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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숙경 Aug 21. 2023

애니천국

  아까부터 L의 한숨 섞인 신음소리가 들려온다. 벌써 세 번째다. 나는 한쪽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정체  모를 것들이 뒤섞여 끓고 있는 냄비를 들여다보고 있다. 진갈색의 액체가 바글바글 끓으며 몸을 뒤채고 있다. 야릇한 냄새가 피워 올라온다. 냄비 속에서는 내 열망이 마법의 힘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 한 번도 시도해보지 않은 주문을 하고 싶지만 아직 만들지 못했다. 사실 이제 와서 주문이 다 무슨 소용이 있을까 하는 의문도 든다. 모든 것이 다 끝났다는 생각이 들자 국자를 든 손에 힘이 없어진다. 처음부터 내 마법이 이렇게 효험이 없었던 건 아니었다. L과 함께 영화를 제작하면서 보냈던 꿈같은 시간들이 모두 마법의 힘 때문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모든 것이 진짜 꿈처럼 느껴진다. 어쩌면 이곳 애니천국에서 처음 남자를 봤을 때부터 내 인생이 꼬이기 시작했는지 모른다. 

  L은 가끔 코를 훌쩍거리면서 냄새의 정체를 찾는 것 같다. 그는 너무 피곤하고 무기력해져서 아무것도 묻지 않는다. 냄비 속에 온갖 잡탕이 뒤섞여 끓고 있는 것은 모를 것이다. 이건 단순히 요리가 아니라 엘릭시르다. 마법의 정수. 이 특별한 요리를 위해 별난 수고를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가 더 이상 슬퍼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고 더 이상 괴로워하면서 머리를 쥐어뜯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다. 눈을 감은 채 누워있는 그의 옆으로 다가앉는다. 그의 손이 티셔츠 밑으로 들어와 가슴을 더듬는다. 그의 옆에 누워 그가 하는 대로 따라준다. 하지만 오른손은 어깨 위로 들어 올린다. 나를 내려다보는 그의 눈빛이 흔들린다. 그는 나에게 싫증이 났다. 나는 그와 섹스를 같이 할 때에 한 손을 절대 쓰지 않았다. 어떠한 경우에도 한 손은 뒤로 잡아 둔 채 아무것도 하지 않도록 했다. 어깨를 붙잡아야 하는 순간에 한 손만은 허공을 휘잡고 있다거나 머리 위로 향한 채 허우적대는 꼴이었다. 왜 한 손은 쓰지 않는 거지? 하고 그가 물었을 때 쉽게 대답할 수가 없었다. 대답을 하지 않자 그는 그것이 내가 쾌감을 느끼는 방식이라고 멋대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어리석은 생각과 멋대로 짐작하는 것이 어느 정도 맞아떨어져서 별로 무리 없이 지내게 되었다. 하지만 그런 나의 행동들이 그의 마음을 거스르게 한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이 무겁다. 그가 내 마음을 알 수는 없는 거니까. 사실 그런 데에는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단지 한 손은 마법을 하는데 필요하기 때문에 섹스를 할 때는 쓰지 않는다는 규칙을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절대로 내 마법을 공개해서는 안 된다는 규칙도 함께 정해놓고 있었다. 만약 내가 마법을 발설하면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내 마법의 일지에 그런 몇 가지 규칙을 정해놓았었다. 그러니 이제 와서 L에게 그런 것을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애니천국은 큰 도로에서도 한 참 벗어난 후미진 골목의 끝에 있다. L은 서울 변두리에 애니천국이라는 간판을 내건 책 대여점을 냈다. 유령 같은 이 가게를 세내어 나를 앉혀 놓고는 취재를 한답시고 나가서 잘 들어오지 않았다. 만화책과 무협지, 그리고 소설책 등이 책장에 가득 채워져 있고 DVD는 몇 년 전 것들이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다들 컴퓨터로 다운로드해서 보기 때문에 이젠 잘 찾지 않는다. 나도 다운로드한 영화를 보면서 시나리오를 한편씩 구상했다. 전 해에 이름 있는 공모전에 턱걸이 가작에 당선되는 영예를 안은 것을 마지막으로 더는 어느 곳에서도 손길을 뻗치는 데가 없었다. 내 노트에는 빼곡하게 시놉시스가 수십 편이나 들어차 있고 감독들의 이름과 전화번호가 자잘한 글씨로 몇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지만 아무도 내 작품을 신통하게 봐주질 않았다. 나는 이 불운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 참담한 마음으로 생각해 보았다.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늘 같은 패턴의 행동과 사고를 했기 때문이라는 나름의 결론을 내고 있었다. 해는 반드시 동쪽에서 뜨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역발상의 사고가 필요한 때라고 마음을 다잡았다. 영화가 끝나가는 시간이 되면 나는 늘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곤 했다. 그래봐야 창밖에 보이는 거라곤 간간히 지나는 사람과 체념한 듯 바람에 흔들리는 가로수의 앙상한 가지뿐이었다.   

