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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숙경 Aug 21. 2023

달의 꼬리를 밟다

  베개의 꽃무늬가 얼굴에 새겨질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눈을 떴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르겠다. 마냥 시간이 흘러서 내 옆구리와 발가락 사이를 스쳐 지나간다. 이 게으름이란 병은 대책이 없다. 한량없이 자고 또 자고, 먹고 또 먹고, 늘어지게 하품하면서 머리를 긁적이고 있노라면 시간이 잘도 간다. 그래도 내게 꿈이 있다면 단 한 가지, 죽을 때까지 먹고 노는 것이다. 누군 일하고 싶어서 하냐고 하면 한마디 해주고 싶다. 그만두라고 제발 그만두라고 함께 맘껏 놀아보자고.

  눈을 뜨면 제일 먼저 보이는 게 갑 티슈의 꽃그림이다. 나는 저것을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 두어야겠다고 벌써 며칠째 생각했었다. 가지에 샛노란 꽃들이 포도송이처럼 총총 달려 있는 키 작은 나무였다. 화려하지도 않았고 독특하지도 않았다. 밑에는 꽃나무의 이름과 설명이 쓰여 있다. 게느삼. 강원도 함경남도 평안남도의 산록이나 길가에 나는 낙엽 관목이다. 우리나라에서만 자라는 특산식물. 개화기는 5월이고 결실기는 7-9월이다. 게느삼. 눈을 뜨기 전에 난 머릿속에 생각을 모아보았다. 게느삼이었는지, 게삼느였는지, 또 다른 이름이었는지 한 달째 쓰고 있는 티슈인데도 머리에 박히지 않는 이름이었다. 저놈의 티슈 통을 어디다가 치워야지 하면서 눈만 뜨면 이 짓을 반복한다. 내가 평생 살면서 실제로 게느삼을 보게 될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보게 된다고 해도 별로 반가울 것 같지도 않다. 과거 시간이 한없이 엿가락처럼 늘어지던 시절을 떠올리게 될 것이므로, 방바닥에 눌려 붙어버린 것처럼 꼼짝하지 않고 하루에 하루를 보태던 추억을 어쩔 수 없이 떠올리게 될 것이다.

  꼿꼿이 앉아 한쪽 다리를 들어 머리 뒤로 올린다. 몸이 많이 굳었는지 되질 않는다. 스물여덟 나이에 몸이 굳다니 말이 안 된다.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과 인터넷에서 불러낸 명상 음악이 있고 어디선가 개가 여우 울음소리를 내는 가운데 요가를 한다. 다리를 벌렸다가 오므렸다가 팔을 천천히 벌리고 다리 위에 올렸다가 내렸다가 한참을 해본다. 요가인지 체존지 모를 동작을 반복하고 마지막 동작은 전형적인 요가 동작으로 끝낸다. 두 손을 책상다리 끝에 얹는다. 모든 제대로 배우려면 스승이 필요하다. 하지만 요가를 이렇게 흉내만 낸 것으로도 나는 흡족하다. 스스로 체득해 가는 방법도 없는 것이 아니다. 그러다가 자신이 스승이 되기도 하니까. 그런 것도 못마땅하다. 조금 배웠다고 관을 세우고 스스로 스승을 자처하고 내세우는 사람들이 널린 마당에 거기에 하나 더 보탤 것이 무어냐. 난 아류가 되느니 영원히 배움을 좇는 사람이고 싶은 것이다. 

  여름은 끝나가고 옅은 비가 오고 있다. 밤새 세차게 내리고도 모자라는지 한낮이 되어도 그치질 않는다. 창밖엔 피뢰침이 이웃집 지붕 위로 솟아있다. 소심한 저항 같다. 하늘을 향해 가느다란 한숨을 피워 올리는 그러나 가뭇없이 사라지는 야유. 내가 책상머리에서 장난 삼아 쓰는 자기소개서처럼 말이다. 그 글의 첫마디는 `저는 귀사에 입사하고 싶지 않습니다.’로 시작한다.   

 저는 귀사에 입사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입사지원서를 내고 자기소개서를 쓰는 이유를 말씀드리면 이 세상에서 최소한 살아가려는 가련한 몸짓이라고 말해두죠. 즉 어쩔 수 없는 선택이란 말입니다. 그걸 그렇게나 듣고 싶어 하니 말을 아니할 수 없단 말입니다. 보시다시피 난 타고난 반골인데 생존을 위해 가면을 뒤집어쓰고 살고 있습니다. 나의 불행의 시초는 바로 거기에 있답니다. 귀사의 사훈은 도전 정신 그리고 성실이라지요. 나와 정면으로 배치되는 단어입니다. 내게서 골수를 파낸다 해도 도전 정신 따위는 찾을 수 없을 겁니다. 도전하는 시늉이라도 해볼라치면 또 의심병이 도진 사람처럼 사원들의 성실성과 충성심을 의심하면서 서로 견제하고 경쟁하도록 하겠지요. 결국 저는 조용히 나이 먹는 연습을 하면서 노후대책이란 걸 하겠지요. 어째서 나는 귀사에 적합한 사람이 되기를 갈망해 마지않아야 하는지 이 한심한 나의 처지에 저주를 퍼부을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구태의연한 모토를 내건 수많은 기업들에 정나미가 떨어지지 않을 수가 없답니다. 뭐 이런 저라도 받아 주시겠다면 기꺼운 마음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넷트는 광대하므로 귀신처럼 익명으로 숨어 들어가서 자기만족의 배설을 하는 정도야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결국 빅데이터에 꼬리를 잡혀서 도마에 오르기도 한다. 또 누군가가 나에 관한 정보를 채집한다면 모두 걸러질 일이다. 그러면 나는 정말로 채용되지 않게 된다. 영원히. 그것은 무엇을 뜻하느냐면 언제까지나 집순이로 살아야 할지 모른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심각할 필요도 없다. 난 아주 조심할 거니까. 

