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 위에서 바라본 우리들 세상
내가 보기에 분명 형의 자리는 언제나 이곳,
우리들 세상에 있었다.
<나무 위의 남작> 이탈로 칼비노
� 이탈로 칼비노가 이상적인 인간이라고 꼽은 지식인이자 자연인 코지모.
� 인간사를 내려다 보듯 지켜보기도, 관여하기도 하며, 역사적으로 유명한 인물들과 교류하기까지 한다. 우리 눈을 멀게 하는 것은 너무 가까이에서 보고 있기 때문이기에 거리를 두고 나무 위에서 세상을 ‘보여’ 주는 우화같은 환상 동화
� 이탈로 칼비노의 작품들은 철학적 접근이면서도 현대에 구현한 그래픽이나 영상, 프로그래밍 언어의 느낌이 있다. 글이지만 결코 텍스트에 머물지 않는다.
� 독서See너지
� 도서 & 영화 : 포레스트 검프, 로빈슨 크루소, 창문 너머 도망친 100세 노인, 마르케스의 서재에서
� 하룬 파로키 (미디어 아티스트 및 전시)
� 요리 : 달팽이 요리,
�음악
숲의 목소리_마크툽
숲의 아이(Bon Voyage)_유아 YooA
달팽이_김재환
보르헤스, 마르케스와 함께 현대 문학의 3대 거장으로 꼽히는 이탈로 칼비노. 리뷰를 쓸려고 보니 그의 탄생 100주년 특별판으로 책표지를 갈아 입었다. <나무 위의 남작>은 그의 대표작이면서 다른 작품에 비해 가독성도 좋다. 대중성과 문학성을 겸비했다.
'코지모 피오바스코 디 론도 - 나무 위에서 살았고 - 땅을 사랑했으며 - 하늘로 올라갔노라.'
<나무 위의 남작> 이탈로 칼비노
<나무 위의 남작>은 간단히 말하면, 코지모가 나무 위에 올라가서 땅 위 인간을 지켜보며 살아가다 죽었다는 이야기. 때론 땅 위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나무 위에서 해결하기도 하고, 마치 먼 발치서 인간사를 내려다 보듯 지켜보기도, 관여하기도 하며, 역사적으로 유명한 인물들과 교류하기까지. 그렇게 결국 나무 위에서 평생을 살다 가는 코지모.
표면적인 원인은 달팽이 요리지만, 아버지로 상징되는 권위와 귀족 사회상에 저항이기도 하다. 처음엔 무인도 대신 나무 위의 로빈슨 크루소가 아닌가 했다. 물론 비슷한 점도 많다. 코지모 역시 점점 자연의 일부로 변해가며 야성을 지니게 되지만, 그는 그 곳에서 독서도 하고, 교육도 받으며, 연구에 몰두하는가 하면, 자연 속에서 지혜도 함께 터득해 나간다. 지식인이자 자연인의 모습이다. 이탈로 칼비노가 이상적 인간상이라고 꼽았다고 하는데, 어쩌면 이런 면 때문이 아니었을까 짐작해 본다.
인간의 삶과는 너무나 먼 이런 형식들과 형이 너무나 깊숙이 파고들었던 야생의 경계들은 형의 정신의 원형을 형성하였고 이로 인해 인간의 외형을 상실하게 되었다. 하지만 형에게는 많은 재능이 있었기 때문에 나무와 함께 생활할 수 있었고 짐승과 싸울 수 있었다. 내가 보기에 분명 형의 자리는 언제나 이곳, 우리들 세상에 있었다.
<나무 위의 남작> 이탈로 칼비노
시대상을 꿰뚫어보면 그의 행동 하나 하나, 생각의 고리가 시사하는 바가 더 많겠지만, 화자인 코지모 동생의 관점에서 전개되는 이야기의 흐름 자체도 매우 흥미롭다. 자기 자신에 대한 주관적인 견해가 아닌 객관화할 수 있는 인물을 내세워 서술하는 방식이 <위대한 개츠비>에서처럼, 오히려 몰입도가 좋았다는 생각이 든다. 내 얘기를 1인칭 시점의 '나' 혹은 전지적 작가 시점이었다면 이 소설의 줌인아웃이 자유롭지 못하지 않았을까 싶다.
