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체가 여러 겹의 오라로 이루어져 있다는 이야기를 처음 접한 것은 서른 무렵, 어느 요가책에서였다. 하지만 그간 배워 온 지식과 너무 달라서, 당시에는 그저 지성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기에 사람들이 가졌던 미개한 믿음 체계거니, 가볍게 읽어 넘겼다.
그러나 그로부터 이십 년이 넘는 세월이 흐른 지금, 나는 오라가 실재하며 그 오라가 육체보다 더 실제적인 나라고 느낀다. 또, 나뿐 아니라 모든 생명체가 오라를 지니고 있으며, 생명이 생명일 수 있는 것이 오라 덕분이라 생각한다. 인류가 답을 찾지 못해 애태우고 있는 많은 의문의 비밀 또한 오라 안에 들어 있음을 안다.
하지만 이런 간략한 결론만으로는 서른 살의 내가 그랬듯이, 아무도 그 깊은 의미를 전달받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지금부터 나는 오라가 무엇이고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인문학과 과학의 언어로 풀어보려 한다. 먼저 '무엇이 나이며, 마음은 또 무엇인가'라는 오랜 철학적 질문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 보자.
데카르트는 확실한 진리에 도달하겠다는 일념으로 모든 관념을 의심한 끝에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유명한 선언을 남겼다. 다른 모든 것은 거짓이거나 환상일 수 있지만, 생각하는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만은 부정할 수 없더라는 것이다.
그로부터 몇백 년이 흐른 지금, 데카르트의 주장은 많은 부분이 부정된다. 하지만 '방법론적 회의(의심)'이라 불린 그의 사고법만은 여전히 유용한 측면이 있으니 우리도 방법적 회의를 한번 해 보자.
데카르트는 '사유하는 나'의 확실성을 깨달았지만, 우리는 생각하지 않는 순간에도 존재한다. 아무 생각 없이 멍하니, 내가 존재한다는 생각조차 없이 영화를 보고 있는 순간에도 나는 존재한다. 그러다가 모기 한 마리가 '웨엥~' 소리를 내며 지나가면, 우리는 곧 모기의 존재는 물론이고 나의 존재도 인식할 것이다. 그렇다면 '나'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사유하는 나' 이전에 '지각하는 나'가 먼저 존재해야 한다. 지각하는 능력이 없다면 모기가 피부를 벌집으로 만들어 놓아도 나는 내게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지 못할 것이다. 마치 로봇처럼 말이다.
그러니 이제 우리는 데카르트의 원칙을 살짝 수정해서 '나는 지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를 우리의 출발점으로 삼기로 하자. 이는 이미 여러 철학자가 언급한 바이기도 하다. 우리는 사유하기 이전에 사물을 지각ㆍ기억하고 이를 바탕으로 사고도 할 수 있는, 즉 인식하는 존재다.
나는 인식한다. 고로 존재한다.
'인식하는 존재, 인간', 여기까지는 어려운 것이 없는 것 같다. 그런데 문제는 다음이다. 그렇다면 인식은 무엇일까? 인식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철학에서는 인식이 가능하려면 대개 세 가지가 필요하다고 이야기한다. 대상, 매개, 주체가 그것이다. 책상을 인식하려면 책상(대상)이 있어야 하고, 나(인식 주체)가 있어야 하고, 그 둘을 매개하는 빛(매개)이 존재해야 한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세계를 인식하는 '나'의 비밀을 푸는 중이니, 주체의 문제는 마지막으로 미루고, 먼저 대상과 매개체에 관해 이야기해 보자.
우리의 지각과 인식의 대상이 되는 것,그것은 한 마디로 표현하면 '변화'라 할 수 있다.
