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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독 Oct 16. 2023

가까운 지인이 사이비로 의심될 때

혹시 너 사이비냐

   분명 속이지만 않으면 된다고 했는데. 명백한 사이비라고 생각했다. 아리송한 표정으로 잎새는 또다시 뜬금없는 질문을 던졌다.

   “빛이 파동이라고 생각해? 입자라고 생각해?”

   “흠… 파동? 입자? 에이 파동이네.”

   “맞아. 그런데 입자도 맞아.”

   “뭐? 왜 물어본 거야?”

   “그게 양자역학이야.”

   “그게 뭔데.”

   “양자역학이라고.”

   “그거 어떻게 하는 건데.”

   하나도 안 궁금했다. 객관화하자더니 양자역학은 왜 나오는 건지. 듣도 보도 못한 외계어를 줄기차게 내뱉는 잎새가 의심스러웠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과 나를 비교적 논리 있게 설명해 줄 이해가 물리학이라는 걸 깨닫고는 도리어 호기가 넘쳤다.     


   앞에 있는 친구에게 소리를 질러 보면 어떨까. 어떤 물체가 실제로 존재하지는 않지만, 소리가 공기 진동을 타고 퍼져나가 친구 귀에서 고함이 들렸다. 파동이다. 그리고 소리를 지르는 도중 나도 모르게 침이 튀었다. 침은 너무 작아서 볼 수 없었지만 존재했다. 입자다. 한 마디로 파동은 존재하지 않지만, 입자는 물체로서 존재한다. 그런데 잎새는 빛이 파동이면서 동시에 입자라고 주장했다.

   “뭐라는 거야? 드디어 돌은 건가?”

       잎새는 자신을 의심한다는 걸 알고 있었던 걸까. 익숙하다는 듯 그는 양자역학을 검색하면 제일 먼저 등장하는 물리학자 토머스 영의 <이중슬릿 실험>을 이야기했다. 이건 또 뭐람…

   “잘 봐. 빛을 두 개의 구멍을 향해 쐈을 때, 파동이면 다시 퍼져나가니까 A. 입자면 구멍 모양 그대로 B가 나올 거야.”

   거짓말처럼 결과는 두 가지가 번갈아서 나왔다. 그럼 잎새 말이 맞는 건가? 무슨 차이지? 단, 두 결과에 숨겨진 차이는 실험 과정을 누가 지켜봤는지에 대한 여부뿐이었고, 아무도 보지 않을 때는 파동, 봤을 때는 입자였다. 갖은 수작을 부려보아도 똑같았다. 한 마디로 관찰자가 있으면 전자는 존재하고, 없으면 존재하지 않는다. 한편 관찰자에 의해 존재 여부가 결정된다는 명제는 관측 전까지는 입자인지, 파동인지 알 수 없다는 말이기도 한데, 이를 ‘중첩상태’라고 부른다. 동전을 높이 던져서 손바닥에 떨어트렸을 때, 확인하기 전까지는 앞면일 수도 있고, 뒷면일 수도 있는 중첩상태라는 거다. 어제 동생 몰래 냉동실에서 꺼내먹은 구슬 아이스크림도 마찬가지다. 동생에게는 중첩상태지만, 나는 맛있게 잘 먹었다.     


   그래. 무슨 말인지는 알겠는데 이해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건 내가 바보라서가 아니라, 사과가 떨어지는 게 만유인력 때문이라는 뉴턴의 법칙처럼 그냥 세상이 그렇다고 한다. 모든 이론은 현상에서 원리를 찾아 자기들 언어로 정의했을 뿐이다. 나는 아인슈타인이 아니니까 그들이 정리해 놓은 이론을 애써 반박지 않기로 했다.

   “그래서 잎새야… 하고 싶은 말이 뭔데?”

   우리가 살면서 까맣게 잊고 있던 사실이 있다. 사람도 DNA로 이루어진 세포 에너지에 불과하고, 우리 눈에 관찰되는 건 모두 원자로 이루어져 있다. 다소 허무맹랑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그렇기에 사람도 누군가의 시선에 받아들여져야만 존재한다.

   “예? 뭐요?”

   물론 관측 전에는 중첩상태다. 누가 관찰하기 전까지 나는 그 대상의 우주에 실제로 존재할 수도,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한술 더 떠서 여타 동물과 달리 인간은 스스로 관찰자가 되어줄 수 있다는 말도 하는데, 인간과 다른 동물의 가장 큰 차이점은 이성을 가졌다는 것이다. 자아를 가진 우리는 3자 시점에서 나라는 존재를 인식할 수 있고, 결국 이성이 감정을 관찰자로서 바라봐 줄 수 있다. 혼란이었다. 이런 얘기를 듣고서 잎새에게 안부를 건넸다.

   “혹시 너 사이비냐?”

