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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고스 Mar 17. 2023

조지 오웰의『1984』와 자유라는 가치

개인이 있기에 국가가 있는가, 국가가 있기에 개인이 있는가?

개인은 무얼 위해 존재하며, 국가는 무얼 위해 존재하는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는 무엇인가?


조지 오웰의 명작 『1984』는 많은 질문을 던져준다. 또한 울림을 준다. 허구의 세계이긴 하지만, 어쩌면 작가는 이 세계가 절대 현실화되지 않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 책을 써내려 갔을지도 모른다.




통제가 당연한 세상

이곳은 오세아니아 국가. 실제 오세아니아 대륙이 아니라 작품 속 초거대 세 개의 국가 중 하나이다. 주인공 윈스턴 스미스가 사는 런던은 영국 사회주의를 표방하며 극단적 전체주의가 만연한 곳이다. 당원들의 일상은 텔레스크린 장치를 통해 감시받는다. CCTV, 도청기, 위치추적기의 기능을 한데 합쳐 놓은 듯한 이 장치는 집집마다, 다니는 곳곳마다 없는 곳이 없다. 에이.. 숨 쉴 틈은 있겠지. 천만에. 누구도 예외 없이 24시간 풀가동 감시당하는 꿈도 희망도 없는 메타다. 모든 건 빅브라더 아래 그 어떤 반역도 꾀할 수 없도록 하기 위함이다. 당의 이념과 사상에 의문을 품을 수도 없다. 현실에 불만을 품을 수도 없다. 빅브라더의 통치 아래, 오직 일방적으로 전해주는 뉴스를 통해서만 오늘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를 이해해야 한다. 그저 시키는 대로만 해야 한다. 그 어떤 것도 용납되지 않는다. 아주 약간의 사상범죄 기미라도 보이는 순간 체포되어 고문과 자백을 거쳐 총살의 결말을 조우하는 것은 거부할 수 없는 운명이다. 사람들의 인생은 사실상 태어날 때부터 정해져 있다. 배울 것을 선택할 자유가 없다. 어항 속의 물고기가 주인이 던져주는 밥만 먹을 수 있듯, 당이 원하지 않고 의도하지 않는 것은 그 어떤 것도 할 수가 없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사람은 자아를 가진 동물이다. 이 자아가 언제 깨어날지 모른다. 당은 이것을 극도로 경계한다. 혹시나 이 무지몽매한 사람들의 의식이 깨어나진 않을까 하여 모든 가능성을 차단해 버린다. 구어(舊語)를 재편하여 신어(新語)를 창조한다. 구사할 수 있는 단어의 개수가 줄수록 생각의 지속시간과 폭이 줄어든다. cold(추운)는 있지만 warm(따뜻한)은 없다. 대신 cold를 이용하여 uncold(춥지 않은)이라 한다. 구어가 잊히게 되면 당의 원칙에 어긋나는 이단적 사상을 가질 수 없게 된다. 표현 수단을 최소화하여 의식적인 사고마저 최소화시킨다.


의심과 역모의 싹을 자르기 위해서는 아이들의 뇌가 무르익기 전에 헤집고 들어가야 한다. 자라나는 아이들을 작은 괴물로 만들기 위한 체계적인 교육을 한다. 아니, 주입이라고 하는 것이 맞겠다. 아이들은 당의 가르침에 반발하지 않는다. 빅브라더 숭배와 구호 제창, 반역자 처단 같은 기괴하고 숨 막히는 행위가 이 아이들에게는 그저 놀이 문화일 뿐이다. 자기 부모의 사상이 의심되면 사상경찰에 밀고하여 넘긴다. 이러한 아이들은 ‘어린이 영웅’이라 불린다. 아이들을 열광케 하기에 딱 좋은 칭호가 아닌가.


