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박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수박을 찾는다.
중학교에 입학하자마자 엄마는 나를 공부학원이 아닌 미술학원과 피아노학원에 보냈다. 초등학교때와 달리 중학교 때부터는 공부의 양도 많아지고 스트레스도 그만큼 높아질 테니 그림을 그리고 피아노를 치며 스트레스를 풀라는 깊은 뜻에서였다.
(문제는 둘 다 소질이 없어 스트레스가 더 쌓였지만 말이다.)
피아노학원과 미술학원은 같은 건물 위아래에 있었다. 미술학원을 가던 어느 날, 커다란 스케치북을 들고 엘리베이터에 탔는데 그날은 피아노학원 원장선생님과 같이 타게 되었다. 처음 피아노학원이 개원하던 첫날부터 등록해서 다녔던 터라 원장선생님과 꽤 친한 편이었다. 엘리베이터에 타자마자 원장선생님은 그림을 얼마나 잘 그렸나 보자고 하셨고 약간의 부끄러운 마음과 함께 스케치북을 내밀었다. 한 장 한 장 넘겨보신 선생님의 한 마디.
"공부 열심히 해야겠네."
그렇다. 사실 나는 정말이지 그림에도 음악에도, 모든 종류의 예술 방면에는 소질이 없다. 예체능에 있어서만큼은 큰 소질이 없다는 것을 어릴 때부터 항상 인지하고 있어서 크게 개의치 않았다.
물론 당시에는 민망하고 멋쩍었던 마음도 있었지만,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기 때문에 선생님의 말에 기죽거나 속상하지는 않았다. 심지어 한참이 지난 지금도 그날의 일 떠올라 혼자 웃을 때도 있고, 종종 나를 희생하며 웃겨야 할 때 단골 소재로 사용하고 있기도 하다.
그런데 오히려 나이가 들수록 예술에 감각이 있거나 소질이 있는 사람들이 부러워질 때가 많아진다. 주변에 나와 달리 예술가 혹은 예술적 감각으로 무장한 사람들이 많아서일지도 모르겠다. 버려진 천을 모아 손바느질로 한 땀 한 땀 조각을 엮어 집을 짓고 달항아리를 빚는 섬유작가부터 시대극에서 현대극까지 장르를 넘나들며 영화 의상 제작 디자이너까지. 아니, 그렇게 전문적이지 않더라도 집이며 회사며 센스 넘치게 자신의 스타일로 인테리어를 하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자신의 스타일로 멋지게 꾸미는 친구들까지. 삶의 전반을 아름답게 꾸미며 사는 지인들을 보면 마냥 부럽다.
백화점에 가면 마네킹이 입고 있는 것 그대로 사야 그럭저럭 코디가 되게 입고, 인테리어 잡지에 나오는 소품 그대로 혹은 비슷하게 사야만 그나마 인테리어라고 부를만한 구색이 맞춰지는 나에게는 당연히 부러울 수밖에 없지.
그런데, 앞에서도 말했듯 그런 그들의 솜씨가 부럽긴 해도 나의 예술적 무-감각이 그리 싫지는 않은 사람이 또 나라는 사람이기도 하다. 다들 각자의 그릇에 맞춰, 각자의 재능에 맞춰 사는 거지 뭐, 그런 편한 마음으로 살고 있는 사람이 나다.
그런 무던한 성격에도, 매년 여름이면 나의 예술적 무-능력에 약간의 원망스러운 마음이 생길 때가 있다. 바로 수박을 주제로 한 그림책을 만났을 때, 수박을 소재로 한 그림이나 디자인 제품들을 멋지게 만드는 작가들을 볼 때이다. 이토록 수박을 좋아하는 내게 조금이라도 그림을 그리는 능력이 있다면 그림책도 만들고 디자인 제품들도 만들며 행복할 수 있을 텐데. 덕업일치를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너무 신날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면 나의 무-능력 때문에 아쉽고 섭섭한 마음이 마구 든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백날 수박 그림을 그려봐야 실력이 늘지 않는 사람이 나인걸...
그저 예전처럼 나의 무-능력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그래서 나의 취미 중 하나는 수박 아이템을 모으는 거다. 그리고 장식장 한 구석에 나만의 수박존(zone)을 만들었다. 특히 여름만 되면 수박을 모티브로 한 상품들을 찾기 위해 눈에 불을 켜고 다니는 편인데 의외로 다양하지가 않다. 그래도 개중 정말 마음에 쏙 들게 잘 만들어진, 수박 디자인상품을 발견하면 세상을 다 얻은 것 마냥 그렇게 기쁠 수가 없고, 그 기쁨은 곧 나의 지갑을 열게 한다.
