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일어난 초등교사 자살사건을 기점으로 교권침해 문제가 다시 조명되고 있다. 오늘은 한 고등학생이 수업 중에 라면먹방을 유튜브로 생방송을 하고 수업 후에 상담실에서 까지도 그 내용을 라이브방송했다는 뉴스를 보고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물론 일련의 학교 문제들이 어제오늘 갑자기 생긴 일도 아니다.
문제가 생기면 우리는 하나의 원인을 찾으려고 하지만 사실은 원인은 셀 수 없이 많을 것이다. 세대는 바뀌고 아이들은 달라지고 어른들과 세상은 자신이 살았던 방식과 제도를 벗어나지 못하고 여러 가지 복잡한 원인들이 얽히고설켜 곪았던 상처가 지금 하나씩 터지는 느낌이다. 교권침해의 문제는 비단 우리나라만의 현상은 아니다. 가까운 일본이나 유럽 같은 선진국에서도 예전부터 있어왔던 문제다. 교권으로 한정하기보다는 세대의 문제일 수도 있지만 학교라는 교육현장에서는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 영국에서는 가장 기피하는 직업이 교사가 된 지는 오래되었다. 교사는 지식을 가르치는 사람이 아니라 아이들을 사랑하는 사명감이 더 큰 사람만이 선택하는 직업이라는 인식이 있어 지식에 대한 욕구가 있는 사람은 학교로 취업하는 것이 아니라 진학을 하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한다.
미국은 자유를 상징하는 나라로 흔히 수업시간에 자유로운 면학분위기를 상상할 수 있지만 예상외로 엄격하고 무서운 학칙과 기준을 가지고 있다. 학습 분위기를 흐리게 하거나 교권에 대항하는 어떠한 행위도 바로 문제시되고 학부모가 소환되며 담임포함 관계자와 교장주최 회의가 열리며 퇴학도 불사한다. 교사와 학부모의 소통은 모두 이메일등 문서화되어 기록되며 공식화된다.
지금의 교권문제 또한 권위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단순히 교사의 권위뿐만 아니라 사회전반적으로 지켜야 할 권위와 당연히 따르고 우선시해야 할 기준 같은 선이 뚜렷하지 않고 모든 사람의 인권만을 앞세운다는 생각이다.
나 또한 짧게나마 교단에 선 적이 있지만 수업내용보다 조용히 라는 말을 더 많이 했던 날도 많았다. 그럴 때마다 학교에서는 수업내용의 흥미와 창의성을 강조하며 학습의 집중력을 유도하지 못하는 교사의 능력 문제로 상황을 교사 개인으로 국한해 버린다. 교사는 스스로를 검열하고 자책하며 스스로를 격려한다. 물론 교직의 보람을 느끼게 하는 훌륭한 학생과 학부모들이 대다수이다. 그러나 이미 학교교실에서 수업을 충분히 이해하고 따라오는 학생은 1/3도 미치지 못할 수 있다고 감히 그리고 조심히 밝힌다. 나머지 2/3를 끌어당기다가 오래지 않아 힘에 부쳐 포기해 버릴 수밖에 없는 자괴감에 나는 학교에 오래 있을 수 없었지만 그 모든 것을 감내하고 대다수의 교사들은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는 말은 이제 전설이 되어 버렸지만 아직도 훌륭한 선생님은 존재하고 있고 그렇지 않은 교사도 당연히 있다. 소위 철밥통이었던 교직이 누렸던 편안함이 있었던 세월 또한 부인할 수 없다. 학교 안에서는 무소불위의 힘을 가졌던 교사의 시대가 분명 있었다. 이제는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체벌의 시간을 온몸으로 견디었던 시대를 지나온 나는 요즘의 일련의 사태에 격세지감을 느낀다. 지금도 틀리고 그때도 틀리다고 밖에 말할 수 없는 현실이 안타깝다.
시대가 변하고 있다. 식당에 가면 두세 살 아기들이 모두 약속이나 한 듯이 식탁 앞에 핸드폰이나 아이패드를 세워두고 아기의 시선은 유튜브 화면에 엄마의 시선은 아기에게 상태로 밥을 받아먹는다. 내가 어릴 때라면 밥 먹을 때 티브이를 보면 눈 나빠진다거나 식탁예절이 아니라거나 하는 어른들의 잔소리가 쏟아졌는데 이제는 이 모든 것이 허용되는 반대의 세상을 살고 있다. 그러니 이제 학교도 사회도 변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당장에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학교 조례 같은 법을 다시 제정하는 것이겠지만 마치 카드 돌려 막기 같은 폭탄 돌리기일 뿐 서로에 대한 기본적인 인간존중의 문제에 대한 접근까지는 갈길이 너무나 멀기만 하다. 발등의 불을 끄기 위한 여러 가지 정책들이 그나마 교사와 학생 학부모 모두에게 조금이라도 숨통을 틔우는 길이 되길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