  그날도 나는 영화가 끝나는 시간에 고개를 들고 창밖을 보았다. 그 시간에 지나가는 사람들은 나와 시선을 마주치게 된다. 나는 아직도 영화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해 멍한 눈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주인공과  함께 어두운 거리를 쏘다니다가 허겁지겁 섹스를 나눈 여운이 남아있어 열에 들떠 있었을 수도 있다. 한 남자가 고개를 숙이고 안으로 들어오는 게 보였다. 남자는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오더니 책장 앞에 서서 뚫어지게 앞을 응시하고 있었다.   

  찬찬히 보니 남자는 인류 최초의 직립 인간 루시를 닮았다. 언젠가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었는데 원시인으로 분장한 배우들이 인류의 먼 과거를 재현하느라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오백만 년 전의 인류는 온몸이 털로 뒤덮여 있었고 최초로 걸음마를 시작했기 때문에 어깨는 구부정하고 걷는 것도 불안정했다. 내레이터는 루시가 맞아 죽었다고 했다. 나는 복숭아 통조림을 먹으려고 접시 위에 덜어내던 손을 멈추었다. 왠지 복숭아의 반구가 루시의 머리통처럼 생각되어 먹을 수가 없었다. 아직 말을 할 줄 몰랐던 원시인들은 괴상한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아마도 으아으아(네가 좋아)를 으이으이(네가 정말 싫어)로 잘못 알아들은 또 다른 동료에 의해 죽임을 당한 것이 아닐까. 이건 내 추측이다. 

  그의 얼굴은 무엇인가를 찾는가 하면 아무것도 찾지 않는 표정이었다. 말하자면 생각이 통일되어 있지 않다는 느낌말이다. 남자는 먼 고대로부터 이제 막 도착해서 현대인을 재현하느라 애를 먹는 중인 것 같았다. 이윽고 남자는 책을 한 권 뽑아 들고 카운터 옆에 있는 소파에 앉았다. 잠시 후에 남자의 손에서 책이 미끄러져 내리는가 싶더니 바닥에 툭 떨어졌다. 나는 그가 읽는 책의 제목을 흘끗 보았는데 제목이 ‘마법의 백과사전’이었다. 뭐야 바보를 고치는 마법이라도 찾는 건가? 갑자기 그를 구해주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의무감이 들었다. 그러자면 나부터 마법에서 풀려나와야 할 것이었다. 나는 오래전 마법에 걸려 고통을 주렁주렁 달고 사는 숲 속의 나 잘난 공주다. 바보와 내가 서로 마법에서 풀려나와 사랑을 하려면 고난도의 주문이랄까 뭐 그런 거라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  

  남자는 느린 동작으로 책을 다시 집어 들었다. 책은 제대로 읽히는 것 같지 않았다. 두터운 입술이 앞으로 돌출되어 책과 가장 가까이 만나고 있었다. 눈의 초점이 어디로 향하는지 따라가 보니 그림만 대충 보다가 졸기를 거듭 반복했다. 마법에라도 걸렸는지 깜박깜박 졸다가 책을 덮어버리고는 제자리에 두지도 않고 사라졌다. 물론 루시의 걸음으로 현대적 장식들 사이를 비집고 나갔다고 해야 할 것이다. 

  마법의 백과사전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은 책장을 옆으로 밀고 들어가면 나온다. 공간을 활용하기 위해 책장들을 밀면 또 다른 책장이 나오게 되어 있는데 마지막 책장을 밀면 내가 거주하는 공간이 나온다. 잠을 잘 수 있는 방과 작은 주방도 있다. L은 어떻게 이런 곳을 찾았을까? 그리고 어째서 이곳에 애니천국이라는 이름을 붙였을까? 그러니까 이곳은 전체가 애니천국인 셈이었다. 나에게 이곳은 절대로 천국일 수가 없는데도 말이다. 

  책 제목은 상대적이고 절대적인 마법의 백과사전이었다. "늑대에게 겁을 주고 싶으면 산토끼 똥을 몸에 바르라. 티티새의 깃털을 집안에 놓아두면 사람들이 잠드는 것을 막을 수 있다. 투명인간이 되고 싶거든 오디새 둥지에서 발견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색깔의 돌을 몸에 지니고 다녀라. 잠자는 사람에게 겁을 주고 싶거든 원숭이 가죽을 그 사람의 몸 위에 올려놓으면 된다." 이런 마법들은 중세의 유럽에서 유행했던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지금 늑대에게 겁을 주고 싶은 사람이 있을까? 하고 생각해 보면 현대에는 맞지 않았다. 더구나 딱총나무 기름이나 박쥐피 따위 그리고 오디새의 피 같은 것은 구하려 해도 구하기 어려운 것들이다. 내친김에 마법에 관한 책들을 한 아름 빌려왔다. 마법서들을 제법 진지하게 읽어 보았다. 어떤 책에서는 한 시대의 신조는 다른 시대의 미신이며 우리가 현재 품고 있는 신념의 대부분도 언젠가는 미신이라 여겨질 것이라고 했다. 또 다른 책에서는 현재도 사람들 사이에 마법사는 존재하지만 어떤 모습으로 있는지는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어쩐지 세상의 모든 바보들이 마법사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자를 본 후로 나는 자꾸만 마법의 세계에 관심이 가기 시작했다. 어쩌면 늘 공상에 빠져 있을 때가 많아서 그렇게 되어버렸는지 알 수 없었다. 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이기도 했다. 인생은 내게 늘 쓴맛만 보여준다. 어쩌면 사소한 일들이 중요한 사건의 결정적인 요인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그냥 지나쳐버리면 후회를 남길 수 있다. 자질구레한 것들, 파편 같은 것들 말이다. 언제나 그렇게 흘려버렸기 때문에 직장도 잃고 말았다. 중요한 서류를 휴지통에 버리는 바람에 한 달 만에 쫓겨 나왔다. 사랑했던 남자도 떠나버렸다. 모든 게 내 부주의 탓이라는 생각이었다. 그때의 충격은 두고두고 나를 괴롭혔다. 작은 것부터 소중히 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자가 애니천국에 나타난 데에는 어떠한 의미가 있을 것이었다. 