  어젯밤에도 백수들의 모임 사이트에 들어가 열심히 리플을 달아주었다. ID 죽쒀서개줌이 한탄을 한다. “면접에 일곱 번이나 떨어졌어요. 죽고 싶은 심정이에요. 왜 떨어졌는지 거울을 열심히 들여다보았지만 정말 알 수 없군요. 일이 하고 싶은데. 정말 하고 싶은데.” 나는 그에게 가볍게 위로의 말을 해주었다. “용기를 잃지 마세염. 님은 반드시 해낼 수 있을 거예요. 님을 떨어뜨린 회사가 운이 나쁜 거지요. 밝고 힘차게 살아가세염.” 그러자 숨통조임이 끝내 한마디 한다. “새대가리님 남의 말이라고 쉽게 하시는군여. 계속 여기저기 리플만 달지 말고 님이나 잘하셔.”

  다들 신경이 예민해서인지 옥신각신 다툼이 일게 된다. 밤새도록 웹서핑을 했더니 실컷 자고 일어났는데도 눈알이 튀어나올 것 같다. 팔도 후들거리고 온몸이 노곤하다. 모든 의욕과 열의가 어디론가 빠져나갔는지 아무런 욕구가 생기질 않는다. 누가 뭐라 해도 화도 안 난다. 아무래도 이게 우울증인지 모르겠다.  

  예전의 나는 회사에 출근하기 전 거울을 보며 전투력의 배가를 외쳤다. 미간에 살짝 주름을 잡고 눈에 칼 빛을 세워 누구도 내 신경을 거스르지 못하도록 미리 각본을 짜고 다녔다. 누군가가 ―그 누군가가 사장일지라도― 부당하다고 생각되는 행동을 했을 때 나는 결코 용서하지 않았다. 말해야 할 것은 말한다는 게 내 신조였다. 그래서 말해야 할 것들을 다 말하는 바람에 직장을 몇 번 옮겨야 했지만 그게 경력이 되고 노하우가 되어 새로운 발판이 마련되기도 했다. 그런데 세상은 참 많이도 빠르게 변한다. 어제의 경력이 오늘은 정리해고의 일 순위가 되기도 하니. 물론 내가 정리해고 되었다는 소리가 아니다. 내 발로 걸어 나왔으니까. 더러운 꼴 보기 전에 내가 먼저 나오는 게 정신위생에 좋을 것 같아서다.  

  모닝롤을 가로로 자른 반쪽에 베이컨을 노릇하게 구워 얹는다. 양상추를 한 겹 뜯어내고 오이와 볶은 양파를 베이컨 위에 쌓아 올린 후 나머지 모닝롤을 살짝 덮는다. 머스터드 레몬 소스를 발라서 한 입 베어 문 다음 뜨거운 커피를 입에 적신다. 천천히 되도록 천천히 씹고 마신다. 노트를 보니까 어제까지 지출한 돈이 삼백오십이만 원이다. 이제는 베이컨 따윈 먹을 수 없다. 노트의 가장자리 여백은 온통 숫자들로 가득하다. 나도 뭐가 뭔지 알아볼 수 없는 숫자들이 마구 휘갈겨 있다. 생활비가 얼마나 들어가는지 계산하느라 나도 정신이 없을 지경이다. 정말이지 숫자를 보기만 해도 머릿속이 하얘진다. 

  간단한 식사를 마치고 가볍게 명상에 잠긴다. 느림의 시간이다. 밀란 쿤데라의 소설을 옆에 두었다. 물론 읽지 않았다. 앞으로 언제 읽을지 모른다. 나는 너무 느리다 못해 게을러터졌다. 몸은 따라주지 않아도 정신만은 언제나 한 발 앞서려 한다. 항상 앞서고 싶었다. 앞서지 않으면 괴로웠다. 모두 내 발밑에 있다고 믿어야 직성이 풀렸다. 모두 지난 일이다. 나는 이제 스터디룸펜이라던가 오천원족이라던가 빨대족이라는 신조어를 접하면 뜨끔해진다. 게다가 이런저런 신조어를 익히기도 전에 신조어가 계속 생겨나 해골을 어지럽힌다. 특히 빨대족이라니.. 어제도 엄마가 왔었다. 어김없이 잔소리를 들었다. 내가 신경질을 내자 엄마는 나를 억세고 드센 년이라고 했다. 내 마음속에 게 살처럼 부드럽고 상처받기 쉬운 구석을 모르고 하는 말이다. 엄마를 마주치지 않으려고 애를 써도 안 된다. 완전한 독립은 없는지 그 잔소리에 주름살이 하나둘 늘 것 같다. 하지만 엄마의 도움 없이는 살 수 없을 것 같다. 엄마의 지원사격이 있어야 나의 생존은 가능하다. 한없는 자애가 있어야만 가능한 나의 추락. 엄마는 아무것도 안 하고 빈둥빈둥 놀기만 하니 부려먹기라도 해야겠다면서 월미도에 가서 수찬이를 잡아오라고 했다. 집을 나간 수찬이가 오늘 월미도 야외무대에서 공연을 한다는 소리를 누군가에게 들었다고 했다. 수찬이는 일곱 살 아래 남동생이다. 가수를 한다고 집을 나가서 몇 달째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어쭙잖은 허영심에서 비롯된 일탈일 뿐이라고 말했지만 엄마의 걱정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새끼들이 모두 집을 나가 사람을 잡는다고 하면서 울부짖었다. 엄마의 지시를 어길 경우 보조금을 받을 수 없을지 모른다. 하지만 툭하면 울고 짜고 설움을 토해내는 통에 이제 점점 짜증이 난다. 날씨가 궂은데 야외공연을 할지 모르겠으나 일단 가보기라도 해야 할 것 같다. 아침부터 죽 내 신경을 건드리는 게 바로 이거였구나 하고 생각하니 맥이 빠진다. 내가 회사에 다니기만 했어도 이런 심부름은 하지 않아도 될 일이었다.   

