다.

 

 고향 집으로 도착한 두 사람. 시종일관 털털한 웃음을 보였던 팡샤오샤오는 집으로 들어가 현관문을 닫는 순간 웃음을 지운다. 아무도 없는 어둡고 적막한 집안은 팡샤오샤오의 외롭고 쓸쓸한 마음을 대변한다. 반면, 린젠칭은 따뜻한 명절 음식과 함께 그를 기다리고 반기는 아버지가 계신다. 그곳은 명절로 사람들이 북적인다. 두 사람의 모습이 대조되어 보이는 장면이었다.







성공을 찾아서


 두 사람은 베이징에서 성공할 날만을 그린다. 시골 고향이 아닌 큰 대도시인 수도 베이징에서의 삶을 꿈꾼다. 지방을 떠나 서울로 몰리는 우리나라 현실과 크게 다를 바 없다고 느꼈다. 모두 성공하기 위해 떠난 길인 것을.

 

 린젠칭은 어렸을 적부터 관심 있던 게임을 개발하는 것이 성공 목표이다. 한편, 팡샤오샤오의 성공 목표는 베이징 남자를 만나 결혼하는 것. 그래서 그녀는 베이징에 사는 재력을 갖춘 남자들과 만남을 갖는다. 하지만 호기롭게 시작한 만남은 매번 끝이 좋지 않았다. 그녀에게 막말하는 어머니를 말리지 못한 남자, 결혼한 사실을 숨긴 채 만난 남자, 모두 사랑 없는 만남일 뿐이었다.

 

 그렇게 허탈함만 남은 채 다가올 새해를 기다린다. 기쁠 때도 슬플 때도 언제나 옆에 있는 린젠칭과 함께. 그리고 갑갑하고 비좁은 쪽방에서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시며, 슬픔을 웃음으로 대신하듯 힘껏 웃는다. 집안에서 담배를 피우지 못하게 했던 팡샤오샤오였는데, 모든 것이 부질없게 느껴지는 순간이 아니었을까 싶다.


"2007년은 행복한 사람들의 해야. 비참한 사람들은 더 비참해지기만 했어."
"우린 아직 젊고 이렇게 똑똑하잖아. 지금은 가난해도 언젠가 성공할 거야. 꼭 성공할 거라고."


 울부짓듯 말하는 이 말을 듣고 마음이 저릿했다. 두 사람의 폭발적인 감정 연기가 감정을 더욱 증폭시켰다. 한 번쯤 '왜 이렇게 되는 일이 없지',라는 생각이 들은 적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의 마음이 어떤지 조금은 공감할 수 있을 거다.



 돌고 돌아 마침내 두 사람은 연애를 시작하며 사랑한다. 이젠 혼자가 아닌 둘. 함께 할 사람이 있다는 건 책임감과 함께 버팀목이 생기는 것이기도 하다. 여전히 가난으로 힘들지만 서로 의지하며 힘들어할 수 있다. 언제나 아슬아슬 위태롭게 외로워 보였던 팡샤오샤오도 평정심을 찾는 듯했다.







그녀가 원한 것, 그가 원한 것


 린젠칭과 팡샤오샤오는 오랜만에 고향 친구들을 만나러 간다. 순수했던 어린 시절과 달리 이룬 성과와 재력을 보는 어른이 된 친구들이었다. 기죽고 싶지 않던 린젠칭은 무리해서 차를 빌리고 오리구이를 잔뜩 사 간다. 린젠칭이 일하는 곳을 묻는 친구에게 다니는 회사의 직원 수와 연 매출을 말하는 팡샤오샤오. 은근한 자존심 싸움이 오고 가는 대화였다.

 

 쓸데없는 자존심 싸움은 친구들의 뒷담화로 이어졌다. 린젠칭이 허세를 부린다며 험담하는 친구들을 우연히 발견한 린젠칭. 그 모습을 지켜본 린젠칭은 음식값을 계산하려 했지만 너무나 비싼 가격에 차마 계산하지 못한다.

 

 참으로 씁쓸한 장면이었다. 나도 모르게 자꾸 남들과 비교하며 나의 부족한 부분을 찾고, 그렇게 한없이 내가 작아지는 순간. 나의 단점을 숨기고 싶었지만 결국 모두에게 들켜버렸을 때 밀려오는 창피함과 부끄러움. 이 모든 감정이 비수처럼 느껴졌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이미 생채기가 날 대로 난 마음은 결국 그를 끝없는 구렁텅이로 빠트린다. 희망에 찼던 마음은 사라지고, 열심히 살았던 모습은 없어진지 오래이다. 삐뚤어진 마음은 그녀와의 관계도 무너뜨린다. 두 사람 사이에 대화는 거의 단절되고, 린젠칭은 컴퓨터 게임에만 몰두하며 그 무엇에도 관심을 갖지 않는다. 설상가상 집도 쫓겨나며 지하 방으로 이사를 가고 만다.

 

 좀처럼 사이는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으며, 결국 팡샤오샤오는 그를 떠난다. 간다는 말에도 대답 없는 린젠칭을 뒤로 하고 떠난 그녀였다. 이제야 정신이 든 린젠칭은 떠난 그녀를 찾으러 달려간다. 멈춰있는 지하철 안에 있는 그녀를 말없이 문 앞에서 쳐다보기만 한다. 끝내 문이 닫혔다.