  벽에는 영화 포스터가 더덕더덕 붙어있다. L은 자기가 좋아했던 영화의 포스터를 모았는데 벽에 다른 장식을 하는 대신에 모아둔 포스터를 도배하듯이 붙여놓았다. 천장지구의 포스터와 친구의 포스터가 나란히 붙어있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ET도 있다. ET는 L과 함께 보았던 영화였다. 어떻게 그런 영화를 만들 수 있었는지 놀라울 따름이었다. 외계인과 지구인 아이가 서로 손가락을 마주대고 있는 장면에서는 따뜻한 감동의 파동을 느꼈다. 그런 명장면을 연출할 수 있었던 건 다 풍부한 상상력 때문일 것이었다. L과 나는 한 모임에서 감독과 시나리오 작가를 준비하면서 만났다. 서로 좋아하는 장르가 비슷하고 바라보는 시각도 맞았다. 우리는 서로 손가락을 마주 대 보면서 킬킬거리다가 가까워졌다.  

  애니천국에서 내가 하는 일은 그다지 없었다. 의욕도 없이 빌려 준 책을 돌려받고 또 빌려주고 할 뿐이었다. L은 내게 기다리라는 말만 했다. 전화기 저쪽에서 들려오는 허스키한 목소리를 듣다 보면 사람은 절대 변하지 않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기다린다는 것은 참기 힘든 일이다. 며칠 후 나 몇 년 후에 무엇이 어떻게 된다는 것인가? 그 시간 안에 나는 죽을지도 모르지 않은가? 지금 당장 외계인이 저 문을 열고 들어와 나에게 애니천국에서 나가라고 할지도 모른다. 생각해 보니 나는 갈 데가 아무 데도 없었다. 내겐 친구가 없었다. 늘 혼자였고 늘 생각이 많았다. 몇 명의 친구들과도 연락을 끊어버렸다. 연락을 끊자 먼지처럼 생각들이 가라앉았다.         

  L은 아무 말 없이 내게서 떨어져 이불속으로 들어간다. 나는 무슨 잘못이라도 한 사람처럼 가만히 누워 있다가 다시 냄비 곁으로 다가간다. 그는 이제 공허한 표정으로 천장만 바라본다. 나는 영화 일 말고 뭔가 다른 말을 해주어야겠다는 생각에 남자에 대해 말을 꺼냈다. 아무래도 마법에 걸린 것 같아. 팔을 들어서는 자꾸 엉뚱한 방향을 가리키거나 고개를 숙이고 땅을 보거나 그래. 정말 이상하지. 그러나 그의 귀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 듯 한숨만 쉰다. 그 소릴 벌써 몇 번째 하는 거니? 그의 건조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에게서 희망을 사라지게 한 장본인은 투자자다. 더 이상 돈을 대 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제 촬영은 중단된 채 모두 뿔뿔이 흩어져 버렸다. 배우는 다른 배역을 맡아 살을 뺐고 머리를 잘랐다. 새로운 투자자를 찾는다고 해도 스태프들을 다시 불러 모으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되어버렸다. 제임스 카메룬의 타이타닉이 생각난다. 점점 침몰해 가는, 점점 낙담이 번져가는 그의 얼굴을 보는 것은 괴롭다. 주문만 완성된다면 요리도 끝이다. 동 서양의 갖가지 주문을 갖다 붙여보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다.     

  영화가 끝날 때쯤이면 남자는 애니천국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어쩌면 남자는 늘 그 길을 다녔는지 모른다. 그런데도 나는 왜 알 수가 없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평범한 흰색 남방과 구멍 난 청바지차림이었다. 애니천국 앞을 지나가면서 남자는 항상 내 쪽을 바라보았다. 나와 눈이 마주친 남자는 나를 본 적이 없다는 표정이었다. 구면일 경우 보통 사람들은 나는 너를 본 적이 있다는 눈빛을 보낸다. 횟수가  많아질수록 ‘나는 너를 참 많이 알고 있다’로 바뀌게 될 수도 있다. 그렇게 너구리 같은 표정을 짓는 인간도 혐오스럽지만 횟수에 관계없이 나는 너를 전혀 모른다는 표정을 짓는 인간은 단절을 넘어 마법에 단단히 걸렸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남자는 거리를 지나다가 갑자기 노를 젓는 시늉을 했다. 노를 젓다가 한 손으로 뒤를 가리키며 연신 허리를 굽혔다가 폈다가 했다. 손에는 늘 열쇠를 쥐고 있다. 차들이 지나갈 때면 더 그랬다. 그건 마치 이쪽으로 오세요. 잘 모시겠습니다.라고 하는 호객 행위로 보였다. 아마도 나이트클럽의 기도를 하지 않았을까? 그러다가 차에 받혀 버리기라도 해서 정신이 들락날락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남자가 오른쪽 모퉁이를 돌 때면 제자리에서 한 바퀴 돈다는 것도 알아냈다. 항상 세 시 방향에서 나타난다는 것도 알았다. 누군가를 기다릴 땐 항상 세 시 방향을 바라보게 될 것 같다. 남자와 가까워져야 한다는 강박이 새롭게 머리에 들어찼다. 

