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_<여성중앙> 2016년 8월호
은희경 작가가 신작 단편집 『중국식 룰렛』을 가지고 돌아왔다. 이건 운과 불운, 행과 불행에 관한 이야기다.
에디터 성영주 Photographed by Seo Wonki
은희경 작가는 등단 21년 차다. 50대 후반의 그녀는 종종 머리를 양 갈래로 묶고 강연장에 나타난다. 물론 강연자로서다. 자주 플레어 미니스커트를 입고 폴짝 뛰어온다. 보통 사람보다 한 옥타브는 높은 낭랑, 명랑, 카랑한 목소리로 “꺄르르” 소녀처럼 웃는다. 문단 사람들 중 은희경을 안 따르는 후배를 찾기 힘들 정도로 교우관계가 깊다. 이 정도면 ‘다정도 병인양’ 싶다.
은희경 작가와는 처음 만났다. 우리는 이날 몇 가지 지점에서 합의를 보았다. 특별한 취향 없이 한국소설을 좋아한다. 비난보다는 긍정하기 위해 소설을 본다. 이 작가는 저래서 좋고, 저 작가는 이래서 좋지, 도무지 막 싫어지지가 않는다. 그리고 술을 좋아한다. 은희경 작가는 아니나 다를까. 인터뷰 전날 과음을 했다고 했다. 그리고 신작 『중국식 룰렛』은 술집에서 시작되는 이야기다.
이날 촬영을 맡은 포토그래퍼는 은희경의 작품을 접한 적이 없다고 했다. 촬영을 기다리며 이번 신작을 훑어보던 와중, 줄 쳐놓은 단 하나의 문장을 보더니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 작가님 굉장히 비관적인 것 같아요.” 책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어차피 생은 절취선처럼 불연속적으로 이어졌다가 약간 위태로운 절단면에 이르러 끊어져버리는 것이니까.”
은희경의 작품은 ‘다정도 병인양’ 하는 작가 개인과는 180도 다르다. 짙은 ‘냉소’와 ‘비관’이 은희경 소설의 뿌리를 이루는 두 가지다. 이번 신작에도 곳곳에 냉소와 비관이 흩뿌려져 있다. “우리 모두가 자기 자신의 가장 오래된 대용품”이라던가, “불운의 총량은 수정될 수 없는 것”, “신도들이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서로 다른 내용의 기도를 할 때 신은 어쩔 수 없이 해피엔딩을 위한 상상력을 쥐어짜야 할 것이다” 같은 문장들. 그런데 어라? 끝이 좀 의미심장하다. “필연적으로 나아가는 도착점. 더 좋아진다는 뜻이겠지?”
은희경이 조금 변했다. “불운의 총량은 수정될 수 없다”는 말에는, 역으로 불운에도 결국 끝이 있다는 뜻을 담고 있다. “단지 조금의 운이 없어서” 엉망이 된 삶이라지만, 반대로 조그만 행운만으로도 충분히 삶을 지탱할 수 있다는 의미일 거다. 그리고 마지막은 대놓고 “더 좋아진다”고 말한다. 작가는 이전에는 찾아볼 수 없던 ‘희망’에 대한 기대를 희미하게 던져놓았다. 은희경은 작품을 엮으면서 “스스로도 조금 변했다고 느꼈다”고 했다.
“제가 애초에 소설을 시작한 출발점은 늘 ‘지금 내가 사는 삶을 의심해보자’는 거였어요. 우리는 뭔가에 휘둘리며 살고 있는 지도 모른다고. 한사코 숙제하듯이 사는 인생 같은 거. 당신은 지금 틀 속에 점점 갇히고 있는 거라고요. 제 마음 속의 문학이라는 것은 이렇게 사람을 각성시키는 거였으니까요. 안이하게 주어진 대로 사는 것에 반기를 들어야 한다는 것. 근데 이제 거기서 ‘조금은 내버려두면서 쉬어 가자’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지난 2년 동안 사회적 이슈들이 많았잖아요. 세월호 이슈도 있고, 메르스, 최근 강남역 사건도 있고. 페미니즘에 대한 얘기도 부쩍 많이 나오고. 갈등 요소도 많아지고요. 이런 것들을 보면서 ‘우리 정말 좀 힘든 것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렇다고 잘못된 걸 덮어버리거나 받아들이자는 건 아니지만, 우리끼리라도 서로 좀 위로하고, 다정하게. 삶이 ‘불연속선’처럼 갑자기, 기상 변화처럼 좋은 일이 있을 수도 있어. 그렇게요.”