  일 년 전 나는 회사에서 큰 실수를 하고 말았다. 더 거슬러 올라가서 몇 달 전쯤 부장이 나를 불렀다. 유미 씨 이제부터 다른 업무를 맡아보지. 유미 씨는 야무지게 생겼으니까 아마 잘해 낼 수 있을 거야. 이건 중요한 업무라서 아무나 맡길 수 없는 일이야. 뭐 승진이나 다름없지. 앞으로 회사를 위해 더 분발해 주기 바라. 할 수 있지? 새롭게 맡은 일이 야무지게 생겼다는 이유로 내게 떨어진 건 불행의 시초였다. 생긴 것과 능력과는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다고 우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전 허당이거든요. 그동안 절 잘못 보신 거예요. 회사에 붙어 있기 위해 잔머리를 굴리느라 너무 피곤해요. 제발 절 그냥 내버려 두면 안 되나요? 내 마음속에서 외치는 소리를 삼키고 새로운 업무를 파악해 나갔다. 숫자들이 나열된 서류 뭉치들이 책상 위에 쌓여 있고 나는 이것이 음모일지 모른다는 생각에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부장이 나를 내보내기 위해 꾸민 일인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들었다. 나는 숫자에 약했다. 숫자를 볼 때마다 안갯속을 걸어가는 기분이었다. 도무지 명확하지 않고 짐작할 수 없는 숫자의 세계. 그동안 숨겨진 나의 콤플렉스가 조금씩 모습과 형체를 드러냈다. 부장은 함께 업무를 도와주었다. 그는 친절한 보스였다. 친절할 뿐만 아니라 유능했다. 나는 무능한 사람을 경멸하는 부류였다. 하지만 문제는 경멸하는 무능한 부류로 내가 떨어져 나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전에 내가 했던 업무는 개편되는 과정에서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그 일은 내게 딱 맞는 일이었다. 아침 회의에 들어가기 전에 사장과 모든 임원의 자리에 안건을 정리해서 올려놓았다. 그것도 쉬운 일만은 아니었다. 회의 목차에 따라 브리핑할 사원을 찾아가 미리 자료를 건네받고 때로는 잘못된 부분을 지적해 주었다. 숫자로 도배한 것들은 빼고. 아침만 분주하고 나머지 시간은 무료하고 따분한 날들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부장의 인내심이 한계에 다가가고 있다고 느끼는 감각들은 너무 선명해서 나를 괴롭혔다. 기함을 할 일이네. 부장이 소리쳤다. “영이 하나 어디로 간 거야? 출장이라도 가버린 거야? 유미, 영 어디로 보낸 거야?” 부장이 농담처럼 말했지만 나는 업무에 부적응자가 되어 있었다. 회사에 미안하지는 않았는데 부장한테는 부끄러웠다. 과감히 사표를 내고 뛰쳐나왔다. 기다렸다는 듯이 사표가 수리되었다.   

  돈 되는 일은 어째 거리가 멀다. 그래도 나는 나름대로 머리를 썼다. 벌지 못하면 쓰는 방법을 연구하면 된다. 집에서 가까운 할인마트의 시식코너에서 점심을 해결한다. 물론 이 방법은 좀 구차하다. 하지만 구차하지 않은 일은 없다는 생각이다. 사장이 되었다고 큰소리만 치고 앉아 있을 수 없다. 그들도 돈을 빌리기 위해서 금융기관에 손을 비비기도 하고 관공서에 머리를 조아려야 한다. 직원들에게도 어떨 땐 엎드려야만 한다. 알고 보면 그들이 더 구차한 노릇을 많이 한다. 여기저기서 주는 샘플을 모으면 꽤 오래 쓸 수 있다. 기업체에서 시행하는 경품 행사에 응모하는 것도 방법이다. 노력에 비해 돌아오는 것이 없지만 한번 걸리면 대박이 터지는 수가 있다. 아직은 내게 운이 닿지 않았다. 모든 사람들이 한 번씩 그 기회를 가져보고 마지막에 가서야 내 몫이 될 것 같다. 더군다나 기업체들은 경품 행사조차 엄청 머리를 쓴다. 한 번의 경품 행사에 얼마의 매출이 있을 것인지를 특채로 뽑은 인재를 투입해서 고액의 연봉을 주어가며 머리를 쥐어짜게 한다. 응모할 수 있는 대상도 제한을 두거나 이게 걸리고 저게 걸려서 아예 응모를 포기하게 만든다. 광고만 엄청 요란하게 때릴 뿐이다. 그래서 그들의 매출대비 순이익이 생겨났다. 내 새대가리로 어딜 따라가겠는가? 그러고 보니 언젠가부터 민수는 나를 그렇게 불렀다. 새대가리.