  거기엔 남자를 보는 날은 재수가 좋다는 이유가 있었다. 내 마음은 이미 그러기로 결정을 내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희귀성과 특이성, 그리고 가끔씩 가다가 한 번만 볼 수 있다는 것 등이 그날의 운수로 정해졌다. 새가 날아가는데 특히 까치가 동쪽에서 서쪽으로 날아가면 기분 좋은 일이 생기는 거다. 지나가는 차번호가 네 개가 똑같은 숫자이고 수가 높은 수일수록 좋다. 이렇게 운수를 점치는 버릇은 현실을 피로하게 했다. 거리를 걷다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면 어떤 새가 어떤 방향으로 날아가는지를 살펴야 하고 고개를 내려 앞을 바라보면 지나가는 차의 번호판의 숫자가 어떤 배열을 하고 있는지를 빠르게 알아보아야 하며 고개를 숙여서는 바람에 뒹구는 쓰레기의 크기와 방향에 대해 신경을 쓰다 보면 정신이 어찔할 지경이 되었다. 피로는 점점 더해갔다.   

  냄비가 끓고 있는데도 주문은 완성되지 않고 있다.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불려서 닳고 닳은 주문은 안된다. 누구의 입에서도 불린 적이 없는 주문을 걸어야 한다. 어떤 종류의 마법도 경솔하게 시도해서는  안된다. 국자로 휘저어본다. 겉으로 보면 그냥 고깃국일 뿐이지만 이 안에 별의별 것을 다 넣었다. 염소의 수염과 고양이 발톱, 참새 똥, 등등 이런 것들을 구하려고 경동시장을 한참 헤매어 다녔다. 아무거나 넣는다고 좋은 것이 아니다. 마법의 힘을 최대한 받을 수 있는 것들이어야 한다. 

  첫 번째 마법을 걸고 마음에 든 시나리오를 완성했다. 남자를 만나고 얼마 후부터 나는 애니천국에 앉아 마법을 익히기 시작했다. 흑마법이니 백마법이니 하는 것은 기본이고 갖가지 재료를 사다가 기본적인 마법을 걸어보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나의 첫 번째 작품이 개구리 뒷다리 마법이었다. 내가 구할 수 있는 것 중에 가장 쉬우면서도 특이한 것은 개구리 뒷다리였다. 말린 개구리 뒷다리를 가스 불 위에 올려놓고 바싹 태웠다. 고기 굽는 냄새가 나고 이윽고 탄내가 났을 때 불을 껐다. 개구리 뒷다리는 새까만 막대기처럼 변해 있었다. 절구에 넣고 찧어서 가루를 냈다. 그것을 종이에 싸서 바지 뒷주머니에 넣고 다녔다. 누가 봤으면 미쳤다고 했겠지만 아무도 모르게 해야만 효과가 있다. 누구라도 보게 된다면  마법은 사라지고 만다. 중세의 마법을 변용한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원숭이 가죽이니, 오디새의 피 같은 것을 어디서 구한단 말인가. 먼 곳을 향해 뛰어오르는 개구리 다리에서 힌트를 얻었다. 승진이나 기회 따위가 올 거라는 암시를 불어넣으면 그게 마법이라는 생각이었다. 

  다음날 정말이지 신기하게 한 프로덕션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내 시나리오가 마음에 든다고 했다. 당장 촬영에 들어가고 싶은데 만날 수 있겠냐고 물어왔다. 외출 나간 고양이처럼 사뿐한 걸음으로 충무로에 나갔다. 뭐가 급한지 시나리오를 거의 수정하지 않고 크랭크인에 들어갔다. 천만 원의 거금이 쥐어졌다. 상대적이고 절대적인 금액이었다. 빗자루를 들고 하늘을 나는 기분이 그럴 것이었다. 나는 마녀처럼 웃었다. 영화는 그럭저럭 세간의 주목을 끌어냈다. 억지로 꾸역꾸역 토해냈다는 표현이 적당할 것이다. 감동은 터무니없는 욕심이고 의욕만 과잉인 채 억눌린 표정만 짓다가 사라지는 주인공의 알 수 없는 내면이 줄줄이 스크린을 메웠다. 현란한 영상기술이 엉성하고 조잡한 스토리를 대신했다. 상상력의 부족을 테크닉으로 소화하려니 무리가 온다. 아무려면 어때. 상상력의 부재는 나만의 문제도 아니고 어제오늘의 문제도 아니다. 허리우드 영화가 1,2,3으로 순열을 매겨가며 껌 씹듯이 재탕하는 것을 보면 모르나. 언제나 막대한 돈이 들어가는 영화판은 살얼음을 걷듯이 냉정하기만 했다. 

