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2000년대 뉴 밀레니엄 시대를 넘어 AI와 쳇GPT, 메타버스가 이글거리는 시대에 살고 있는 현재. 기이하게 타임머신을 타고 백투더 조선시대로 난 돌아갔었는데 그건 결혼이 나에게 주는 큰 보너스와 같은 덤개념이였다. 말이 덤이지 거의 주가 되다시피하여 결혼과 동시에 부부가 가족을 만들어서 신상출시처럼 새로 출발하여 꾸려나가기보단 시가의 종속된 '작은 집' 같은 개념으로 모든 건 시가 중심으로 돌아가며 살게 되었다. 결혼 전에는 손님처럼 대해주시던 배우자 쪽 가족들은 결혼과 동시에 자기네 식구라고 여겨서 였을까? 일손 한명 추가된 것 마냥 그전과는 다르게 나를 대해주셨다. 첫째의 며느리가 아닌 난 둘째의 며느리였다. 따라서 호칭도 어색한 '아주머님'과 아주머님의 아내인 '형님'이 생겨났고, 그 아래 결혼 않한 남동생에게는 '서방님'이라는 호칭과 함께 나의 가계도는 심플했었지만 기이한 호칭과 함께 갑작스레 부풀어났다.
어느 날, 신혼집에 시어머님은 찾아오셔서 종이를 하나 내게 건넸다. 집안 사람들의 생일들과 제사일들. 모두 음력이라서 매 년 날짜가 달라지니 년마다 새로 음력으로 전환해서 알고 있으라며 보고 받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머저리 같은 나는 그러라 하니까 '알겠습니다' '네' 하면서 예스우먼이 되어져 버렸다. 마땅히 결혼을 하면 그래야 하는 줄 알았다. 어느 날, 시가 식구들과 함께 신발을 벗고 좌식으로 바닥에 앉아 먹는 고기집으로 외식을 갔었다. 더운 여름 날이여서 맨발에 샌들을 신고 갔었는데 난 뭐가 잘못된건지도 몰랐다. 그 날 저녁 '형님'에게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동서! 어르신들 앞에서 맨발을 보이는 건 예의가 아니야, 앞으로 양말을 소지하고 다니길 바래, 동서 때문에 시어른들에게 내가 혼났잖아. 나 오늘 양말 꺼내 신는거 봤지? 앞으로 그렇게 행동하길 바래." 한여름에 맨발을 보였다는 이유로 난 한순간에 그 집안에서 경거망동한 며느리가 되고 말았다. 삼십평생 여름에 양말을 가방에 챙겨가서 주섬주섬 신발을 벗고 양말을 신어본 적이 없었다. 그런 가르침을 받아본 적도 없었다. 당황해서 배우자에게 말을 했더니 돌아오는 답변은 "내가 그런거 아니잖아. 우리 엄마가 그런거잖아, 왜 나한테 이야기를 해? "라는 어처구니 없는 말이 돌아왔다. 신혼 초 내가 겪은 양말사건과 배우자의 대처는 나에게 있어서 '컬쳐쇼크' 그 자체였다. 시가의 행사일과 그 집의 가풍들은 날 혼란에 빠트렸었고 어느누구도 내 편에서 이야기해주는 주변인들은 없었다. 하나같이 다들 "결혼을 했으면 그 집안에 가풍을 따라야 하는거야", "다들 결혼하면 그러고 살어, 너만 왜 그렇게 유난이야?", "그러면서 서서히 맞춰가는거야", "너가 좀 예민한 것 같아, 넌 결혼 전에도 좀 예민했잖아" 이런 말들로 모두가 나를 가스라이팅 하고 있었던 것이다.