사상 주입에 있어 감정과 본능은 큰 걸림돌이 된다. 감정과 욕구가 이성을 이기는 일이 생겨서는 안 된다. 싹을 잘라야 한다. 사랑은 빅브라더를 향한 사랑 외에는 존재할 수 없다. 남녀의 결혼과 출산은 오직 당에 충성할 후손을 생산하는 기계적인 작업이어야만 한다. 남녀 간의 끌림이나 사랑이 확인되는 순간 그 만남은 허락되지 않는다. 개인의 사사로운 감정 또한 가질 수 없다. 품을 수 있는 감정은 정해져 있다. 웃음은 오직 승전보를 접할 때의 적국을 향한 비웃음뿐이다. 분노는 당에 대항하는 이단자를 향한 분노뿐이다. 당에서 규정짓는 감정 외에 다른 감정을 드러내는 부적절한 표정을 짓는 것만으로 표정 범죄자가 될 수 있다. 그러나 풀지 못해 쌓이는 감정은 언젠가 폭발하기 마련이다. 이를 위해 준비한 것이 ‘2분 증오시간’이다. 사상 이단자의 모습이 텔레스크린에 나올 때, 당원들은 알고 있는 모든 욕설과 격렬한 행위 예술을 동반하며 증오를 포효한다. 감정을 표출한 만큼 자기의 사상에 대한 믿음은 더욱 굳세어진다. 2분 만에 한층 더 조종하기 쉬운 로봇이 되었다.


과거에 대한 기록은 확인할 수 없다. 당에 치부가 되는 것들, 예측이 빗나가고 실수와 실패로 얼룩진 역사는 다 말소되어 없다.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도리가 없다. 세 개의 국가는 서로 전쟁과 휴전을 반복한다. 전쟁이 종식되지 않는 한, 사람들은 과거에 관심 둘 여유 따윈 없다. 현실을 살아내기에 급급할 수밖에 없다. 살아남아야 하니까. 과거의 기억이 남아 있는 자들도 잊게끔 만든다. 물론 저 어딘가 진실은 있다. 현재 1984년은 그 몇십 년 전에 비해 생활 수준도 뒷걸음질 쳤으며, 전쟁분야를 제외하면 과학기술 또한 퇴보했다. 전쟁 국면도 끝낼 생각이 없다. 전쟁은 사람들을 당에 의존하게 하고 결속시키기 위한 수단이니까. 이 모든 것은 의도적인 하향평준화 작업의 산물이다. 사람들이 먹고살기 빠듯해지라고. 정서적 여유가 없어지면 사상 범죄는 사치가 되어버리니까. 이 음모를 사람들은 알 턱이 없다. 물론 당에서도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알릴 턱이 없다. 되려 빅브라더가 없으면 모든 일상이 무너져 내릴 것이라는 공포감을 심긴다. 잘 산다. 잘살고 있다. 살기 좋아지고 있다.


이제 조건들이 갖추어졌다. 언어를 통제했고, 교육을 통제했고, 감정과 본능과 사고를 통제했고, 역사와 기억을 통제했다. 이제는 일관된 사상을 끊임없이 주입하면 된다. 빅브라더와 당이 있어야만 일상적인 생활을 유지할 수 있고, 평화와 부국강병을 누릴 수 있으며, 개인의 존재 의미가 생긴다는 것이 그 요지다. 당의 슬로건에 잘 드러나는데, “전쟁은 곧 평화고, 자유는 노예를 만들어내며, 무지는 힘이 된다”가 그러하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문제가 없지만, 애석하게도 그렇지 않다. 그저 권력을 위한 권력을 목적으로 자행하는 정당화로서 무한 겹겹 포장하였을 뿐이다. 당원들은 ‘이중사고(doublethink)’를 해야만 한다. 이중사고란 모순을 인지했을지라도 동시에 상반된 생각을 하여 모순 또한 옳다고 받아들이는, 부당함을 인지하는 동시에 정당하다는 결론을 내는 식의 생각 훈련을 통해 이루어지는 당의 사고통제술이다. 개인의 머릿속에 떠다니는 생각은 실재하지 않는다 한다. 왜곡된 허상이다. 진실은 오직 당의 머릿속에서만 나온다. 하여 당이 알려주는 것만이 진실이 되고 개인이 품는 모든 생각은 불완전하니 좇아서는 안 된다. 개인은 무언가에 대한 비판을 곧 자신에 대한 비판으로 돌리게 된다. 무언가에 대한 비판은 곧 수긍으로 바뀐다. 철저히 교육받은 훈련을 통해서 말이다.