  민수는 회사에 있겠지. 그의 팔뚝이 생각난다. 울뚝불뚝 솟아오르는 근육을 바라보기만 해도 든든했었다. 민수의 미래는 나의 미래였다. 민수가 백수였을 때 나는 그의 먹거리를 해결해 주었고 그의 다리가 되어 줄 경비를 조달해 주었다. 미래를 위한 포트폴리오식 투자였다. 예전의 나약한 모습의 민수는 지금 없다. 변화무쌍한 세태에 어쩌면 그렇게 잘도 적응해 가는지 놀랍기만 하다. 그가 연봉을 얼마 받는지 대강 알고 있지만 그건 내가 그와 함께 하면서 누릴 수 있는 몫이 아니게 되었다. 그는 테드 휴즈의 시집을 두고 갔다. 또 술을 마시다가 더럽혀진 체크무늬 남방을 두고 갔다. 민수가 오지 않은 지 몇 달이 되어간다. 시집을 펼쳐보다가 ‘보름달과 어린 프라다’를 읽는다. 민수가 좋아하던 시였다. 어렸을 때 처음 달을 바라본 기억은 희미하지만 그 시를 읽으면 그때의 기억이 떠오를 듯하다. ‘달이에요! 하고 너는 갑자기 소리친다. 달이야! 달! 달은 자기를 가리키는 작품을 놀라 바라보는 화가처럼 뒷걸음쳤다.’ 

  민수는 달의 한 조각을 떼어 낸 것 같은 시를 쓰고 싶다고 했다. 그 말은 아마도 월미도에 함께 갔을 때 했었을 것이다. 민수는 월미도를 ‘달의 꼬리’라고 불렀다. 월미도는 지형이 반달의 꼬리를 닮았다고 해서 이름 지어졌다고 했다. 달의 꼬리라. 달에 꼬리가 있을 리 만무했다. 짐승도 아니고 그냥 달일 뿐인데. 달은 이지러졌다가 차오르고 차올랐다가 이지러지니 꼬리가 생기기도 한다고 민수는 말했다. 어쩌면 그럴 때 달의 모습이 살짝 웃는 연인의 입꼬리 같아 그곳의 사람들은 무한한 애정을 가지게 되지 않았을까 하고 말하기도 했다. 그런 말을 하면서도 민수는 불안해하고 있었다. “새대가리 그것도 몰라? 부장이 너 좋아한 거” 애매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기 때문에 새대가리라는 말만 뇌리에 남아돌다 사라졌다. 난 화가 나서 그럴 리가 없다 그런 거 아니다라고 말했지만 자기 말만 하고 내 말을 듣는지 마는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생활이 불안정한 것에 기인한 정서적인 핍진상태가 계속되어 아무 말이나 되는대로 하는 것 같았다. 

  민수가 있었다면 수찬이를 찾으러 달의 꼬리에 함께 가 주었을 것이다. 나는 종종 월미도에 가곤 했다. 대학에 떨어졌을 때도 갔었고 비가 와서 우울한 날에도, 회사에서 잘렸을 때도, 일하기 싫어서 버스에서 내리지 않고 직행하기도 했었다. 그럴 때마다 비가 자주 내렸던 것 같다. 우중충한 날씨에 홀로 유원지를 걷는 여자란 보기 좋을 게 없을 것이다. 언제는 내가 남의눈을 의식하며 살았나. 내 눈에 남은 중요하지 않았다. 잘 보이고 싶은 욕구가 없다면 거짓이겠지. 하지만 그러기 위해 일부러 연출한다거나 희생을 무릅쓴 어떤 수고도 하지 않았다. 지금의 나. 친구들을 만날 때 더 신경 쓴다. 아끼던 니트를 입고 백화점 세일 때 사두었던 바바리를 걸쳐 입고 그 전날부터 마사지를 한다. 궁색한 티를 내고 싶지 않아서다. 그들은 점점 빛이 나는 나를 보며 놀라워한다. 내심 볼품없는 꼬락서니를 하고 나타나기를 바란 친구도 있었을 것이다. 그들의 기대를 여지없이 무너뜨리는 통쾌함이야말로 삶의 활력이 된다. 아무에게도 지고 싶지 않은 건 어쩔 수 없다. 도대체가 재미없는 세상에 살고 있다는 생각이다. 그들은 내게 말한다. “야 아직도 노냐? 돈 많이 벌어 놨었구나. 부럽다. 그렇게 놀 수 있다니.” 내가 돈 떨어지기를 바라 마지않겠지만 어림도 없다. 샘물이 솟듯이 어디선가 돈이 술술 들어오니까. 들어올 테니까...