이탈로 칼비노가 그린 정확한 미궁의 지도 『나무 위의 남작』
혼돈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실마리가 되어줄 소설
『나무 위의 남작』은 칼비노가 그린 더할 나위 없는 미궁의 지도이다. 현실을 상징하는 ‘땅’과 이상을 상징하는 ‘하늘’ 사이에 있는 나무 위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남작 코지모를 주인공으로 설정하고, 또 그런 코지모를 바라보는 동생 ‘나’의 시점에서 이야기가 서술되는 것도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의 지도를 정확히 그리기 위해 한발 물러서야 한다는 작가의 의도로 읽힌다. 칼비노는 두 번의 세계 대전을 거친 후 더 복잡해진 20세기 중반 서구의 현실을 들여다보는 렌즈로 18세기라는 시대를 택한다. 광기의 시대를 통과한 작가가 계몽의 시대였던 18세기를 택한 건 어쩌면 필연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출판사 서평 중에서
연말 모임 중에 학창시절 후배들과의 만남이 오랜만에 있었다. 대체로 일상적이고 개인적인 이야기, 시시콜콜한 고민들이 주메뉴다. 그러다가 제법 진중한 이야기도 나눈다. 그 중에 굵직굵직한 프로그램을 연출하고 있는 PD가 있는데, 오랫동안 방송인의 위치에서 활동하시는 분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방송계에서는 터줏대감격의 분이신데, 여든이 넘으셨음에도 정정하시고, 젊은 사람들 못지 않은 열정을 갖고 계셔서 존경스럽다는 거였다. 같이 식사 자리를 갖다 보면 아무래도 역사를 관통한 분이시라 한마디 한마디 배울 점이 많다고 했다. 생생한 현장 이야기를 듣는다고. 훗날 더 연로하시기 전에 후대에 남겨 줄 수 있는 인생 철학을 인터뷰하고 영상이나, 책으로 남겨도 좋겠다는 이야기들을 나눴다.
이 소설을 읽다 보면, 비슷한 느낌을 받는다. <로빈슨 크루소>뿐만 아니라 요나스 요나손의 <창문 너머 도망친 100세 노인>, <포레스트 검프>가 떠오르기도 한다. 나무 위에 올라가서 평생을 살아가는 코지모 역시 나무 위에서 프랑스 혁명, 나폴레옹 시대 등 역사의 격동기를 통과해 나가기 때문이다. 우리 눈을 멀게 하는 것은 너무 가까이에서 보고 있기 때문임을, 그러므로 땅에서 떨어져 나무 위에서 세상을 ‘보여’ 주는 우화같은 환상 동화라 생각했다.
작가인 자신은 투명하고 논리적인 언어로 미궁의 지도를 그리고, 그곳을 빠져나갈 수 있도록 안내해 주는 역할을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소설을 읽음으로써 독자가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태도를 스스로 깨우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문학에 대한 그의 믿음이었다. 그리고 비록 그 미궁이 다른 미궁으로 이어지더라도 그 도전은 계속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책 소개 중에서
문학을 읽는 이유, 특히 소설을 읽는 이유는 각자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길을 잃는 과정과 길을 찾는 과정이 은유와 상징으로 들어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시각이 타인의 삶에 미치는 영향이 클수록 정교하게 다듬어 가야 한다. 때론 환상적인 기법을 이용하는 이유 또한 단순히 기법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가장 적절한 전달 방식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전달방식에서 소설가의 개성이 드러난다. 개인적으로 내가 좋아서 파고들었던 작가들은 그런 개성이 뚜렷하다.
이탈로 칼비노의 글들은 판타지 요소가 있지만, 이상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철학적 접근이면서도 현대에 구현한 프로그래밍 언어이자, 영상의 느낌이 있다. 결코 텍스트에 머물지 않는다. 예전 하룬 파로키의 작품 전시를 관람할 때 칼비노의 작품이 떠오른 이유기도 하다.
이탈로 칼비노의 글은 대체로 묘사가 많지 않다고 하는데, <나무 위의 남작>은 긴 묘사들이 주를 이루는 느낌적인 느낌이 있다. 다만, 비유나 상징적인 요소가 많지 않아 가볍게 잘 읽힌다. 그래서 대중적인 대표작이 된 게 아닐까. 대중성과 문학성 두 마리 토끼를 잡은 셈. 아무리 사실적인 그림이라도 그것은 그림일 뿐이듯 때론 묘사에 치중하면 현실 대신 허구임이 더욱 부각시켜버리는데, 이걸 의도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사실적인 묘사에는 플러스 알파가 필요하다고 본다. 그런 점에서 이탈로 칼비노의 텍스트는 영상이나 그래픽에 가깝다. 일반적인 공간을 특수한 공간으로 구현해내기 때문이다.
나무 위라는 특수한 공간에서 인간을 고찰하고 현실에 참여한 남작의 일대기
동화적 상상력으로 그려 낸 인간과 사회의 갈등과 그에 대한 깊은 통찰
출판사 서평 중에서
우리는 종종 형을
우리와는 다른 감각과 직관을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나무 위의 남작> 이탈로 칼비노
"고전이란 다시 읽을 때마다 처음 읽는 것처럼 무언가를 발견한다는 느낌을 갖게 해주는 책이다"_이탈로 칼비노
이탈로 칼비노는 <왜 고전을 읽는가>에서 이렇게 밝힌다. 생각해 보면 클래식 음악이나 오랫동안 사랑받아온 음악을 들을 때 느껴지는 바로 그 느낌이기도 하다. 다양한 장르의 층위를 이해하는 것이 폭넓은 시야를 가질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기에 우리는 고전(古典)이니까 고전(苦戰)하면서도 읽는다. 고전은 읽은 사람만이 알 수 있는 무언가가 있다. 그리고 각자 저마다의 고전이 있기도 하다.