만약 우리가 순수한 진공에 존재하여 외부의 무엇도 나를 자극하지 않고 내 몸의 세포들, 분자와 원자, 전자 하나까지 모두 정지해 변화하지 않는 상태라면 나는 결국 아무것도 인식할 수 없을 것이다. 인식할 대상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마도 이 상태가 성리학적 우주론의 시원을 이루는 무극(無極)의 상태일 것이다. 인식할 수 있는 잠재력은 있지만, 인식할 대상이 없는 상태. 그래서 무극은 곧잘 하나의 둥근 원으로 표현된다( O ). 무언가가 존재하지만 그 외에는 미세한 움직임조차 없는, 그래서 인식조차 작동할 수 없었던 어떤 상태.
하지만 세계에는 이미 인식할 대상이 가득하므로 지금 단계에서 우리가 인식의 대상을 고민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미세한 전자의 움직임 하나에서 거대한 행성의 변화에 이르기까지 우주의 모든 변화가 넓은 의미에서 우리의 인식 대상이 될 수 있다. 그러니 대상에 관한 이야기는 이쯤하고 넘어가기로 하자.
그런데 대상이 있다고 인식이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인식이 이루어지려면 두 번째로 대상의 상태를 주체에게 전해주는 매개물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깊이 살펴보면, 이 매개의 과정이 생각보다 재미있다.
예를 들어, 돌멩이가 날아온다고 해 보자. 만약 몸이 공기로 이루어져 있다면 우리는 돌멩이의 힘을 느낄 수 없을 것이다. 돌멩이의 힘을 느끼려면 그 힘을 감당하여 세기를 변별해 줄 맞상대(힘이 비슷해서 상대가 되는 무엇)가 필요하다. 그리고 물질세계에서그 역할을 해 주는 것이 바로 우리의 육체다. 즉, 육체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외부에 존재하는, 질량을 지닌 물체들을 인식하고 활용할 수 있다.
그런데 육체는 그것이 인식할 수 있는 역치(閾置 반응에 필요한 자극의 세기)를 지닌다. 예를 들어, 몸은 돌멩이가 부딪치면 인식하지만 공기가 부딪치면 인식하지 못한다. 또, 자동차처럼 인체의 역치를 넘어서는 에너지량도 인식하지 못한다. 자동차와 충돌하면 우리는 그 힘을 인식하기도 전에 먼저 파열되어 버릴 것이다. 즉, '인식'을 위해서는 변화의 크기를 변별할 감지 도구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돌멩이를 인식하려면 돌멩이에 상응할 만한 육체가, 분자를 인식하려면 분자의 운동을 느낄 만한 분자가, 그리고 원자의 변화를 인식하려면 원자의 운동을 느낄 만한 원자가 몸에 존재해야 한다.
그러니 만일 인간에게 '육체적 접촉'이라는 한 가지 감각만 존재했다면 인류는 오래 전에 절멸해 버렸을 것이다. 직접 부딪쳐 보기 전에는 무엇이 존재하는지 알 수 없었을 테니 말이다. 다행히 우리에게는 멀리서 다가오는 육중한 자동차의 존재를 알려주는 광자의 매개(시각)가 존재하고, 눈으로 볼 수 없는 분자 수준의 변화를 감지할 수 있는 후각과 미각도 존재한다. 덕분에 우리는 외부의 변화를 미리 인식하고 활용하며 생존을 유지해 올 수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인식의 첫 단계를 '감각感覺'이라 부른다.
그런데 감각의 대상과 매개물이 오직 이것 뿐일까? 감각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보통 육체의 오감(五感)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한 번 잘 생각해 보자. 우리는 어떤 공간에 들어섰을 때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고 느끼거나, 멀리서 누군가 나를 바라보는 시선도 느낀다. 또, 누군가의 에너지가 좋다고도 느낀다. 그렇다면 오감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이런 변화는 어떻게 인식되는 걸까? 이 외에도 또 있다. 우리는 문득 기분이 가라앉는 것을 인식한다. 또, 갑자기 어떤 생각이 떠오르는 것도 인식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변화는 어디서 올까. 대체 무엇을 매개로 어떻게 인식되는 걸까. 이제 감각의 대상과 매개를 조금 더 확대해 보자.
# 다음 편에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