   사람을 에너지라고 하니까 “기운이 좋으세요.” 조상님께 인사드려야 할 것 같은 희대의 명대사가 뇌리를 스쳤다. 도대체 원하는 게 뭐길래 이러는 건지. 반신반의로 잎새의 말을 일일이 검색해 본 결과 어지간히 일리가 있었고, 한참 뒤에 의심을 차츰 내려두었다.    

 

   객관화를 요약해보면 물리학으로 세상을 이해하고, 심리학으로 인간을 이해하고, 마지막에는 철학적으로 삶에 적용하기 위한 의미 부여 과정을 맞이한다. 의심부터 했던 건 이해하는 과정 끝에 직접 의미화하는 행위가 낯설었기 때문이다. 세상을 둘로 나누어 말한다면, 그건 현상과 의미 아닐까? 현상 외에 우리가 만들어 낸 것은 기껏해야 의미에 불과하고, 모든 의미는 현상에서 비롯된다. 그런데 어느샌가 보이는 게 중점이 된 주객전도 세상에서는 의미로 인해 현상이 무시되는 경지에 이르렀다. 물론 그것은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준다는 이점이 있겠지만, 주어진 대로 받아들이는 게 익숙한 존재라면 학습된 의미로 편을 가르거나, 한 단어에 서로 다른 의미를 두고 누가 맞느냐 싸우기도 한다. 앞선 낯섦과는 모순되게 타인이 의미화해놓은 것을 가져와 꿰맞추는 것에는 그토록 굳건한 모습을 드리운다. 0.1%여도 가능성 있다면 있는 거고, 99%여도 확실하지 않다면 틀린 말이라고는 할 수가 없는 건데. 그런 논쟁이 의미가 있을까? 결론이 안 날 텐데.

   그래서 잎새를 의심했듯 사람보다는 상황을 믿고, 그럴싸한 포장지에 숨겨진 현상을 찾기로 했다. 상황은, 그러니까 현상은 거짓말하지 않으니까. “에이. 그래도 나쁜 사람은 아니야!” 같은 의미로 똘똘 뭉친 합리화로 더는 나를 잃지 않기로 했다. 아무리 좋은 의도였대도 나를 상처 입혔다면 적어도 내게는 나쁜 사람일지도 모른다. 하찮은 이름조차 정해져 있지 않은 무언가래도 그것대로, 우리에게서 느껴지는 감정 그대로가 현상이다. 약속되지 않은 의미로의 재해석은 필요치 않으며, 나의 현상이 변형되는 순간 자연히 그 의미도 달라질 것이다. 의미는 80억의 지구별 인구수만큼, 아니 지나간 모든 존재만큼 상대적이고 주관적인, 이왕 사는 거 조금이라도 더 잘살아 보자고 인간이 만들어 놓은 인생의 조미료일 뿐이다.    

 

   그러니 현상을 보면 오류가 보인다. 사이비는 본질에서 벗어난 잘못된 의미화에서 나오고, 정답 없는 세상에서 우리가 믿는 것들은 관념적으로 막연하게 인지해온 이 우주에서 존재 이유를 모르는 불안정한 인간이 만들어 놓은 환상일 뿐이다. 그것은 안정을 얻는 가장 쉬운 방법이었다. 돈, 직업, 언어, 나이 그 어떤 것도 본래 존재하던 현상은 없으며, 각각의 학문마저 하나의 분류일 뿐 결국 인간으로 결속된다. 가짜가 수없이 판치는 세상에서 현상을 볼 줄 알아야, 목적에 따라 시시때때로 갈아 끼우는 껍데기에 속지 않고, 이 세상을 이루는 특별한 자신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무언가를 습득하는 건 오롯이 나만의 표현을 하기 위함이고, 자기감정의 하나뿐인 목격자로서 외부에서 정해놓은 갖가지 의미를 받아들일 의무는 없다. 나로서 존재하는 법을 잊은 우리에게 그런 의미를 깨부수고, 자신을 되찾기 위한 의심은 언제든지 환영이다. 이것이 내가 정보를 습득하는 이유고, 그 때문에 가장 먼저 세상에 대한 이해로 객관화를 시작하였다. 제각기 명확한 건 자기 경험으로, 스스로에게서 묻어나는 현상들뿐이었다. 우리가 사는 차원이 우연한 별의 팽창이건, 영원히 알지 못할 시뮬레이션이건, 뇌가 구현해낸 세계관이건 그건 중요치 않다. 현재 이끌리는 곳이 어디인지, 그것만이 주요했다. 지금부터라도 나는 모든 것에 의문을 품고, 질문에는 세상이 원하는 답이 아닌 새로운 되물음을 하기로 했다.

   “왜?” 그게 나라는 본질을 되찾는 유일한 방법이고, 모든 건 의문에서 시작되니까. 판단 빠진 의심은 관심이자 호기심이고, 그곳에서 흐른 물음표가 사랑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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