비교 대상이 있음에 감사함

모든 것이 통제당하는 삶을 보고 감사하게 느끼는 것이 있다. 무언가에 대해 비교 대상이 있다는 것을 인지할 수 있음과, 직접 확인하여 비교할 수 있음이 그러하다. 우리가 어떤 주제에 대해 궁금하여 알고자 하면 알아볼 수 있는 통로가 많다. 친한 사람과 의견을 교환할 수도, 전문가에게 문의할 수도, 익명의 누군가의 의견을 얻을 수도 있다. 찬반이 갈릴 법한 주제에는 양측의 정보를 충분히 얻을 수 있다. 언론사 또한 정치적 성향에 따라 선택하여 읽을 수도, 비교하며 읽을 수 있다. 나에게 불안한 것은 무지가 아니다. 알아갈 것이 있음에 오히려 설렌다. 두렵고 불안한 것은, 알고 있음에도 알고 있는 것이 맞는지 확인할 방도가 없는 경우다. ‘1984’의 지배층은 당의 합리성이나 실적, 선악을 분간할 수 없도록 그 어떤 비교 대상에 대한 정보도 제공하지 않고 말살하고 있다. 다른 나라는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모르니 자기 생활이 나은지 어려운지도 모른다. 그저 당에서 좋다고 하니 좋은 게 좋은 게 되어 버리는 형편이다. 우리는 때때로 나와 ‘다른 것’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하고 거부감을 가지곤 한다. 서로 편을 갈라 박 터지게 싸우기도 한다. 하지만 나 외에도 ‘상대’가 있다는 그 자체의 사실이 얼마나 다행인지. 인정하든 하지 않든, 나와 다른 관점의 의견과 정보를 얻을 자유가 주어져 있다는 건 당연하고도 감사한 일이다.




자유라는 가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북한의 국호다. “아니 잠깐.. 북한이 민주주의였어? 왜 북한 명칭에 민주주의가 들어가지?”라고 생각이 들 수 있다. 북한은 사회주의 국가가 맞다. 인민민주주의라는 껍데기를 쓰고 있을 뿐. 반면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를 따른다. 차이점은 ‘자유’라는 가치다. 자유가 얼마나 중요하냐,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북한이 될 수도 대한민국이 될 수도 있다.

때때로 우리는 자유라는 가치에 대해 무감각하게 느낀다. 무감각이니까 느낀다고 할 수도 없겠다. 너무나 당연하게 누리고 있기 때문에. 이때 자유에는 어느 정도 선이 있기는 하다. 그 어떤 제한도 없는 곳은 사람 사는 사회가 아니라 야생 세렝게티라고 불러야 한다. 막말로 사람을 죽일 자유가 있어서는 안 되지 않은가. 자유에 대한 최소한의 제약을 거는 것을 두고 우리는 ‘법과 질서’로 약속하고 합의했다. 질서는 자발적 배려심과 책임감에서 나오는 부분이 크며, 법은 도덕적 타락을 방지하고 사회적 균형을 유지하기 위한 트램펄린이다. ‘1984’에서 자유를 제약하는 방식은 법과 질서인가? 전혀 그렇지 않다. 작품 속에서는 모든 수단을 총동원하여 합법적 자유를 최소화시키고 있다. 우리는 이 점을 생각해야 한다. 우리가 침해받고 제한받는 자유가 과연 마땅히 제한받을만한 것인지를 생각해야 한다.

지금은 해제되었지만 몇 년간 우리를 옥죄었던 코로나19 방역 정책을 생각해 보자. 사적모임 인원제한, 영업시간제한, 방문 시 QR코드 체크 등은 의도와 목적을 떠나 본질적으로는 자유를 침해하는 행위가 맞다. 단지 그 목적이 국가적 위기 극복이기에 받아들이는 것뿐이다. 하지만 목적이 옳다고 방식도 최선인 것은 아니다. 바이러스 감염 확산을 막기 위해서 여러 선택지가 있을 수 있으나, 자유라는 관점에서 정책을 평가한다면 그리 좋은 점수를 주기 어렵다. 심지어 자유의 침해에 대해 불평불만 없이 순종적으로 따르는 사람들도 있다. 우리 모두와 국가를 위해 마땅히 나라는 개인을 희생하고 불편을 감수하는 것이 맞지 않냐며. 사람은 착한 듯하지만 생각은 굉장히 위험하다. 한두 번 용인되어 사례가 생기면 이후에 서너 번 하는 것은 일도 아니다. 우리는 서로 배려하고 협동하고 때로는 희생하면서도 자유라는 천부 인권의 가치도 절대 잊어서는 안 된다. 비판하고 맞설 수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렇지 않으면 나에게 당연했던 일상이 누군가에게 하나둘씩 빼앗길 수도 있다. 『1984』의 사람들이 점점 그렇게 되었을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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