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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GAZINE JEBI May 09. 2024

우리는 서로를 이해할 수 있을까

신세기 에반게리온 (1995)

1995년 TV 시리즈로 나온 애니메이션 <신세기 에반게리온>은 2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사랑받고 있는, 일본 만화의 대표적인 걸작이다. 올해 초엔 극장판 작품들이 영화관에 재개봉하여 기존 팬들의 뜨거운 반응은 물론, 그동안 신세기 에반게리온을 잘 몰랐던 사람들이 많이 입문하는 계기가 되었다.


사람들이 신세기 에반게리온에 열광하는 이유들을 나열하자면 수도 없을 것이다. 90년대 일본 SF 애니메이션 특유의 감성도 좋고, 거대 전투병기가 사도와 싸우는 전투씬 장면들도 훌륭하다. 무엇보다도 신세기 에반게리온 속에 담겨 있는 수많은 종교적 상징과 신비로운 설정, 난해한 줄거리에 대한 다양한 해석의 여지는 신세기 에반게리온을 ‘탐구’하게 만드는 가장 큰 이유라고 할 수 있다.


줄거리를 난해하게 만드는 요소 중 등장인물들의 섬세하고 극단적인 감정 변화도 있을 것이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은 ‘이카리 신지’라는 중학생 소년을 중심으로 아스카와 레이까지, 에반게리온 파일럿이자 마음 속에 상처를 가지고 있는 청소년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들은 사도와의 전투에서 팀워크를 발휘하면서 서로 간의 유대감을 높이고, 학교를 같이 다니면서 평범한 삶을 살아가기도 한다. 하지만 타인과의 지속되는 오해와 갈등과 파일럿의 마음 속 상처를 파고드는 사도들의 공격으로 괴로워하기도 한다. 일련의 감정 변화 과정을 지켜보면서 우리는 혼란스러웠던 사춘기 시절, 혹은 현재 우리의 내면을 투영하고 공감할 수 있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사도들과 에반게리온은 ‘AT 필드(Absolute Terror Field)’라는 일종의 방어막을 가지고 있다. AT 필드는 인류의 재래식 무기로는 도저히 뚫을 수 없는 강력한 방벽이며, 작중 다수의 전투에서 위력을 발휘하는 필수 요소이다. 하지만 사실 AT 필드는 단순한 물리적 방벽일 뿐만 아니라, 인간이 자신과 타인을 구별시키는 마음의 울타리이자 ‘자아’이기도 하다.


“릴림도 알고 있겠지, AT 필드는 누구나가 가지고 있는 마음의 벽이라는 것을.” – 나기사 카오루 (TVA 24화)



인간은 본래 타인으로부터 자신의 자아를 유지하려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자아를 유지하면서 자신만의 정체성을 보호할 수 있고, ‘나’를 ‘나’로서 존재할 수 있도록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마음 속에 AT 필드를 둘러 우리만의 자아를 지키며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인간은 혼자서는 너무나 유약하고 불완전하기 때문에, 스스로의 자아만 지키고선 결코 혼자서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이다. 이러한 인간 고유의 결핍을 ‘보완’하기 위해 서로에게 끊임없이 다가가 함께하려 하지만, 각자의 마음 속에 있는 AT 필드 때문에 결국 ‘타인은 결국 타인’이라는 결론에 봉착하는 모순이 발생한다. 결국 역설적이게도 우리 인간은 혼자서 살아갈 수 없지만 타인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도 없는, 슬픈 운명을 가진 존재이다. 추운 겨울 날 모여서 서로의 온기를 공유하고 싶어하지만 바늘 때문에 접근할 수 없어 거리를 두게 되는 고슴도치들처럼 말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타인의 존재를 받아들이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계속해서 AT 필드에 가로막히지만 언젠가 서로를 이해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고. 작중에서 타인과의 정상적인 관계를 형성하지 못했던 이카리 신지는 인간 관계 속에서 상처 입는 걸 극도로 두려워했지만, 결국 마지막 화에서 마음 속 상처와 두려움을 초월하여 사람이 언젠가 서로를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가진다. 물론 그동안 계속 남아있던 수많은 의문점이 해소되지 못한 상태였기에 시청자들에겐 다소 당황스러운 결말이었다. 하지만 갈등과 혐오가 가득한 세상 속에서 서로를 이해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인간 관계의 본질을 느낄 수 있는 결말이기도 하다.



“… 언젠가는 배신하고 나를 외면하고 말아. 하지만 난 한 번 더 만나고 싶다고 생각했어. 그 순간의 마음은 진짜라고 생각하니까.” - 이카리 신지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


타인은 우리를 너무 아프고 힘들게 하는 존재이다. 특히 가장 믿고 의지하던 사람이 주는 상처는 너무나 뼈아프다. 차라리 모든 인간 관계를 끊으면, 심지어 내가 세상에서 없어지면 괜찮아질 것이라는 극단적인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타인으로부터 얻은 상처는 결국 타인에게서 치유되기 마련이다. 가족과 친구, 사랑하는 사람이 함께하기 때문이다. 세상에 믿을 사람은 없다며 AT 필드 속에서 좌절하고 절망하는 우리에게, 신세기 에반게리온은 따뜻한 위로를 건네며 세상에 다시 손을 내미는 용기를 준다.


글 l 곽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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