이탈로 칼비노의 서적 분류법도 재밌다. <마르케스의 서재에서>를 읽고 쓴 리뷰에서 다뤘던 책에 관한 나의 생각으로 마무리 해본다.
이탈로 칼비노의 서적분류법을 보면서 드는 생각이다. 과유불급(過猶不及)과도 같다. 책이란 것도 다양한 인격을 갖고 있어 사람처럼 대해야 한다. 너무 가깝지도 넘 멀지도 않은 적절한 거리. 그래야 책과 나 사이에 사유의 바람이 통하고, 책은 책대로 나는 나대로 존중받고 서로 신뢰하는 관계가 될 수 있다. 맹목적인 남독의 시기를 거쳐 보니 더욱 그렇다. 양이 질을 어느 정도 보장하기에 남독의 시기는 필요하다. 닥치는대로 읽고 나면 내게 잘 맞는 책을 스스로 고르는 안목도 생겨나고, 책에 대한 외형적 평가에도 그러려니 하게 된다. 모두에게 좋은 사람은 없듯 모두에게 잘 맞는 책도 없다. 나와 잘 통하는 책이 좋은 책이다.
<마르케스의 서재 리뷰 중에서> 헤아리다
“이탈리아가 폭발하고 영국이 불타고 세계가 멸망하는 동안
이탈로 칼비노만큼 내 곁에 두고 읽을 더 훌륭한 작가는 없을 것이다.”
_살만 루슈디
“보르헤스와 가르시아 마르케스처럼 이탈로 칼비노는
우리를 위하여 완벽한 꿈을 꾼다.
세 작가 중 칼비노는 가장 낙관적이며, 인간 진실에 대한 호기심을
매우 다양하고 부드럽게 보여 준다.”
_존 업다이크
칼비노는 20세기 이탈리아의,
그리고 유럽의 가장 훌륭한 작가 중 하나이다.
_《뉴욕 타임스》
나무 꼭대기에서 태어났는데 마법에 걸려 땅을 밟을 수가 없대요.
간단히 말하자면 코지모 형은 그렇게 떠들썩하게 나무 위로 도주한 뒤에도 예전처럼 거의 우리 곁에서 살았다. 그는 사람을 피하지 않는 은자였다. 아니, 어떻게 보면 사람들만이 형의 가슴 속에 있었다고 말할 수도 있다.
코지모는 내려가서 개의 입에서 토끼와 꿩을 받아들고 개를 쓰다듬어 주었다. 이 모든 것이 그들 사이의 친밀감의 표시이자 의식이었다. 하지만 땅과 나뭇가지 위에 있는 둘 사이에서 계속 단음절의 소리와 혀를 차고 손가락으로 내는 소리를 통한 대화와 지혜가 오갔다. 개에게는 인간이, 인간에게는 개가 필요한 존재였고, 그들은 서로 배신하지 않았다. 그들은 이 세상에 있는 인간과 개와 다르기는 했지만 행복한 인간과 개였다고 말할 수 있다.
오랫동안, 그러니까 사춘기 내내 사냥은 코지모 형에게 세상의 전부였다. 냇물이 고인 곳에서 낚싯줄을 드리워놓고 뱀장어나 송어가 걸리길 기다리고 있었던 것을 보면 낚시 역시 그랬던 것 같다. 우리는 종종 형을 우리와는 다른 감각과 직관을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가지를 치고 나무를 벨 때면 나무 소유주의 관심뿐만 아니라 이용하는 길을 보다 편리하게 만들어야 하는 여행자의 입장에 있는 자신의 관심에도 신경을 썼다. 그래서 나무와 나무 사이에 다리가 되어줄 만한 가지들은 언제나 그대로 남겨둔 채 가지를 쳤고 주변 가지들에서 힘을 받을 수 있게 했다. 그렇게 해서 형은 이미 자신을 따뜻하게 맞아주었던 옴브로사의 나무들을 가지치기 기술을 이용하여 더욱더 도움이 되는 존재로 만들었고, 동시에 이웃과 자연, 그리고 형 자신의 친구가 되게 해주었다. 특히 형이 나이가 든 뒤, 이 슬기로운 작업의 결과로 인해 나무들은 형이 공을 들인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이점들을 베풀어주었고, 형은 그것들을 누릴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