  L은 어느 날 카메라가 든 가방을 둘러매고 애니천국에 돌아왔다. 내 소식을 들은 것 같았다. 나는 그동안 써 놓은 시나리오를 그에게 보여주었다. L은 무척 기뻐했다. 그리고 지독히 창의적이지 못한 표정으로 이제부터 자기가 내게 천국을 만들어 주겠노라고 했다. 엔딩 크레딧에 제3감독이라는 타이틀과 그의 이름이 조그만 글씨로 올라온다. 그것도 눈을 부릅뜨고 찾기 전에는 후딱 지나가버려 알 수도 없다. 그의 엉덩이에 개구리 뒷다리 마법을 걸어주었다. 가루를 그냥 엉덩이에 발라주었다. 그러자 그는 곧 정식으로 감독에 데뷔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시나리오는 내 작품으로 한다고 해서 기뻐했지만 마냥 좋아할 수는 없었다. 부지런히 마법의 테크닉을 연구했다. 그는 작전회의를 한다고 뻔질나게 드나들었고 나는 마법을 개발하랴  시나리오를 손보랴 쉴 사이 없이 바빴다. 주인공을 바다에 빠뜨리는 장면을 지우고 바위에서 떨어뜨리는 장면을 넣으라고 해서 모든 작업을 다시 해야 했다. 바쁜 와중에도 그가 드나들 때마다 손수건에 마법의 향수를 뿌려주거나 윗옷 주머니에 마법을 건 볼펜을 꽂아 주었다. 그는 일이 너무 잘 풀려서 오히려 걱정이 된다고 했다. 그가 촬영장에서 살다시피 할 때는 그의 옷가지들을 챙겨다 주면서 촬영장 전체에 마법의 가루를 몰래 뿌리느라 골머리를 앓기도 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영화가 중단됐다는 말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무엇 때문일까? 마법을 잘 못쓰기라도 했단 말인가? 내가 했던 마법들을 다른 영화 촬영장에 가서 해보기도 했지만 그 영화는 흥행에도 성공했다. 그렇다면 내 마법의 문제는 아닌 것이었다. 그럴수록 나는 더욱 독을 품고 마법에 열을 올렸다. 그래서 검증된 마법사 애니가 되고 싶었다.  

  나는 매일 마법의 일지를 썼다. 일지를 보니 L의 엉덩이에 붙여 준 가루는 너무 쉽게 떨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앉았다 일어서면 털려 나간다는 것을 간과한 것이었다. 마법일지를 쓰면서 더욱 세세하게 마법의 계통을 알아갔다. 하지만 더욱 강한 에너지가 나오는 마법을 시도하기가 쉽지 않았다. 남자라면 내게 도움이 될 것 같았다. 남자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다가 뒤를 밟기 시작했다. 그가 걷는 거리는 늘 같았다. 좁은 골목 모퉁이에서 한 바퀴 돌고 나오면 찻길에 닿는다. 남자는 몇 번 노를 젓는 시늉을 하고 어깨를 늘어뜨리곤 그 길을 따라 죽 걸어서 그의 엄마가 노점상을 하고 있는 시장으로 갔다. 남자의 엄마는 상추나 무말랭이 따위를 늘어놓고 팔았다. 나이 든 얼굴에 검버섯이 피고 주름이 자글거렸다. 상학아 이것 좀 먹어봐라 하면서 손에 든 떡이나 먹을 것을 내밀면 남자는 누가 빼앗기라도 하는 것처럼 잽싸게 낚아채서 먹는 것이었다. 그것을 보는 그의 엄마는 민망해하면서도 흐뭇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녀는 내가 옆에 서 있는 것을 보자 혼잣말을 했다. "저 아가 살짝 저러요". 남자는 멀리까지 가지 않았지만 한 곳에서 한참 동안 서 있기도 했다. 그럴 땐 남자 옆으로 가서 말을 걸어보았다. 아이스크림 사줄까? 남자는 아주 친한 사람을 만난 것처럼 헤벌쭉 웃었다. 그리곤 시선을 거두고 지나는 차들을 보았다. 또 시작이군하고 내가 말하기도 전에 그의 팔이 노 젓는 시늉을 했다. 몇몇의 사람들이 보다가 지나쳐갔다. 남자는 매우 근사한 손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그 손을 만져보아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 잡혔다. 빌어먹을 생각이 한번 스치자 곧 행동으로 실행하라는 명령이 내려왔다.   