이번에 실린 여섯 편의 소설은 우리가 늘 가까이 하는 사물들에서 출발했다. 술, 옷, 신발, 가방, 책과 사진, 그리고 음악. 작가는 이 같이 친근한 사물들에서 나올 수 있는 낯선 이야기를 상상하며 쓴 글들을 엮어냈다. 세 종류의 위스키만 파는 술집에 모인 4명의 사내들은 술을 선택하는 것마저도 운이 없는 서로의 ‘불운’에 대해 토론하고, “때로 자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에 그다지 재능이 없거나 있다 해도 이미 소진되어 한참 뒤처져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힌 남자와 “마치 안전 거리를 유지한 채 도망 다니는 사람 같”은 남자가 꾸역꾸역 사랑하고 또 살아간다. 화자는 대개 남자다. 이들은 대부분 자신이 정해놓은 틀에서 엇나가지 않는, 단조롭고 메뉴얼적인 삶을 산다. 여자 캐릭터들은 종종 분방하고 엇나가고, 튀어 다니며 과감하다. 전자가 회색빛이나 무채색의 삶이라면 후자는 총천연색에 가깝달까. 은희경은 “듣고 보니 그렇다”며 “나도 모르게 전부 구원의 여성을 만들어놨구나” 하며 웃었다.
“제가 쓸 때 가장 신이 났던 게 「불연속선」이라는 소설이에요. 거기 굉장히 뜨거운 여성이 나타나요. 막무가내로 사랑하는 사람을 쫓아가고. 안 되니까 팔목을 그어버리고. 그런 인물을 쓸 때 재미있어요. 뭔가 좀 통쾌하다고 할까요(웃음). 제가 가지 못한 길, 상상하지 못했던 인생이니까요. 그 여성이 자기 심정을 설명하면서 이렇게 얘기해요. ‘난 타협하지 않았고, 합리화하지 않았고, 오직 하나의 선택을 했다’고. 멋있지 않아요(웃음)?”
작가 개인은 그 반대다. 줄곧 모범생으로 열심히 공부해 대학에 갔고, 제때 결혼하고, 때마침 아이들을 낳고 길렀다. 그녀의 표현을 빌리자면 ‘모든 퀘스트를 깨듯이’ 모범적으로 살아왔다. 작가는 “애들이 성인이 되면 모범생인지 모범수인지 알 수 없는 이 삶이 끝날 줄 알았다”고 했지만, 결국 아이들도 모범적으로(?) 자란 결과, 은희경은 지금 손자까지 본 할머니가 됐다. 모든 게 안정된 삶. 이토록 냉소를 가득 품은 작가와 이렇게나 모범적인 ‘가정’의 안주인이라니, 어째 좀 이율배반적이다.
“맞아요. 딜레마가 있죠. 다행히 제가 가족들 설득을 잘 해가지고(웃음). 우선 남편은 기질적으로 굉장히 독립적이에요. 그리고 중요한 건 남편이기 이전에 제 소설을 좋아하는 독자죠. 그래서 기본적으로 소설 쓰기 어렵지 않은 환경이었어요. 근데 아이들은 좀 다른 문제잖아요. 어쨌든 키워야 하는 거니까. 그렇다면 전 애초에 전체를 통제해주든지, 아니면 아예 안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이에요. 아이들한테 선택하게끔 했어요. 불행한 엄마와 같이 있는 것과 지금 곁에 없지만 엄마가 어디선가 행복한 것과 어떤 것이 좋으냐고. 그래도 후자가 나은 거라고 아이들한테 많이 주입시켰죠(웃음). 소설가는 행복해야 글을 잘 써요. 못 쓰면 아프니까. 제가 운이 좋은 것 같아요. 전에는 내가 이렇게 했기 때문에 아이들이 따라와준다고 생각했는데, 제가 그냥 좀 착한 아이들을 만난 것 같아요.”
