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도 더 된 이야기)
남편이 처음으로 취직된 곳은 뉴질랜드에서도 북쪽 땅끝마을에 있는 마지막 작은 도시의 유일한 병원이었어. 어렵게 어렵게 영어 점수를 시간 맞춰 만들고 외국인 간호사의 뉴질랜드 면허 등록을 위해서 남편은 정말 많이 노력하며 그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간호사 등록에 성공했지. 그런데 일 년 유학 후 일 년 워크비자받는 조건이었는데 간호사 등록 후 우리에게 남은 시간은 육 개월 남짓. 그 짧은 시간 동안 남편은 간호사로 풀타임 잡을 찾아 취직을 해서 영주권을 신청해야 했어. 남편이 이민 온다고 한국서 간호사 공부를 느지막이 했어서 한국 경력은 나랑 만난 그 투석실에서 이년 조금 안되게 일한 경력 그게 전부였지.
영어 점수만 나오면 간호사 등록만 되면 모든 게 해결될 줄 알았던 우리에게 또 다른 큰 벽이 있었던 거야. 이제 막 간호사 면허를 딴 외국인 간호사에게 모자라던 간호사들이 후한 이민 정책으로 이미 꽤 많이 채워졌던 상태에 남편이 일을 찾으려고 하니 그 많은 쟁쟁한 다른 간호사들의 이력에 밀릴 수밖에 없는 거잖아. 처음엔 영주권을 위해서 안정적으로 널싱홈에서 뽑아준다면 가겠다며 여기저기 동네 근처 널싱홈들을 이력서를 들고 가서 어플라이를 하고 거기에 뽑든 안 뽑든 무작정 찾아가서 넣어보고 집에서 몇 시간 거리에 있던 다른 도시 구석 후미진 널싱홈까지 다 찾아가서 이력서 주고 오기를 몇 주. 잊을만하면 편지가 와있어. We regret… 어쩌고 하는 넌 안 뽑혔다는 그 편지. 어떤 널싱홈은 인터넷으로 넣는 것도 있었는데 새벽 세시에 심난해서 남편이 원서를 집어넣으면 안 되었다는 이메일 답장이 삼십 분도 안되어서 다시 날아와.
그리곤 깨달았지. 쉬워 보이는 널싱홈도 병동 경력도 널싱홈 경력도 없는 남편에게는 큰 벽이었다는 걸. 아마 자동으로 거르는 시스템에서 다 걸러졌던 것 같아. 그러다가 투석실 자리 어플라이 했던 곳 두 곳에서 인터뷰 보러 오라는 메일을 받은 거야. 하나는 혹스베이에 하나는 카이타이아. 북섬의 끝, 뉴질랜드 악명 높은 원주민 갱스터들만 산다는 험한 곳이라고 알려진 곳. 남편은 이 나라는 일단 인터뷰 보자고 하면 거의 된 거라며 어디 살고 싶은지 고르래. 나는 그런 거야? 그럼 혹스베이지! 그래서 혹스베이에 인터뷰를 보러 먼저 갔어. 온 가족이 놀러 가는 느낌으로 동네도 구경하고 혹스베이 가는 길에 과수원들과 조용하고 동네도 많이 크지 않지만 그냥 좀 맘에 들더라고 누가 뽑아 주지도 않았는데 김치국물을 들이키며 우리 남편이 여기서 일하면 나는 여기 있는 학교에서 영어를 공부하고 시험도 보고 하면 되겠네~~ 하면서 말이야. 남편이 인터뷰 보러 들어가 있는 동안 난 우리 딸과 차 안에서 푸른 하늘 은하수~~ 손뼉 치고 놀면서 걱정도 되지만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렸어. 남편이 인터뷰 다 보고 나오는데 기분이 좋아 보이더라고. 그래서 아 그래도 가능성이 있겠네? 생각했지. 집에 가는 길 내내 동네도 구경하고 여기 집은 어디에 렌트하는 게 좋은지 나중에 매니저한테 물어봐봐. 하면서 김칫국물을 사발로 마시면서 기분 째지면서 집으로 돌아왔지.
