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며느리, 트라우마
추석이 다가오면 어김없이 트라우마처럼 그때 그날의 추억이 자동으로 상기되어진다. ”동서 표정이 왜 그래? “어김없이 이른 아침부터 추석 전 날. 잠에서 완전히 깨지도 못한 채 쌀가루를 반죽하며 송편을 빚는다. 출산 후, 손가락 뼈마디가 약해진 탓에 밀가루와 다른 가뭄 같은 쌀가루 반죽을 치대니 손 마디마디가 아파온다. 추석이 지나도 열흘 후 또 다른 제사에 가을은 늘 고되었다.
어머님은 추석이 지나고 열흘 후 있을 제삿날. 일이 있다고 당신이 음식을 할 테니 제사 시간에 맞춰 저녁에 오라는 말을 송편을 만드는 중 건넸고..난 내심 속으로 기뻐하고 있던 찰나, 형님은.. “어머님, 며느리가 둘씩이나 있는데 왜 그러세요? 저희가 오전에 일찍 만나 제사음식 할 테니 그냥 다녀오세요” 응 넌 나와 한마디 상의 없이 내가 옆에 있는데 그런 말을 건넸다.
그리고 내 표정을 보았고 어르신들이 다 계신 자리에서 넌 나에게 표정이 왜 그러냐면서 큰소리로 물어왔다. 얼마나 나를 병신 핫바지로 니 밑이라고 생각했기에 나의 표정조차 너가 관리하는 주체가 된 건지.. 가뜩이나 손가락 마디마디가 아파 죽겠구만 너의 그 어이없는 언행에 밑에 사람인 내가 감히 “기분이 안 좋아서 그러는데 왜요?”라고 첨으로 말대꾸가 아닌 진심으로 반기 섞인 말투로 대답했다.
“동서 따라와” “네” 조용히 나를 방으로 부르더니.. 어르신들 다 있는데서 쟁반을 던지도 씨발이라고 말을 할뻔했다면서 말을 건넨다. 속으로 생각했다. 너가 드디어 미쳤구나? 가만히 있으니까 진짜 가마니로 보이나 보구나. 7년을 참았다. “아 그러세요? 만약 씨발이라고 말하고 쟁반을 던졌더라면 저 가만히 있지 않았을 거예요. 아마 아수라장이 되었을 걸요?” 나는 대꾸했다. 너가 실제로 어르신들 앞에서 그렇게 행동했으면.. 그 집 안에서 계급이 제일 낮은 내가 감히 세상에 내가 아는 욕이란 욕은 어르신들이 있던 없든 간에 다 내뱉었을 거야. 안 그러길 넌 정말 잘한 거야.
더 짜증 나고 제일 나쁜 인간은 늘 모든 걸 보고 방관하는 당신의 그 병신 같은 행동이었던 거지.. 내 식구 아니잖아 너네 식구잖아.
그 빌어먹을 의무감과 책임감 때문에.. 나 하나로 인해 추석이 어그라지는 게 두려워 추석을 무사히 제 역할을 소화하며 마무리시켰다. 그 추석기간 동안 형님이라는 작자는 날 누르고 싶었는지 도 넘는 발언들이 계속 이어졌고.. 우리 부모까지 본인의 입방아에 오르라 내리락하면서 선 넘게 날 건드렸다. 평소에도 화장을 안 한다며 여자의 화장은 매너라며 날 꼽주었고 아이가 발바닥 통각에 빠져 한동안 맨발로 걸어 다니다 발가락에 금이 갔었을 땐 엄마의 자질 운운하며 나를 나무랐었다. 내 지위는 그들이 정해주는 게 아니다. 그 매겨진 지위대로 살 필요가 없는 것이다. 내 지위는 내가 만들기로 결심했다. 모든 임무를 마치고 추석이 끝난 뒤, 난 그 빌어먹을 라인에서 이탈하기로 다짐했다. 막무가내로 아무 생각 없이 결정하진 않았다. 행동하기 전 머리가 터져버릴 만큼 수백만 가지의 옵션과 시뮬레이션을 돌려보았고.. 그렇게 하기로 마음먹었다.