  서늘한 바람이 불던 늦봄이었고 세시 방향에서 나타난 남자가 천천히 교대 정문 쪽으로 걸어 올라갔다.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계속 걷다 보면 남자와 친구가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길가에 핀 이름 모를 꽃들에 눈길을 주기도 하고 바람에 몸을 내 맡긴 채 떠도는 자의 쓸쓸하고 고즈넉한 표정을 지어보았다. 빈 하늘에서는 새가 날고 차들은 천천히 꽁무니를 내빼며 달리고 있었다. 번호판의 숫자가 7000이다. 기분이 좋아졌다. 0은 인도인이 만든 숫자다. 0이 없었다면 인류는 아직도 달에 착륙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직도 19세기에 머물러서 손가락을 호호 불며 편지를 쓰고 있겠지. 0은 시작과 끝이 만나는 원을 그린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함께 만난다. 과거에 나는 남자와 부부의 연을 맺었었던 건 아니었을까? 라일락꽃이 송이송이 늘어져 향기를 뿜어대고 머릿속은 무척 어지러웠다. 언덕진 길을 걸으면서 남자는 손을 휘저었다. 남자의 손이 그리는 우아한 곡선을 바라보았다. 마법일지를 꺼내서 남자가 팔을 휘젓는 빈도를 적었다. 남자는 교정의 이곳저곳을 기웃거렸다. 늘 지나다니는 곳이라 그런지 익숙한 동작이었다. 교정의 벤치에 나란히 앉아 있게 되었을 때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남자의 곁으로 바짝 다가가서 살짝 손을 잡아 보았다. 그는 별안간 매미 우는 소리를 냈다. 지나가는 여학생이 이상한 눈으로 남자와 나를 바라보았다. 

  하나의 과제를 해결하자 또 다른 과제가 머릿속에 빙빙 돌았다. 남자가 손에 쥐고 있는 닳고 닳아 반짝이는 열쇠를 빼앗아 오는 일이 그것이었다. 조금 심각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그것만 해결하고 나면 일상으로 돌아와 내 생활에 전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것은 마법의 일지에 유일하게 노획물로 기록되었다. 하지만 상처가 남았다. 이틀 후 남자는 세시 방향에서 나타나서 도로를 따라 죽 걸어 올라갔다. 권리분석이라고 크게 써 붙인 부동산과 분식점등을 지나치고 과일가게도 지나치고 큰길에 접어들었다. 그 길을 가는 동안 어떻게 열쇠를 빼앗을 것인가를 궁리했다. 남자가 느리게 걷는 통에 내가 앞지르기도 했다. 사람이 많은 곳을 선택한 이유는 사람들 사이로 유유히 사라질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남자가 노를 저으며 팔을 뒤쪽을 향해 뻗었을 때 그의 손끝에서 반짝이던 그것을 낚아챘다. 그러나 남자도 그 순간에는 무척 빠르게 움직였다. 재빨리 내 팔을 붙잡더니 머리채를 휘어잡고 늘어졌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커다랗게 울부짖는 소리가 내 입에서 흘러나왔다. 사람들이 달려들어 뜯어말렸다. 어떤 사람들은 남자의 뺨을 때리고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내가 남자에게 맞고 들어온 날 L은 영화를 완전히 접었다면서 배우 P양을 험담했다. 그렇게 심란한 얼굴을 하고 있으니 될게 뭐냐는 거였다. 내게 화살이 돌아오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었다. 시나리오를 문제 삼자면 한도 끝도 없을 것이었다. 하지만 우회적인 표현을 그렇게 하는 것이라는 것도 알았다. 투자자가 갑자기 손을 접은 것도 시나리오가 조잡하다는 이유라는 후문이 들려왔다. 내겐 새로운 마법이 필요했다. L을 기쁘게 해 주고 싶었다. 새로운 투자자가 나타난다면 그는 무덤 같은 이불속에서 벌떡 일어날 것이다. 그래서 가장 특별한 방식의 마법을 개발했다. 요리를 해서 함께 먹는 것. 그  엘릭시르는 모든 시름을 잊게 해 주고 새로운 창조력을 가져다줄 것이었다.    

  한동안 남자는 보이지 않았다. 남자가 궁금해져서 그의 집 앞으로 가 보았다. 집은 낡은 양옥이었고 주변에는 비슷한 집들이 이어져있어 같은 시기에 지어진 거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낮은 담장엔 이끼가 자라 있었다. 남자의 집에는 측백나무가 한 구루 서 있었다. 녹색이 선명하고 키가 큰 잘 자란 나무였다.  마당에는 개 밥그릇이 놓여 있었지만 개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측백나무는 마당 한가운데 심어져 있었다. 집에는 아무도 없었고 주위도 조용했다. 갑자기 고흐의 ‘사이프러스가 있는 밀밭’이라는 그림이 생각이 났다. 불타오르는 듯한 사이프러스를 즐겨 그렸던 고흐. 강렬한 터치와 원색의 조화로 누구도 따를 수 없는 천재성을 드러냈던 남자. 사이프러스는 한 번 자르면 그 후에는 싹이 돋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죽음의 나무라고도 한다. 

  사이프러스, 사이프러스 불타는 사이프러스하고 낮게 중얼거려 보았다. 그러자 그것은 주문을 외듯 입에 착 붙는 것이었다. 간절한 무엇인가가 가슴속에서 몽실몽실 피어오르는 것 같기도 했다. 한 번 자르면 그 자리에 다시는 싹이 돋아나오지 않는 나무. 남자는 언제 꿈의 가지가 잘린 것일까. 마당에는 남자의 엄마가 어디선가 모습을 드러냈다. 시어머니다.라고 하는 미친 상념이, 머리를 비집고 올라왔다.        