  “내리세요. 종점입니다.” 

  운전기사가 깨운다. 졸다 깨다를 몇 차례 거듭하자 종점이 되었다. 종점이 달의 꼬리다. 그렇게 자고서도 버스 안에서 졸린 건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머리를 앞뒤로 흔들면서 졸았던 것 같다. 수찬이가 걱정되지만 잠을 설칠 정도는 아닌 것인가라고 나 자신을 나무란다. 엄마의 걱정은 너무 지나친 면이 없지 않았다. 영영 안 들어올 것처럼 처절하다. 하지만 수찬이는 나처럼 음악에 재주가 없을망정 엄마 아빠를 외면하고 떠나갈 배포도 없고 그럴 계산도 하지 못할 것이다. 자신이 재능이 없다는 것을 깨달을 때는 언제고 돌아올 것이 분명하다. 그때까지 기다려줘야 다시는 집을 나가는 일은 없을 것이다. 

  맑은 날이면 바다 앞으로 떠 있는 섬들이 보였을 것이다. 아담하고 다정다감한 작약도가 보였을 것이고 영종대교로 이어진 영종도가 보였을 것이다. 왼쪽으로 멀리 아련하게 수줍은 듯 외롭게 떠 있는 무의도도 안개비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바다는 물결이 고요하게 가라앉아 있어 회색의 하늘과 하나가 된 듯하다. 썰물이라 드러난 바위 위에서는 시궁쥐가 들락거린다. 난간에서 밑을 내려다보니 밀물 때인지 바닷물이 들어오고 있다. 돌무더기에 점점 물이 차오르는 것 같다.  

  여기가 달의 꼬리다. 사람들은 많은 시를 지어 달에게 바쳤다. 달도 사람들처럼 나이를 먹겠지. 나이를 먹어가면서 달에게는 쌓여가는 게 있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에게서 받은 시가 달의 어느 한쪽 구석에 쌓여있을 것이다. 희미하게 탈색한 달. 백수의 달. 민수와 함께 바라보던 달. 달을 노래하지 않은 시인은 아마 없을 것이다. 아마도 달을 바라보면 누구나 시인이 되는가 보았다. 달을 읊조리다 보면 봄여름 가을 겨울이 오고 간다. 달에게서 시를 빼면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도 같다. 아마도 달에는 시가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여우와 같은 시, 토끼 같은 시, 가끔 심심할 때 땅콩을 씹듯이 꺼내 읽는 시. 사람들이 저를 바라보면서 읊어대는 수많은 시를 생각하면 달은 가끔 머리가 아플지도 모른다. 왜 내게? 왜 나를?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저마다 다른 이름으로 부르는 것도 달은 혼란스러울 것 같다. 왜 내가? 달은 혼란스러워 고개를 갸웃하는 게 아닐까? 달에게 시를 써서 바친 사람 중에 민수가 있다. 

나를 버려두고 와서 나를 데리러 가는 길에

비스듬히 깨진 달이

졸린 이마를 스친다.

  몹시 부끄럽다는 듯이 보여주었는데 어떤 뜻이 담겨 있다는 것은 말해주지 않았다. 그리고는 달의 한 조각을 떼어 낸 것 같은 시를 쓰고 싶다고 했다. 어쩌면 자신에게 그런 재능이 없다고 생각했는지 모르겠다. “자유인이여 너는 늘 바다를 사랑하겠지 바다는 너의 거울이다. 너는 네 넋을 물결의 끝없는 굽이침 속에 비추어본다.” 그는 보들레르의 사람과 바다라는 시를 소리 나게 읊조렸다. 바다가 반짝이며 응답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던 날에. 그렇게 환하던 웃음과 따뜻한 손길을 간직했던 날에. 달의 한 조각을 떼어 낸 것 같은 시를 쓰고 싶다고 그는 바로 이곳에서 달을 바라보면서 말을 했었다. 

  하얀 유람선이 길게 포말을 일으키며 나타났다. 선체 사이사이에 사람들이 난간에 서서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바다에도 길이 있다고 민수가 말했다. 물고기도 가는 길이 있고 배도 뱃길이 있다고 했다. 물의 흐름과 온도, 깊이 등에 따라 물고기들이 가는 길이 생긴다고 했다. 마구잡이로 다니는 게 아니라고 했다. 

“사람도 사람이 가야 할 길이 있어” “어떤 길인데” “자기 나름대로 가야 할 길이겠지 인간으로서의 길일 수도 있겠고” 그는 늘 아는 체를 했고 내게는 새대가리라고 했다. “야, 새대가리 그것도 모르냐?” 나는 다른 사람들이 그랬다면 무척 화를 냈겠지만 민수가 그렇게 부르는 것은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그는 그의 길을 간 것뿐이다. 내가 가는 길과 그의 길이 달랐을 뿐 무슨 문제가 있단 말인가   