은희경은 1995년 등단 이래로, 『새의 선물』부터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 『소년을 위로해줘』, 『태연한 인생』 등 장편소설만 7편을, 『타인에게 말 걸기』, 『행복한 사람은 시계를 보지 않는다』,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 『다른 모든 눈송이와 아주 비슷하게 생긴 단 하나의 눈송이』 등 단편집만 6편, 총 13편을 쉬지 않고 발표했다. 장편과 단편, 두 가지를 이렇게 부지런히 오가는 작가도 드물다.
“단편은 짧은 통찰을 가지고 새로운 시도를 하는 면이 있죠. 실험적이기도 하고. 장편은 이야기가 중요하니까 흐름 속에서 스케일도 있어야 하고. 제가 가끔 하는 비유가 있어요. 단편은 정물화 같죠. 사과 하나, 꽃병 하나 뻔할 것 같지만 그린 사람의 개성이 굉장히 강하게 드러나잖아요. 화가마다 전혀 다른 그림이죠. 장편은 풍속화 같죠. 사람도 많이 나오고 풍경도 들어가고 이야기가 읽히는. 단편을 계속 쓰다 보면 장편이 쓰고 싶어요. 이렇게 끝나는 게 아니라 조금 더 이야기를 몰아붙여서 주인공이 어떻게 돼서 결국 어떻게 변하는지 만들어보고 싶죠. 또 장편을 마치고 나면 내가 짧게 짧게 느끼는 통찰들을 그 때 그 때 하나씩 만들어보고 싶다고 느껴요. 이게 균형을 유지하면서 작업을 하게 되는 것 같아요.”
13편을 써내려 간 동안 은희경은 숱하게 도마 위에 올랐다. 첫 소설이 극찬을 받았고, 그 후로 계속되는 오르막내리막 평단의 평가와 예측할 수 없는 독자의 반응과 그에 대한 작가의 심지가 싸우는 시간이었을 거다. 정말 안 써질 때는 1년 동안 한 줄도 못 쓸 때도 있었다. 그것도 종종. 그에 대해 작가는 이번 책의 말미, ‘작가의 말’에 이렇게 썼다.
“아침에 일어나 맨 먼저 하는 일은 커튼을 여는 것이다. 친구를 만나 맨 먼저 하는 건 웃음을 짓는 일이다. 책상에 앉아 가장 먼저 하는 일은 도망치고 싶어하는 것, 그래서 재주 없고 심약한 나를 설득하는 일이다. 지금까지 해왔으니 앞으로도 할 수 있다는 말은 통하지 않는다. 내가 소심한 사람답게 빈틈없는 비관주의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행운을 바라기에는 지은 죄가 좀 많고. 속수무책인 나를 여러 차례 깜짝 방문해주었던 영감을 다시 청하기에는 내가 또 기회균등을 믿는 순진한 사람 아니던가. 이렇게 쓰지 못할 이유에 대해 공상을 계속하다가 문득 깜짝 놀라는 순간이 있다. 뒤통수 쪽에서 ‘그렇다면 쓰지 않아도 됩니다’라는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이다. 그러면 나는 조명이 꺼져버린 무대에 혼자 남겨진 사람처럼 막막하고 슬퍼진다. 그래서 시무룩한 표정으로, 막막하고 슬픈 이야기를 상상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작가는 쓴다. 또 쓴다.
