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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성옥 Mar 28. 2024

가식 없이 살기로 했다

주중에는 교수, 주말에는 하우스키퍼

불합리한 일은 거절하고 불편한 말은 지적할 용기가 생겼다. 호텔에서 일하면서 배웠다. 그래도 된다는 것을. 동료 교수들에게 예의상 하지 못했던 말과 거절하지 못했던 행동은 "나는 그렇게 대해도 되는 사람이에요"라며 허용을 해주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한 허용이 나를 무대 위의 꼭두각시도 만들었다. 가식적으로라도 웃으면서 맡은 역을 연기를 하듯이 말이다.

그래서 가식 없이 살기로 했다.


무대

나만 외국인이라고 스스로 위축되거나 기죽은 적은 없었다. 지도교수님 말씀대로 늘 당찬 한국인 교수이다. 내 마음이야 무겁지만 그 마음을 들키면 프로답지 않기에 그냥 종일 무대 위에서 연극하다 집에 오는 게 주중 일상이다.


백인 대학

이곳을 떠난 두 유색인종 교수들도 지친 마음을 드러낸 적은 없었다. 떠날 때가 돼서야 사석에서 그동안의 마음고생을 시원하게 털어놓았다. 백인 대학에서 잘 버텨 종신교수 되라는 응원 아닌 응원을 하며 짐을 쌌다. 사실 나도 같이 짐을 싸고 싶었다. 그들이 떠나고 난 후 텅 빈 연구실, 다시 혼자가 된 이방인, 나만 남겨진 것 같은 이상한 외로움이 몰려오던 날이었다.

 

지도교수

박사과정을 마치고 애리조나로 이삿짐을 보낸 후 지도교수님과 식사를 했다.

 

"다른 학생들을 졸업시킬 때는 베이비를 세상에 내보내는 듯 걱정도 되고 불안하기도 해. 레이나 너는 하나도 걱정되지 않아. 어딜 가나 너무 잘할 거야. 너는 내가 봐온 유학생들 중에서 가장 자신감이 넘치고, 영어도 잘하고, 미국 문화에 쉽게 적응했던 학생이란다. 어디를 가도 나를 빛나게 해 줄 제자야. 난 네가 무척 자랑스러워."

 

지도교수님의 덕담 대로 한동안 나의 성과는 교수님을 빛나게 했다. 내가 성장하면 할수록 교수님이 더 우쭐해하셨다. 학회에서 만나면 제자 자랑에 침이 마를 날이 없으셨다.

 

일리노이, 뉴욕, 애리조나를 거쳐 미네소타로 이사 왔다. 동부, 서부, 중부에서 다 살아봤다.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던 모습이 미네소타로 이사 오면서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몇 해 전 지도교수님 부부가 나를 방문하고는 심히 걱정을 했다.

 

나와 백인들 = 1:다수

 

인종차별

특별히 심한 인종차별을 경험해서 그런 건 아니다. 대놓고 인종차별을 하지는 않는다. 당시에는 몰랐는데 다시 생각해 보면 기분이 더러울 때가 있다. 그들은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잠재되어 있는 선입견이나 가치관이 말과 행동으로 역력히 드러난다.


문제는 그들은 본인들의 무지함 조차도 모른다는 것이다. 이런 일이 반복이 되다 보면 인종차별이 아닌 일도 인종차별이 아닌지 의심하는 시점이 온다. 조금이라도 의심이 되면 물어본다. 내가 백인이었어도 이 교수가 나한테 이렇게 말하고 이렇게 행동했을까? 대답이 "노" 라면 인종차별인 게다.

 

가식

전방에서 총 들고 보초설 때 긴장을 놓을 수가 없듯이, 지난 학기 나의 일상은 "건드리기만 해 봐라" 식으로 늘 긴장상태였다. 업무상 필요한 일 외에는 쓸데없이 부딪히지 않으려 했다. 보초서기 업무를 회피하는 게 아니라 지뢰를 잘 피해 다니는 것이다.


수업은 하던 대로 최선을 다하고, 주임교수로서 미팅도 별 무리 없이 진행하고, 내가 해야 할 일들은 다 한다. 다만 쓸데없이 친한 척하거나, 남이 할 일까지 도맡아서 하는 열정은 쏟지 않기로 했다. 맘에도 없는 말을 하거나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을 나서서 하는 것은 가식이나 다름없다.


프로페셔널하게 일하되 내 감정에 충실하고 내 마음을 먼저 위로해야지 교수생활도 건강하게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가식 없이 살기로 했다.


주중에는 교수로 주말에는 하우스키퍼로.



    * 이 글은 <나에게 솔직해질 용기>에 담긴 에세이의 일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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