그리고 작년부터는 수박 관련된 그림책과 수박에 대한 역사/레시피 등이 적힌 책을 사 모으기 시작했다. '수박'이라는 단어로 서점 사이트에서 검색을 하면 꽤 오래전부터 수박을 주제로 한 그림책들이 발간되고 있다. 우선은 최근에 나온 책을 찾아보고 마음에 드는 것으로 (대부분 다 마음에 든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랄까...) 골라 모으고 있다.
처음 산 수박 그림책은 '앙통의 완벽한 수박밭' (코린 로브라 비탈리 저, 마리옹 뒤발 그림, 이하나 옮김 - 그림책 공작소)이다. 그림책은 어린이들만 읽는다는 편견을 깨뜨려 준 책이자, '수박을 모티브로 이런 이야기를 지어낼 수 있다니, 작가의 상상력은 역시 남다르구나'를 깨닫게 해준 책이다. 이외에도 수박수영장 (안녕달 저 - 창비), 쭉 (박주현 저 - 풀빛), 태양왕수바 (이지은 저 - 웅진주니어) 등이 있다.
(수박 관련 책과 그림책에 대한 이야기는 차차 할 예정이다)
나의 예술적 무-능력함으로 덕업일치는 결코 못하겠지만, 그럼에도, 눈에 띄는 수박 아이템을 만날 때면 주머니를 털어서라도 살 수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고는 한다.*
그리고 최근에는 수박을 모티브로 한 그림을 발견하였다.
김물길 작가. **
작가는 국내외를 여행을 하며 매일 보고 느낀 것을 그리는 '아트로드' 프로젝트를 진행한 화가다. 최근에 작가는 프랑스 여행을 하며 니스 해변을 걷다 문득 해변의 곡선이 아침에 먹은 수박과 닮아 있어 Blue Watermelon이라는 제목의 그림을 그렸다.
작가의 작품을 보자마자 작가의 상상력에 감탄했고, 수박의 빨간색과 바다의 파란색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보고 있으면 시원한 수박의 맛과 바닷바람이 동시에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바다의 싱그러움과 수박의 싱그러움이 만나 최고의 조화를 이루고 있는 그림. 거기다 깨알같이 등장하는 수박바닷속 보트와 사람들의 모습은 귀엽고 너무 행복해 보여 보고 있으면 더위도 다 가실 것만 같은 그림이다.
어쩜 이렇게 풍부한 상상력으로 그림을 그려내는지, 그저 감탄하며 보고 또 보고 있다.
조만간 개인전을 연다는 소식을 들어서, Blue Watermelon을 눈으로 직접 볼 수 있기를 기대하는 여름이다. ***
비록 내게 덕업일치할 수 있는 능력은 없지만 수박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아름다운 작품 속 수박을 찾는 것은무엇보다 행복한 일이다. 누군가에게는 이런 나의 취미생활이 하찮아 보이거나 이상해 보일지는 모르겠다. 그럼에도 나는 누구보다 행복한 마음으로 수박을 온전히 느끼며 살 수 있어 신나는 여름을 보내고 있다.
* 물론 주머니를 털어도 못 사는 것이 있다.
뉴욕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주디스 리버 (Judith Leiber)라는 가방 전문 회사에서는 특별하고 강렬한 디자인의 가방을 많이 만드는데 그중에서 크리스털을 박아 만든 클러치 종류는 단연코 최고라고 할 수 있다. 할리우드 스타들이 각종 시상식과 파티 등에서 들고 나오곤 하는데, 여름이면 수박 모양의 가방을 내놓기도 한다. 올봄에 우연히 수박 모양의 클러치를 발견하고 '어머, 이건 사야 해!' 소리가 절로 나왔으나, 가격을 보고 '어머, 이건 못 사는 거구나!' 하며 빠르게 포기했다. 궁금해하실 분들을 위해 아래에 사진을 첨부해 본다.
<올 봄에 처음 이 가방을 봤었는데, 여름이 지나고 이미 다 판매가 되었다. 가격은 한화로 약 550만원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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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물길
www.kimmulgil.com
www.instagram.com/soorow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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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물길작가 10번째 개인전: 온도의 모양
전시기간: 2023년 9월 6일 ~ 10월 4일
장소: 갤러리 MHK (서울시 종로구 팔판길 12, 1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