아. 혹스베이 된 거 같은데 카이타이아 면접은 어쩌냐. 거기 차로 가면 한참 올라가야 돼! 엄청 멀어. 하고 남편이 그냥 전화로 인터뷰 본다고 할까? 그러는 거야. 일단 생각해 보자고 하고 그다음 날. 바로 혹스베이 매니저에게 전화가 왔어. 빈말인지 진심인지 모르겠지만 너무 정중하게 진짜 네가 맘에 들었는데 다른 경력 많은 사람이 인터뷰를 같이 봐서 다른 매니저가 마음에 들어 해서 어쩔 수가 없다며 다음번 기회에 같이 일하자고 하는 거지. 옆에서 다 듣고 있던 나는 속으로 아니 결국 안 뽑겠다는 거잖어 뭘 저렇게 포장을 잘해. 착한 사람 코스프레야 뭐야. 내가 더 씩씩 거리며 열받아했어. 그리고 남편에게 말했지. 남편. 내가 보기에 카이타이아에 우리가 안 가면 우린 여기서 짐 싸고 한국 가야 돼. 비자도 끝나가고. 어차피 마지막인데 거기 가려면 북섬을 가로질러야 된다며. 가다가 힘들면 어디 홀리데이 파크 같은 데서 자고 여행할 겸 가보자. 그랬더니 남편이 알았데.
그래서 면접으로 잡힌 날 전날 우리는 잔뜩 만만의 준비를 하고 먹을 거 이불 등등 다 싸서 $1700불 주고 샀던 1997년식 수동 도요타 서니를 타고 새벽같이 길을 떠났어. 북섬 거의 끝에서 끝으로 가면서 유명한 타우포도 들러서 폭포도 구경하고 타우랑가도 잠깐 들르고 해밀턴도 들르고. 우린 돈도 없으니까 어디서 머물진 못하고 갈 때 서둘러 최대한 많이 올라가야 했어. 하루 만에 황가레이까지 와서 두어 시간 남은 목적지를 남겨두고 너무 피곤하기도 하고 밤이 깊어 황가레이 톱텐 홀리데이 파크에 있는 작은 케빈 하나를 빌려 잠을 잤지. 그다음 날 면접이 아침에 있었기에 남편 컨디션 조절하라고 새벽에 일어나 잠도 덜 깬 우리 딸을 카시트에 태우고 초행길인 데다가 꼬불꼬불하고 새벽이라 안개가 자욱하게 껴서 시야가 전혀 확보가 안 되는 상태로 시골 산길을 운전하기 시작했지. 남편 피곤할까 봐 자라고 하고 난 괜찮은 척 그 꾸진 수동 자동차를 몰고 그 고개를 지나려니 아주 무서워 죽겠는 거야. 이거 이래서 사람들이 살 곳이 못된 건가 이러다 다 같이 죽는 거 아냐 하면서 등줄기에 땀을 쪽 빼면서 겨우 카이타이아에 도착했어.
도착하니 도시가 진짜 작긴 한데 아주 생각보다 나쁘진 않더라고 병원 건물도 괜찮고 도서관도 괜찮고. 남편 인터뷰를 보내놓고 우린 도서관 건물에서 책도 보고 이것저것 구경하면서 시간을 보냈어. 그렇게 남편을 보내놓고 든 생각은. 이만하면 많이 노력했네. 근데도 안 되는 거면 더는 부담을 주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어. 어떻게든 한국에서도 잘 살아볼 방법이 있을 거라고. 해탈한 거지. 그런데 남편이 카이타이아에 바로 취직을 하게 되고 우린 한 달 후 이사가게 되었지. 그리고 한 참 후에 카이타이아 매니저에게 남편이 물어봤데. 왜 날 뽑았느냐고. 그랬더니 그 외진 시골까지 가족 데리고 인터뷰 온 사람은 처음이었다고. 그 간절함을 보았고 너를 꼭 뽑아야겠다 생각했다고. 카이타이아는 작은 분점 정도이라 가기 전에 트레이닝은 황가레이 큰 병원에서 받고 가게 되어 있었어. 그 한 달여 기간 동안 우리 가족 전부 살 수 있는 방 세 개 딸린 집을 무료로 대여해 주도록 힘써 주었고 이사비용도 받았지.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정도로 혜택을 주는 건 흔한 일은 아녔더라고. 그 매니저가 진짜 잘 말해준 거였지.
누군가의 간절함이 알맞은 상대방의 가슴을 울려 그 진심이 전달이 되면 진실한 누군가는 알아주고 도와주는 거 같아. 그렇게 우리 남편의 첫 직장이 생겼고 우린 그 계약서를 가지고 그 당시 부족직업군이던 간호사로 취업한 것으로 영주권을 신청할 수 있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