  문화의 거리로 조성된 이래 사람들이 많이 찾는 것 같았다. 오늘은 날도 흐리고 비도 간헐적으로 와서 그런지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다. 바닥에는 무늬 돌을 깔고 예술적인 설치물도 보인다. 야외공연도 할 수 있게 무대도 만들어져 있다. 하지만 공연하는 팀을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 오늘 오후 일곱 시에 한다고 했던 것 같은데 뭔가 잘못된 것 같다. 이리저리 둘러보자 닻 모형의 쇠로 된 조형물에 한 남자가 매달려 있는 게 보인다. 남자는 몸집이 크고 피둥피둥 살이 쪘다. 쇠로 된 조형물은 크기가 삼 미터도 되지 않아 보인다. 물에 빠져 죽는 것도 아니고 닻에 매달려서 죽겠다고 하니 우습기만 하다. 그 남자는 내가 자신을 보고 있는 것을 알면서도 행동을 멈추지 않는다. 바닥에는 그의 소지품인지 큰 검은 가방이 있다. 그는 굵은 밧줄을 가지고 있는데 닻을 기대놓은 화강암으로 된 받침돌에 올라가서 닻의 꼭대기에 밧줄을 건다. 그리고 살짝 목을 감고는 받침돌에서 발을 뗀다. 살찐 목의 살이 밧줄에 걸려 흔들거린다. 그러면서 눈은 계속 나를 바라보고 있다. 남자는 오래 견디지를 못하고 얼굴이 새빨갛게 되자 발을 닻의 어느 부분에 댄다. 그리고 숨을 몇 번 몰아쉬더니 그 행동을 반복한다. 오십 대 중반으로 보이는 그 남자는 집을 나와서 떠도는 것처럼 보였다. 그도 나처럼 백수인가 보다. 백수는 백순데 살고 싶지 않은 백수. 관객이 별로 없다는 것이 아쉬울 뿐이다. 맞은편에 늘어선 횟집에서 나와 있는 아줌마들은 구경거리도 아니라는 듯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다. 벌써 며칠째 저러고 있다고 한 아주머니가 말해준다. 사내는 죽고 싶지 않은 것 같았다. 오히려 살고 싶은 것이다. 살고 싶기 때문에 누군가가 보아주길 바라서 저런 행동이나마 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목숨이란 참말 끈질긴 것이다. 죽기를 바라는 사람은 어떻게든 살아지고 살기를 바라는 사람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니 말이다. 남자는 죽는시늉을 하고 있으나 살고 싶다는 눈빛을 가지고 있다. 어째서 달의 꼬리에 와서 죽는다고 저럴까?

  민수의 회사가 있는 광화문에 갔었다. 그는 상당한 시간을 시를 쓴다고 매달리다가 취직을 선언했다. 그리고 얼마간 애를 먹더니 대기업에 들어갔다. 그러자 일에 매달리기 시작해서 상당한 직급으로 상승했다. 전무후무한 일이라며 떠들어댔다. 곧 미국에 MBA 과정을 밟기 위해 가야 한다고 했다. “모든 건 수치가 말을 해 주지. 모든 현상과 예측할 수 있는 사람들의 행위들이 수치가 되고 수치가 된 것들은 다시 이미지가 되고 상품이 되는 거야.” 시를 말하던 입이 순발력 있게 숫자를 말한다. “정말 조직에 적응할 수 있겠어?” 그는 절대로 회사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했었다. 하지만 왜 마음이 달라졌는지 이유를 말해주지는 않았다. 어쩌면 그 마음을 들키기 싫어서 나를 만나지 않는지도 모른다. 나에게 자신의 나약함을 보이는 것이 싫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더 크게 떠벌리듯 말했다. 몇 년 후에 자신이 어떤 위치에 있는지 지켜보라는 것이었다. “그래봐야 일개 직원일 뿐이겠지” 그 말이 그의 분노를 샀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왜 그런 말을 했을까 나도 회사 생활을 했으면서. 그의 자존심을 상하게 했을까? 그래서 전화도 안 하는 걸까? 그래 그럴 수도 있지. 나는 이미 그에게서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다. 난 자존심이 강한 여자다. 그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데 내 쪽에서 사랑 운운하는 우스운 짓은 하지 않는다. 아무 말도 없이 차만 마시고 왔다. 그래 가라 가.

  날이 점점 개어진다. 푸르스름한 하늘의 끝이 어두워지면서 해의 윤곽이 뚜렷해졌다. 해가 뚜렷한 가운데 한쪽에서 희미하게 달이 고개를 디밀었다. 달은 초승달이다. 나는 가만히 달의 꼬리에 아라비아 숫자를 그려본다. 01234. 달이 꼬리를 살랑살랑 흔드는 것도 같다. 꼬리에 매달린 숫자들이 달랑거린다. 한 사내가 달의 꼬리에 매달린다. 밧줄을 모아 쥐고 빙글빙글 돌면서 목에 걸린 밧줄을 풀어내려 애쓴다. 그는 간신히 달의 배 위로 올라가 다시 매달린다. 남자는 달의 한쪽을 떼어내 던져버린다. 나는 바다에 떨어지는 달의 조각을 본다. 무수히 꽃잎처럼 겹쳐지면서 피었다지고 있었다. 