 

 나는 짧은 순간이지만 팡샤오샤오의 미묘한 표정 변화를 느꼈다. 린젠칭이 달려왔을 때, 그녀는 그가 붙잡아주길 기대하며 기다렸다. 하지만 지하철 문이 닫히고 그가 붙잡지 않았다는 걸 알았을 때, 그녀는 '이젠 끝났다'는 생각과 함께 엄청난 실망감과 허무함에 가득 찬 얼굴로 변했다.

 

 그리고 화면은 10년 후 재회한 두 사람이 이날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장면으로 바뀐다. '만약에 네가 떠나지 않았다면', '만약에 네가 용기 내서 지하철에 올라탔다면'... '만약에'라는 가정은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후회 섞인 가정일 뿐이었다. 흔히 말하는 '사랑은 타이밍'이라는 걸 여실히 보여주는 부분이었다.



 헤어진 후, 린젠칭은 잠시 잊고 있던 게임 개발에 다시 몰두하며 성공을 거둔다. 베이징에 집도 샀다. 이젠 팡샤오샤오가 원했던 경제력을 지닌 베이징 남자가 된 것이다. 린젠칭은 다시 찾아온 춘절에 팡샤오샤오를 만나고, 베이징 집에 함께 살자고 말한다. 하지만 팡샤오샤오는 전혀 기쁘지 않다. 그런 그녀를 본 린젠칭은 대뜸 다른 남자를 만나냐고 묻는다. 그 말은 들은 팡샤오샤오는 다시 한번 그에게 실망한다.

 

 이는 서로가 서로를 오해했기 때문이다. 린젠칭은 그녀가 원하는 것이 베이징에서 집을 갖은 경제적으로 안정된 삶이라고 생각했다. 돈 많은 베이징 남자만 만났던 예전의 그녀만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팡샤오샤오는 예전의 그녀가 아니다. 잘 먹고 잘 사는 것만이 다가 아니란 걸 깨달은 후였다. 하늘에서 별을 따고 바다에서 진주를 캐다 준다던 진심 어린 순수한 사랑을 준 렌진칭을 원한 것이다. 하지만 린젠칭은 그녀의 마음을 알지 못했다.







사람 간의 인연이란


 재회한 두 사람은 10년 전에 하지 못했던 제대로 된 작별 인사를 한다. 그리고 뒤늦게나마 돌아가신 린젠칭 아버지가 팡샤오샤오에게 쓴 편지를 그녀에게 보낸다. 그 편지를 읽는 아버지의 목소리가 내레이션으로 흘러나오며 아버지 시점의 이야기가 나온다.

 

 살아있는 동안 여전히 팡샤오샤오를 그리워한 아버지, 사람 냄새로 가득 찼던 명절에 세월이 흘러 혼자 남게 된 아버지, 오지 않는 아들을 계속 기다리는 아버지, 외로움이 묻어나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며 눈물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인연이란 게 끝까지 잘되면 좋겠지만 서로를 실망시키지 않는 게 쉽지 않지. 좀 더 세월이 흘러 나이가 들면 깨닫게 될 거란다. 부모에겐 자식이 누구와 함께 하든 성공하든 말든 그런 건 중요치 않아. 자식이 제 바람대로 잘 살면 그걸로 족하다. 건강하기만 하면 돼."


 이 말은 아버지가 아들과 팡샤오샤오의 어긋난 관계에 대해 이야기하는 동시에, 자신과 아들의 삐걱댔던 관계에 대한 아쉬움도 담긴 말인듯했다.



 영화는 아버지의 편지를 읽은 팡샤오샤오가 린젠칭이 만든 게임을 끝내며 이야기가 마무리된다. 팡샤오샤오는 게임 속 '미안해'로 도배된 화면을 보며 린젠칭의 사과를 받아들이고, 이후 게임 캐릭터 이언과 캘리가 만나며 무채색이 채색으로 바뀐다. 그리고 숨겨진 마음이 나타난다. '이언은 영원히 캘리를 사랑해'.

 

 영화에서 흑백은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이다. 알록달록한 색으로 보는 과거와 달리 현재는 고요한 흑백만으로만 채워진다. 그런 색깔 하나 없는 현재가 아름다운 색채로 변하는 순간은 내 마음도 고운 빛깔로 따뜻해지는 기분이었다. 서로가 10년 동안 뭉그러지도록 잡고 있던 후회를 놓아주는 모습을 표현한 게 아닐까 싶다. 묵은 체증이 가시는 듯했다.



 먼 훗날 우리는 엔딩 크레딧까지 완벽한 영화이다. 실제 일반 사람이 여럿 나와 예전에 사랑했던 사람을 향해 하고 싶은 말을 스케치북에 적어서 보여준다. 남녀노소 할 거 없이 누구나 가슴 한편에 잊지 못한 사랑이 하나쯤 있구나 싶었다. 그리고 린젠칭이 돌아가신 아버지에게 하고 싶은 말을 쓴 편지를 담담히 읽는 것을 마지막으로 영화가 끝이 난다.

 

 마지막 한 마디를 남기고.


 소중한 이를 잃기 전에 미안하다고 말하세요. 더 늦기 전에 사랑한다고 말하세요.










※ 본 글은 아트인사이트 에디터로서 직접 작성한 글입니다.


[ 아트인사이트 원문 ]

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73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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