  남자의 집에서 즉석에서 만들어 불렀던 주문을 걸어 본다. 사이프러스, 사이프러스 불타는 사이프러스. 하지만 냄비 속의 국물은 이제 곤죽이 됐다. L이 안 먹겠다고 할까 봐 걱정이 된다. 터치 오브 스파이스의 라스트에서 한 주인공의 독백이 생각난다. ‘성찬이 끝나고 슬픔은 디저트로 달랜다' 마침 마법의 생수에 꿀을 넣은 차와 마카롱을 준비했다. 슬픔에 젖어 있는 그가 맛있게 먹는 것을 보는 건 즐거움이다. 고개를 돌려 L을 부른다. 그는 어느새 밖으로 나가고 없다. 책장을 밀어 애니천국을 통해서 밖으로 나간 것 같다. L은 편지 한 장 남겨 놓고 떠나가 버렸다. "넌 알 수 없는 여자야. 넌 너 자신밖에는 몰라. 이기적이고 차가워. 냉장고 안에 있는 개구리 뒷다리 혼자 많이 먹어. 섹스할 땐 앞으로 두 손을 다 사용하도록 해. 아픈 것도 아니면서. 이젠 다른 사람 만나서 잘 살길 바랄게 안녕.” 그의 카메라도 가방도 모두 보이지 않는다. 그를 사랑했지만 붙잡아 두는 마법은 쓰지 않았다. 아마도 그런 마법을 썼다면 그는 나를 죽일지도 모른다. 싫은 사람을 오래도록 바라보는 고통을 견딜 수 없을 테니까.     

  나는 스티븐 스필버그가 마법사라고 확신한다. 외계로부터 오는 신호를 감지하고 거기에 손가락을 살짝 갖다 댄 최초의 우주 마법사. 손가락 하나로 허리우드를 접수하고 이제는 전설이 되려 한다. 전설은 또 다른 이야기의 강줄기가 되고 호수가 되어 흘러간다. 어느 날 아무도 찾지 않던 호수에 침침한 눈을 비비며 누군가 찾아와 낚시 줄을 드리운다. 사이프러스, 사이프러스, 불타는 사이프러스. 무엇인가 강하게 원하면 이루어진다는 것은 평범한 진리다. 사라진 전설이 내게 말을 걸어줄지 모르는 일이다. 괴테의 파우스트도 서유럽에서 가장 오랫동안 전해오는 전설이었다. 

  이제는 하나의 시나리오를 써야겠다. 마법의 일지를 펼쳐 다음 장에 쓴다. 카메라는 롱샷. 여자의 독백이 길게 시작된다.           

  어떤 남자가 내 앞을 걸어가고 있어. 한낮에 해는 뜨거운데 녹아버릴 것 같은 열기 속에서 남자가 내 앞을 계속 걸어가고 있어. 멈추게 할 수는 없어. 이미 시작되었고 예고되었던 사건이야. 그는 내 앞을 걸어가기로 돼 있는 거란 말이지. 누가 그렇게 시킨 것도 아니고 우리는 연기를 하는 것도 아니야. 그저 한 덩어리가 되어 바람을 거스르는 거지. 내게는 바람이 늘 불었어. 나는 늘 돌아가고 싶었어. 저 남자는 이제 나와 한 조가 되어서 함께 찾아 나설 거야. 

  남자가 내 앞을 걸어가다가 획 모퉁이를 돌았어. 이 거리는 빤한 거리야. 서두를 것도 없어. 아마 아이스크림 가게 앞에 서있을걸. “내 말을 잘 들으면 아이스크림을 사 주겠어”라고 말했어. 내 말을 못 알아듣는군. 그 점이 맘에 들어. 너무 아는 체하는 남자는 지겨워. 

  나는 내가 태어나기 전으로 가고 싶어. 엄마의 뱃속 그 이전으로 말이야. 엄마의 뱃속은 따뜻하고 기분이 좋았지. 그렇지만 그 이전의 한 지점으로 가고 싶은 거야. 그때는 기분이 어땠을까? 기분이라는 게 없었겠지. 나라는 것은 어떤 형태로 존재한 걸까. 납작한 홀로그램의 형태였을까. 과연 나라고 불렀을 수 있었을까. 나는 늘 그것이 궁금해. 나는 흐름을 거꾸로 역류해 어떤 지점에 가 닿고 싶어. 몰랑몰랑하고 부드럽고 아늑했던 어떤 순간으로. 누워서 엄지발가락을 빨면서 시간을 응시하고 싶어. 그 공간이나 시간 속에서 자유자재의 내가 되는 거야. 만약 바람이 불어오게 하고 싶으면 잔잔하고 머리카락만 날리게 하는 공기를 생각해. 그 생각만으로 바람은 실재가 돼서 내 머리카락을 슬쩍 치고 달아나. 생각은 아무 여과 없이 현실에 투영되는 거야. 그런 순간이 과거에 있었으리라 생각해. 왜 지금 그게 안 되는 거야. 나를 옭아매는 것들은 다 뭐지. 내가 태어나기 전 엄지발가락을 빠는 것 같은 그 근질거리는 또는 살랑거리는 시간 덩이들 속에서 적어도 돌아가야 할 곳은 생각하지 않았어. 나는 우주의 한 점으로서 그곳에 있을 확실한 존재 이유를 부여받고 어떤 이름으로 명명될 필요도 없이 안도하고 있었던 거야.  