  작년 가을 민수와 달의 꼬리에 와서 월미산에 올랐었다. 민수는 내 손을 잡고 산책로를 따라 산 위로 올라갔다. 이상한 열기가 그의 끈적한 손에서 전해져 왔다. 늦은 시간이었다. 개방되었다고는 해도 열 시가 되면 등산이 금지되었다. 그는 무슨 생각에서인지 일곱 시도 넘었는데 산에 오르자고 했다. 나도 그와 떨어지기 싫었다. 그가 가자는 곳은 무조건 따라가고 싶었고 그가 하자는 일은 아무것도 물어볼 것도 없이 함께 하고 싶었다. 산의 정상에서 시내를 내려다보니 부두에서 부두로 이어진 거대한 항구가 보였다. 바다에서는 무역선이 그림처럼 떠 있고 부두 안에서는 어느 나라에서 왔는지도 모를 수많은 배들이 정박해 있었다. 조그만 예인선 두 척이 커다란 배의 양 끝에 붙어 나갈 길을 안내하고 있었다. 그와 나는 어디론가 떠나고 싶었다.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온 배가 있다면 그와 함께 숨어 들어가 배 밑창에 붙어 몇 날이고 고생한 끝에 가 닿은 그 섬나라에서 살고도 싶었다. 우리 저 배에 몰래 탈까? 내가 물어보자 그는 피식하고 웃었다. 대답 대신 그의 입술이 포개져왔다. 나는 몸이 배배 꼬이는 것처럼 느껴졌다. 하산해야 할 시간이 되었다. 하지만 그는 좀처럼 내려갈 생각이 없는 듯했다. 어두워진 하늘은 문을 닫기 시작하는 수문장처럼 완고해 보였다. 바람은 나무로부터 불어오고 있었다. 나무에서 나무로 한숨처럼 또는 격정처럼 가눌 길 없는 그리움처럼. 

  그는 나를 이끌고 산의 곳곳을 뒤지고 다녔다. 나뭇가지에 옷이 걸려 떼어내느라고 그를 놓칠뻔하기도 했다. 그는 흡사 산짐승처럼 보였다. 이리같이 보이기도 했고 늑대같이 보이기도 했다. 곰 같은 구석도 보였다. 하지만 무조건 좋았다. 나도 이리가 되고 늑대가 되고 곰이 되면 그만이니까. 우리는 한 쌍의 짐승이 되어 이 산의 끝에서 끝으로 함께 뒹굴고 뛰어다니며 놀면 된다.     

  이미 상당한 시간이 흘러 있었다. 그와 난 산에 갇힌 신세가 되었다. 오토바이를 탄 산 지킴이들도 우리를 발견하지 못했다. 그는 어두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부대의 막사로 쓰이던 나무집을 발견했다. 산책로 아래 산비탈로 내려가야 했다. 막사는 꽤 오래전에 지어진 목조 건물이었다. 일제 때 지어진 것 같기도 했다. 문은 열려 있었으나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나무 바닥에 꿇어앉아 옷을 벗기 시작했다. 점퍼를 바닥에 깔고 나를 살며시 뉘었다. 나도 옷을 벗어 바닥에 깔았다. 

“후회하지 않겠어?”

  그가 내게 물었다. 그 말은 후회할 수도 있다는 말로 들렸다. 사랑에는 행위가 있고 그다음에 온갖 무성한 뉘우침이 있지 않을까. 이미 행위의 중도에 그 말은 자기 방어에 다름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도 개의치 않았다. 그의 이 말은 나중에 충분히 효과가 있는 말이 되었다. 우린 헤어진 거나 마찬가지니까. 그러나 나는 후회하지 않는다. 다만 좀 아플 뿐이다. 폭풍 같은 시간이 흘렀다. 비틀거리며 밖으로 나오자 환한 달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우릴 보고 있었다. 너희들 뭐 했어? 하는 듯이. 그는 다시 나를 이끌고 들어갔다. 몹시 피로가 밀려왔다. 그와 난 함께 껴안고 잠이 들었다. 

  이미 작년의 이야기가 된다. 그때의 순진함도 내겐 없어졌다. 그악스러움이 몸에 배어나기 시작했다. 거리에는 차츰 어스름이 내리고 등대가 가스등처럼 뿌연 빛을 쏘았다. 붉은 노을이 번지는 하늘에는 갈매기가 날아다닌다. 바닷물은 아주 조금씩 밀려들어 온다. 자갈들 위를 빛으로 쓸어내리면서 차츰 달의 한쪽을 간지럼 태운다. 달의 여신 아르테미스의 미끈한 다리가 물에 씻기는 듯하다. 그녀는 커다란 몸을 누이고 얇은 명사로 된 드레스 사이로 가슴을 드러낸 채 두 발을 담그고 있다. 가끔 몸을 움직일 때마다 물이 철렁거리며 다리 안쪽으로 스며들게 하면서. 해는 부끄러운 줄도 모르는 이 여신에게서 슬며시 고개를 돌린다. 오히려 해가 민망해서 붉은 얼굴이 된다. 멀리멀리 번져가는 노을을 바라보며 여신은 깨달음과 조바심으로 몸을 일으켜 세운다. 그녀는 이미 달아나버린 빛을 좇을 길이 없다. 해변에 서서 하염없이 맨발로 걷다가 그대로 굳어버린다. 

  횟집들이 불을 밝히기 시작한다. 엄마에게 전화를 하려다가 그만둔다. 분명히 잔소리를 들을게 뻔하다. 넌 동생이 걱정되지 않냐. 이렇게 비가 오는 날 너 같으면 공연하겠냐? 생각이 있는 거냐? 새대가리냐? 민수라면 그런 말을 할지도 모른다. 횟집 앞에 있는 오락기계가 소리를 질러댄다. 나 좀 때려줘. 아야 왜 때려. 