결혼 전 우리집에선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 아주 어릴 때 몇번의 제사를 엄마와 작은엄마들이 지냈던 것이 어렴풋이 기억에서 희미하게 떠오르지만 제사는 어느 새 사라지고 없어져버려 제사날이나 명절날에는 여행을 가거나 커서는 각자 자기만의 일정으로 자유롭게 보내곤 했었다. 이것 또한 결혼하고서는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동서는 복받은 줄 알아, 지금은 제사들 줄여서 4번 밖에 않하는 거야, 나때는 말이야, 어마어마했어" 라며 나보다 10년 먼저 이 집안에 식구가 된 형님이라는 사람은 이정도는 껌이라고 생각하라면서 '식은 죽 먹기'라고 나를 맥이면서 위로해주었다. 명절 하루 전 날, 아침에 시가로 출동하여 바닥에 앉아 전을 붙이기 시작한다. 생전 처음 해본 낯선 일에 누구 하나 친절하게 적응을 도와주는 사람들은 없었다. 난 무법천지에서 홀로 이 집안에 적응해야했다. 반나절 전을 붙이고 음식을 하면 돌아오는 건 시큰거리게 아픈 뼈마디들과 옷가지와 머리카락에 깊게 밴 기름냄새였다. 임신을 해서 배가 불러오든, 아이가 애기던간에 열외 따윈 없다. 군대보다 더 독한 환경에서 난 꿋꿋히 내 일은 하면서 시가와 조화롭게 어울리며 지내야했다.
하나부터 열까지 내가 살아온 문화와 새로운 배우자의 집안과는 맞는 게 없었다. 마치 로또처럼 매번 엇나가고, 매번 상충되고, 매번 불협화음이였지만 티 낼 수가 없었다. 주변인들 모두 약속이라도 한듯 다 그런것이라고 너가 적응해야한다면서 나만 맞추면 되는 거라면서 일동 합창하듯 나에게 동일한 말들만을 내뱉을 뿐이였다. 내가 가장 원했던 건 주변인들이 아닌, 배우자의 따뜻한 위로와 응원의 말들이였다. "너가 많이 힘들겠다", "고생하는 거 알아, 고마워" 그저 이런 따뜻한 말 한 두마디였을 뿐이였다. 하지만 모두들 팔짱을 낀 채, 잘 적응하고 있나, 관리감독하는 듯한 눈초리로 바라보았고, 난 거기에 부응하고 인정받으려고 아등바등거리면서 애를 쓰고 있었다.
불쑥불쑥 비밀번호를 찍고 신혼집에 들어오는 시가의 만행들이 난 너무나 불쾌했었지만 배우자는 "뭐 그럴 수도 있지, 비밀번호 바꾸면 우리 부모님 속상해하셔"라며 원가족과 분리가 되지 않은 8살연상의 배우자를 보면서 마치 8살짜리 아이를 보는 듯 했지만 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바보가 되어있었다. 나 혼자만 사는 집이 아니기에 내 마음대로 몰아 붙일 수만은 없었던 일이였다.
시대가 변했어도, 집안마다도 다르겠지만, 어디선가는 나 같은 며느리들이 존재하리라 본다. 배우자의 가족들이 '주'가 되어서는 안되지만, 배우자 집안에 편입되어 새로운 부부의 가족문화를 새롭게 만들어나가기 보단 배우자의 집안에 종속되어 그 집안 문화를 따라가게 되는 기이한 현상은 정도의 차이만 다를 뿐 아직도 퍼져 있을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배우자의 태도이다. 상대를 배려하고 존중한다면 결혼과 동시에 다른 가풍으로 우여곡절이 많은 상대를 방치하는 태도를 보여서는 안된다. 어찌됐던 결혼한 부부는 새로운 배에 같이 승선한 파트너이다. 그렇다면 그 파트너의 태도는 안일해서는 안되며 솔로몬처럼 현명하고 지혜롭게 대처해야만 한다. 배우자의 태도에 따라 결혼과 동시에 조선시대로 보내져버린 상대는 슬기롭게 적응하며 해쳐나갈 수 있을지의 유무가 갈리게 된다.
결국 난 7년만에 나홀로 총대를 메고 시댁에 반기를 들었고, 현재 시가 행사나 출입 및 연락을 전혀 하지 않으면서 결혼 생활을 유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