“글쎄요. 그것도 일종의 욕망이겠죠. 숙명 같은 건 절대 아니고요. 소설가가 타고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근데 이야기를 만들면서 자기 질문을 어떤 식으로든 대면해봤던 경험들이 나에게 또 삶의 질문을 하게 하는 것 같아요. ‘어서 이걸 이야기로 만들고 싶다.’ 어차피 자기 인생에서 갖게 되는 질문을 탐구해보는 게 소설이라고 생각해요. 그런 게 해결이 안 되고 못 쓰고 있으면, 정말 변비 환자처럼 모든 게 불편하고, 뭔가 지금 사는 것도 다 임시로 살고 있는 기분이 드니까요.”
은희경은 시간을 기억할 때 “내가 그 때 무슨 소설을 쓰고 있을 때…”라고 설명한다. 소설가로서의 삶이 시작된 지난 20년의 시간은 모조리 다 그렇다. 늘 쓰고 있었고, 안 쓰고 있을 때는 쓰기를 고민하고 있었고, 그래서 지난 시간들은 뭉텅이 뭉텅이로 그녀의 소설과 늘 함께 간다. 작품이 작가 개인이 완전히 배제된 채 존재할 수 없는 이유다. 그게 작가 개인의 이야기이든, 완전히 창조해낸 이야기이든 상관 없이.
“작가의 개인은 당연히 다 작품에 반영이 될 수밖에 없죠. 다만 반영되는 방식이 작가마다 다른 거겠죠. 저 같이 ‘난 너무 감상적인 사람이니까 소설에는 감상적이면 안 돼!’ 하는 것도 반영이 된 거잖아요. 나를 팍 잡아당기고 있는 거니까. 제 작품이 제 개인의 다정다감한 쪽으로 갈까 봐. 어떤 사람은 그냥 자기 경험을 그대로 쓰기도 하고요. 그건 작품에 그 작가가 살아온 삶이 있다는 거예요. 전 책을 딱 묶으면, 그 몇 년 동안의 내 삶이 여기에 들어있는 거죠. 내가 무엇으로 질문하고 무엇으로 고민하고 뭐 때문에 행복하고 슬펐는지. 여기 다 들어있구나.”
은희경은 소설가가 된 자체가 운이 좋았다고 말한다. 대부분의 시간에서 ‘가족 속의 나’에 앞서, ‘작가로서의 나’의 인생이 가장 중요하다고 여긴다. 그리고 어느 수상 소감에서 말했듯, 은희경은 작가가 되고 나서는 복권도 안 산다. 모든 행운을 ‘사람 은희경’ 말고 ‘작가 은희경’에게 다 쏟아주기를 바라면서.
“제가 이번 책 첫 번째 소설에 이런 말을 했어요. 우린 지금 되게 운이 없거나 뭐가 엄청나게 없어서 안 되는 거라고 생각하는데 그게 아니라, 조금의 불운이나 조금의 행운만 필요한 건지도 모른다고. 우리 사회는 유독 ‘이 정도는 돼야지’ 하는 기준치가 너무 높은 것 같아요. 그래서 ‘그냥 나인 채로도 괜찮아’ 그런 생각을 좀 자주 했으면 좋겠어요. 조금은 ‘내가 어때서’ 하는 정도는 괜찮을 것 같아요. 아니, 얼마든지 그러면 좋을 것 같아요. 안 그래도 어차피 각성하게 돼 있으니까. 어차피 부딪치게 돼 있으니까. 혼자서라도 기고만장하면서.”
다정다감한 은희경 개인에게도 작품 속 냉소적인 은희경에게도 영원한 화두이자 관심사는 결국 ‘타인’이다. 타인일 수밖에 없는 타인에 대한 끊임없는 호기심과 두려움은 그녀의 삶과 작품을 밀고 나가는 동력이다. 그토록 두려워 하는 타인을 또 사랑할 수밖에 없는 사람, 그리고 작가. 운과 불운 사이, 행과 불행 사이, 냉소와 희망 사이. 은희경이 서있다. 그녀가 문득 희망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이 책을 보면서 사랑이 하고 싶어졌다고 전했다. 작가는 “제일 좋은 독후감이네”라며 또 소녀 같이 폴짝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