  “야 너 자기소개서 완전 웃겨준다. 그거 다른 사람들이 모두 봐도 되는 거야? 그런 걸 왜 숨통조임 따위가 보게 했어. 단박에 퍼 나른다는 거 모르지는 않았겠지.  

  나는 잠시 멍해서 핸드폰을 떨어뜨릴 뻔했다. 버스에서 내려서 바다 쪽으로 걸을 때 유진이 전화를 했다. 장난으로 쓴 자소서를 내가 숨통조임에게만 보여주었더랬다. 자꾸 신경을 거스르게 해서 좀 친해지면 나아지려나 하고 보여준 것이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이 들락거리는 곳에 올린 모양이다. 

  식당에 들어가자 아까 닻 조형물 위에서 목을 매달던 남자가 앉아 있다. 그의 덩치 큰 몸이 조그만 의자를 찌부러뜨릴 것만 같다. 탁자 위에는 달랑 소주 한 병과 고등어구이가 접시 위에 놓여 있다. 남자는 나를 보자 반색을 하며 의자를 내민다.

  “자 아가씨 오헬 마시고 앉으셔. 이런 날 혼자 온 거 보니까 벨루 기분도 안 좋은 거 같은데 한잔하고 가요.” 나는 그냥 나가려다가 하는 수 없이 떨어져 앉았다. 남자는 계속 말을 걸으며 내 옆으로 다가왔다. 자 젓가락 여기 있어요. 하며 아줌마가 날라 온 소주잔에 소주를 붓는다. 남자를 외면하면서 메뉴를 훑어보고 있는데 “글지 말고 한잔 혀요. 실연을 당했나. 이런 날은 소주가 제일이지.”하면서 아까 목을 맬 때처럼 절실한 표정으로 나를 똑바로 본다. 나는 혼자만의 시간을 방해받은 것에 대해 모욕감을 느꼈다. 하지만 남자는 내가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열심히 떠들어 댄다. “아가씨는 죽고 싶을 때 없어? 그냥 죽어라 하고 보고만 있드만. 난 살아도 희망이 없다구. 회사에서 짤렸거던. 그렇게 열심히 일했는데. 회사 앞에 매일 서 있었어. 내 나이 이제 쉰다섯이야. 벌어 논 돈도 없다구.” “아저씨 그래도 열심히 사셔야지. 죽을 생각을 하시다니. 가족들 생각도 하셔요.” “ 다 떠나갔어. 아들놈도 가고 마누라도 가고 풍비박산 났어.” 남자는 어지간히 술에 취한 것 같다. 나는 이런 자리가 너무 떨떠름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도 가냐. 너도 떠나가냐.” 남자는 아까 목을 맬 때 보다 더 절실한 표정으로 나를 본다. 덜컥 겁이 난다. 남자가 내 팔을 잡아 앉힌다. “ 나도 집에 갈 거야. 조금만 더 앉아 있어.” “아저씨 집에 가셔요. 이젠 날도 어둡고 쌀쌀해졌어요. 빨리 들어가세요.” 그러자 남자가 아주 슬픈 얼굴로 말한다. “나 좀 데려다줘. 어 아가씨. 아가씨 보니까 옛날 애인 보고 싶다.” 내가 아무 말 없이 벌떡 일어서자 무시무시한 소리가 귀를 때린다. “이 년이 조금만 더 있다가 가라니까 말을 안 듣네. 내 고추 만져달랄까 봐 그러냐 미친년.”       

  나는 기겁을 하고 식당 밖으로 뛰쳐나와서 한참을 달린다. 버스 정류장으로 달려가는 다리가 후들거린다. 민수가 더 원망스럽다. 내 나이 적지 않은데 이제 또 다른 님을 만나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또 갖은 아양과 신경전을 벌여야 할 것을 생각하니 막막하기만 하다. 민수가 헤어지자고 한 것이 아니니까 굽히고 들어갈까. 돈도 떨어져 간다. 젊음도 시들어져 간다. 난 어쩌란 말이냐. 저런 중닭한테 이런 수모나 당하고 살아야 하다니. 나는 기진맥진해서 버스에 온몸을 기댄다. 버스 창으로 달빛이 희미하게 달려 들어온다. 꼬리를 흔들면서. 꼬리 끝에는 숫자들이 대롱대롱 매달려있다. 수찬이의 기타도, 그리고 한 사내가 밧줄에 매달려있다. 갑자기 달의 한쪽 귀퉁이가 떨어져 나간다. 떨어지면서 꽃잎이 되고 별빛이 되고 바람이 되고 한없는 시의 몸짓이 되어 낙화하고 있다. 어쩌면 사람들은 간신히 매달려있는 세계의 끝에서 떨어져 나가지 않기 위해 혼신을 다해 살고 있는 게 아닐까? 민수도 나도. 민수가 언젠가 이곳에 와서 달의 꼬리에 매달리지 않기를 바란다. 조직에 적응을 잘 해내기를 바란다. 나는 그러기를 바라면서 달의 꼬리에 희망의 노란 꽃나무를 매달아 놓아 본다. 게느삼이었는지 게삼느였는지 아무튼. 자기소개서를 다시 써야겠다. 절실한 표현들로만 채워 넣어서. 이력서를 낸 곳에선 감감 소식이다. 민수야 정말 보고 싶다. 민수야 나 좀 데려가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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