  그런데 어느 순간 이곳에 대책 없이 던져졌단 말이야. 정말로 대책 없이. 이렇게 막막하게 나를 놓아버리면 어떻게 하냔 말이야. 그래서 곰곰 생각했지. 이건 마법이야. 누군가 저주의 마법을 내게 걸어서 험악한 지구에 던져버린 거라고. 시간이 별로 없어. 마법을 풀어야만 해. 내가 마법에 걸렸다는 걸 잊기라도 하는 날에는 영영 우주미아가 되어버린단 말이지. 그렇게 되면 내게 마법을 건 누군가는 행복해할지도 몰라.   

  남자는 아이스크림 가게 앞에서 한참을 서 있다가 다시 걷기 시작했어. 해는 뜨겁게 달구고 머리통이 휘발되는 것 같아. 대기는 바람 한 점 없이 고요하고 숟가락으로 떠낼 수 있을 것 같은 침묵이 우리 사이에 흐르고 있어. 남자가 내 앞을 걸어가. 그의 걸음은 빠르지 않아. 오히려 무진장 느려서 내가 앞지르기를 해. 그의 옆을 스쳐 지나가며 고개를 돌려 옆을 보니 비지땀을 흘리고 있어. 그 표정은 슬픈 듯도 하고 우는 듯도 해서 가슴 한쪽이 살짝 아파와. 나는 그의 눈이 무척 좋아. 나를 마주칠 때마다 전혀 나를 모르는 표정을 짓거든. 그 무심함이 비릿하게 콧속을 후비고 나를 자극해. 태어나서 처음으로 감동을 받은 것 같아. 새로운 흥분이 돌기를 일으키고 열에 들뜬 머리가 가라앉는 것 같아. 남자가 걸음을 멈추고 신호를 보내기 시작했어. 두 팔을 벌리고 차도 쪽으로 내려서서 지나가는 차들을 부르는 거야. 그 몸짓은 야릇하고 우스꽝스러워. 하지만 너무나 진지해. 팔로 노를 젓는 것 같은 시늉을 하다가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뒤를 가리켜. 그가 가리키는 쪽은 건물들뿐이지. 균열이 가기 시작하는 낮고 더러운 건물들과 골목들이 이어져 있어. 그 골목들의 끝에는 네 명의 귀머거리 할머니들이 그늘진 곳에 앉아 있어. 머리는 하얗게 세 가지고 다 빠진 이를 드러내며 웃고 있는 귀먹은 늙은이들이 어떻게 네 명이나 앉아 있는지 모를 일이야. 세포분열이라도 한 건지 분간을 할 수 없어. 이건 필시 마법일 테지. 그 골목의 벽들에는 기저귀 같이 하얀 종이들이 나달거리는 데 까만 활자들이 시무룩하게 박혀 있지. 깔세를 놓습니다. 500/30만. 한 달에 삼십 만원씩 까다보면 일 년 하고도 오 개월을 살 수가 있어. 그 정도면 충분하지 안 그래. 불안정한 행복이 참 멋지지 않아? 그 사람은 일 년 오 개월 동안 오백을 모으기만 하면 돼. 그렇게 살아가는 거지. 만약 간이 나쁘다거나 암이 몸을 좀먹고 있다거나 해서는 절대 안 돼. 걸어가다가 시비가 붙어 머리가 깨져서도 안 되고 술 처먹은 자동차를 들이받아도 안 된다고. 나쁜 병에 걸린 것처럼 마법에 걸리면 좀처럼 그것을 풀 수가 없어. 지독한 일이야. 그것을 풀어 줄 사람이 있어야 하는데 아무나 그를 찾아낼 수 없다고. 

  잠시 혼란스러웠던 자동차들은 다시 길을 가기 시작했어. 다행히 그를 향해 욕하지는 않았어. 그가 그렇게 열성적으로 가리키는 곳은 아무도 거들떠도 보질 않아. 아무도 그가 가리키는 방향이 우리가 떠나온 곳이란 걸 모르겠지. 그가 행한 것은 일종의 의식이었어. 나는 그것을 알 수 있어. 남자가 계속 같은 행동을 반복하는 것을 보면 약간의 규칙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어. 남자가 내 앞을 걸어가고 있어. 조금만 고개를 돌려도 안방을 쉬이 보여주는 가냘픈 거리를 걸어가고 있어. 난 그와 사랑을 하게 될 것 같아. 이 길이 끝나는 곳에서. 모두가 쉽게 들여다볼 수 없는 마법의 커튼을 내리고.   

 애니천국에서는 푸른 모래바람이 분다. 그 바람은 안에서 불어 밖으로 새어나간다. 그건 누군가 그 안에서 마법의 주문을 외우고 있기 때문이다. 그 주문이 무엇인지 잘 들어보면 알 수도 있을 것이다. 다만 애니천국으로 가야만 알 수 있다. 나는 오늘도 그곳에 있다. 내게 말을 걸어줄 전설을 기다리면서. 애니천국. 나의 영원한 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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