열흘 후, 다시 있을 제사 전, 난 어머님에게 앞으로 모든 시가 행사참여에 불참하겠노라며 추석이 끝난 후, 통보문자를 보냈고, 즉시 전화를 걸어 만나서 대화하자며 우리 집에 찾아오셨다. 둘 뿐인 며느리들 간에 왜 그러냐는 둥.. 당신의 하소연을 들어주며 미동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앞으로 그 여자를 다시 마주칠 일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반말하지 말라고 전해달라며 말을 건넸다. 뭔데 나에게 자기 마음대로 말을 놓고 반말을 찍찍해대는지 알 수 없다며.. 그래도 반말을 한다면 나 역시 그러하겠노라고 당부했다. 그리고 난 화수분처럼 말을 내뱉었다. “얼굴도 모르는 난 알지도 못하는 조상님 제사? 지낼 수 있어요. 그게 문제가 아니에요. 바닥에 앉아 하루종일 음식하는 거요? 할 수 있어요. 어렵고 힘든 일 아니에요. 근데 왜 누군 일하고.. 누군 거실에서 놀고.. 누군 당일 날 코빼기만 딱 비치면서 절만 하는 거죠? 왜 전 새벽부터 불러놓고 세팅 다 해놔도 누군 뒤늦게 눈곱 떼며 당당하게 걸어오는 거죠?”
난 “UNFAIR” 한 것에 상당히 예민한 아이였고 성인이 되어서도 변하지 않았다. 장남은 일을 하잖아, 맞출 수밖에 없다는 발언에 ”어머님, 제가 직장을 구해 다니면 저도 아주버님처럼 눈곱 떼고 아침에 늦게 와도 되나요? “ 그 후에 하시는 말씀이 당신이 자식을 잘못 키웠다며 미안하단다. 날 모진 나쁜 년으로 만들 셈인지.. 문제의 맥락은 그게 아니었다. 뒤에서 열일을 해도 모서리에 앉아 밥을 먹는 내 존엄성과 존중감은 그 집안에 1도 존재하지 않았다.
제발 손발이 있으면 너희들 밥은 너그들이 일어나서 밥 퍼 먹어라. 고추 달린 남자새끼들이 존나 쪽팔리지도 않냐? 여자를 그렇게 부려먹으면 세상 편하고 좋고 뭔가 너네들이 큰 힘이라도 가진 것 같지? 이건 그 집안 남자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그렇게 만든 여자들이 존재했으니까 말이다. 마치 종 부리듯. 너네보다 위에 있다는 마인드를 가진 남자들을 결혼 전 내 주변엔 없었고. 그런 사람이 있다 한들 대차게 싸워서 척을 지거나 거리를 두며 지냈었다. 나의 성장과정에서 남녀는 늘 동등한 위치에 있었고, 차이 또한 느끼지 못하는 환경에서 자라왔었다. 설사 직장생활에서 연봉차이며, 여러 상황에서의 대우차이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런 것에 크게 신경 쓰며 살아가지 않았었다. 짧게 입고 다니지 말라는 아빠의 말에도 가볍게 무시하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입고 싶은 대로 입었었고.. 주위에 여자친구들보다 남자친구들이 많았었고 그런 남자애들이랑 막역지간 하게 잘 지냈었다. 이런 나의 모든 생각과 가치관에 지각변동이 일어난 건 결혼 후의 불합리적인 환경을 마주 하면서였다.
아들만 셋인 집안에 대를 중요시하는 이 집안에서 딸만 둘을 낳아 시어머니의 모진 구박을 다 받으며 살아온 형님은 10년 만에 둘째 아들의 결혼으로 두 번째 며느리인 내가 이 집에 들어왔다. 나이차이가 많이나 주변에선 빠른 임신을 원했고, 결혼 후 두 달 만에 계획임신으로 아이를 가졌다. 10년 동안 자기가 겪은 모진 시집살이를 나에게 다 털어놓으며 이 집안에 성이 다른 사람들은 자기와 나뿐이라며 동맹을 맺으려 한 형님의 처세에 난 혼란스러웠다. 형님이 말하는 시어머님은 세상 못된 여자였으며 나에겐 그런 모습을 전혀 보이지 않아서였다. 그런 못난 행동을 모질게 다 받으며 묵묵히 살아온 형님의 삶에 동정심마저 생겼었다. 16주 후 산부인과에선 태아의 성별을 확인해 줬고 내 아이의 성별은 남자였다. 난 눈치가 보여 성별공개를 꺼려했다. 나의 아들 출산은 어르신들이 바라고 바란 고대했던 대를 이어주는 소원이 풀리는 일이었지만 형님에겐 열등감과 질투심이 폭발하는 두 번째 시발점이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