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영화 그리고 시간예술
요즘 자주 시간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4월엔 평상에 누워 보는 구름처럼 멈춰있던 시간이 왜 5월엔 이토록 빨리 흐르는가. 권태와 불안, 시간이 몰고 오는 상반된 감정에 대해 생각하다가 시간예술을 다룬 두 권의 책을 집어들었다.
<모국어는 차라리 침묵>은 공연예술 비평가 목정원이 파리에 체류한 6년동안 본 여러 공연에 대한 비평을 담은 산문집이다. 세상의 아픔을 피해 공연으로 도망친 시간에 대한 고백록이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픔을 직면하게 만든 여러 연출가에게 바치는 헌사와도 같은 이 책에는 강한 애절함이 묻어있다. 공연예술의 근본에 있는 것이 슬픔이기 때문이리라.
저자에 따르면, 공연예술은 끊임없이 연속되며 결국 사라지고 마는 순간으로 구성되어있다. 연기가 자아내는 뿌옇고 흐린 이미지 사이에는 끊김이 없는 것처럼, 그럼에도 그 모든 것은 공기의 흐름으로 인해 결국 사라지고 마는 것처럼. “틈새와 균열 속에 있던 것들, 거기서 살아있고 반짝였으며 끝내 흘러가버린 것들이 실은 전부”(p.29)라고 저자는 말한다.
이런 소멸의 운명은 공연예술의 윤리와도 맞닿아 있다. 저자에 따르면, 공연은 세상의 아픔을 다뤄야 한다. 공연이 끝난 뒤에도 “세계는 세계의 아픔을 안고 남아”(p.87)있기 때문이다. 공연장은 순환되지 못한 감정의 배출구가 아니라 병든 세상의 환부를 드러내는 곳이 되어야 한다. 그것이 시간에 기대 흘러갈 운명을 지닌 공연예술에 부과된 책무이다.
하지만 모든 시간이 흘러가는가? 세상엔 결코 흐르지 않고 붙들려 있는 시간도 있으며, 그에 착안하여 발전된 것이 바로 영화예술이다.
공연예술과 영화예술은 시간에 관한 한 대척점에 서 있다. 전자가 끊임없이 연속되며 소멸될 시간을 다룬다면, 후자는 단절된 시간을 층층이 쌓아 영영 사라지지 않을 시간의 탑을 쌓기 때문이다. 영화의 이런 속성을 다루는 책이 바로 <시간의 각인>이다.
타르콥스키에 따르면, 영화는 시의 논리를 따르는 시간예술이다. 다른 무엇도 아닌, 시의 형식에 따라 시간을 가공해야 한다고 그는 힘주어 말한다. 단순히 언어를 아름답게 배열하는 게 아니라, 언어를 통해 언어의 문법을 넘어서는 불가능에 도전하는 게 시이다. 이 논리을 영화에 적용하면, 시간의 문법에 도전하는 게 영화의 책무라고 할 수 있겠다.
앞서 언급했듯이, 영화는 본질적으로 단절된 이미지들로 구성되어 있다. 일견 연속되는 것처럼 보이는 흐름을 파고들면 각각 다른 시간에 속해 있는 단절된 이미지가 있다. 여기에 개입되는 것이 바로 ‘시적’ 가능성이다. 언어를 매개로 하지만 언어라는 선형적 사유의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시처럼, 영화도 실재했던 순간을 기반으로 하지만 연속성이라는 시간의 법칙에는 구애받지 않기 때문이다. 타르콥스키는 이러한 논리에 따라 시간으로 빚어낸 시를 여러 편 탄생시켰다.
두 권의 책을 읽으며 공연예술과 영화예술의 운명을 비교해볼 수 있었다. 움켜쥐려 할수록 흩어지고 마는 것들의 운명과 어떠한 암호를 대도 풀려날 수 없는, 봉인된 것들의 운명 중 무엇이 더 슬플까. 분명한 건 둘다 속절없이 흐르지만 고인 채로 영영 멈추기도 하는 인간의 삶을 닮았다는 것이다. 시간예술과 인간은 같은 운명을 공유한다. 예술은 길고 삶은 짧다는 단 한 가지 차이점만을 빼놓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