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다소 비판적인 주제로 쓸 수 있으니, 보는 사람에 따라 냉소적이고 불쾌할 것이다. 요즘 성공팔이가 이미지기 대세인듯하다. 갓생, 라이프해킹, 인생역전과 같은 온갖 화려한 미사여구들로 창궐하는 현대사회이다. 그리고 개인도 쟁취할 수 있다는 믿음마저 위선적으로 언동 하려 드는 소수의 돈벌이 경영인들도 손쉽게 인터넷만 찾으면 알고리즘 상단에 게시될 정도로 흔하고 널렸다. 정보화의 홍수 속에서 부적합한 내용들이나, 현혹될만한 사실들이 심각하게 군중들에게 범용 되어 개인의 특수성보다는 보편적 성공원칙에 기대어서 나 자신과 동일시하는 모습은 성공팔이를 추종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에게 볼 수 있다. 오히려 그들로 하여금 그런 성공팔이를 보고 나서 삶에 대한 고찰이나 노력보다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고통을 망각하기 위해 현재의 단순한 위로, 심적인 안정감을 위해 성공에 대해 잠재적인 희망욕구에만 천착되어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리고 예지적인 순간을 머릿속으로 구상만 하면서 성공팔이 사기꾼들의 강의를 돈 주고 구매하는 사치스러운 소비패턴도 보인다. 돈이 많아서 강의를 구매하는 것이 아니라, 성공팔이를 강의하는 사기꾼에 대한 우상화를 통해 자신의 삶을 성공할 거라고 가정하여 자기 인격을 투사하고자 하는 심리가 나타난다. 그러한 대중들의 심리 양상은 지극히 조남호(스터디, 라이프 강연자)를 비롯한 성공팔이 사기꾼들에게 요긴한 먹잇감이다. 사기란 그저 멍청한 사람을 얼마나 매료시키느냐에 따라 척도가 갈린다. 이제 성공팔이 사기꾼 조남호의 발언에 대해 살펴보자.
일단 성공하고 돈을 많이 벌고 원만한 직업적 성취를 이루려면 즐거움, "쾌" 하나면 해결이 되며 가능하다는 허무맹랑하고 심층적이지도 못한 소리를 내뱉는다. 이런 단편적이고 비상식적인 유형의 강의를 개인당 10만 원씩 받으며 진행한다는 것은 얼마나 한국에 판단력이 결여된 사람들이 난무할 수 있는지 체감이 된다. 물론 반대로 생각해 보면 지나친 입시제도의 경쟁력 하에 수많은 갖가지 공부방법자체가 효력을 상실했을 시에 어떠한 철학적 난제 혹은 고민사안을 토대로 성공방법이 아닌, 성공방법의 인간 본원적 개념에 대한 주제로 넘어가게 되어 "쾌"라는 소재에 설득력을 갖추는 것 같다. 다시 말해 실질적 방법론은 학교, 직장을 비롯한 경쟁이 치열해 짐에 따라 노력보다 재능의 결실이 압도적으로 편승함에 따라 절차적인 관점에서의 "노력형 인간"이라는 것에 회의적 일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노력이나 성공에 대한 실재적인 사안보다는 이상적인 가치에 중점을 두고 해석하다 보니 저렇게 비화된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직업적 즐거움이 무엇일까?
사실 직업은 노동하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인적성이다. 자원이 한정되어 있고 현실에서 적응해야만 하는 인간은 각자 특화된 방식에 맞게 일을 담당하게 됨으로써 역할이 탄생했고 거기서 이해관계가 정형화된 사회를 구축한다면 직업이 되는 것이다. 그러한 직업은 남들이 하는 분야만큼의 가치를 창출해야만 경쟁에서 살아남는다. 혹은 같은 분야라도 내가 더 탁월한 실력으로 직업정신에 쇄신해야 한다. 그러한 직업에 조남호가 말한 "쾌"가 있다면 성공을 기대할 수 있고 살아남는다는 건 인과관계를 아예 무시한 변론이다. 즐거움과 쾌는 인간 본응에서 해소가 된다. 직업이 즐겁다면 노동을 하는데 고통이 없지만 혁신은 보장할 수도 없다. 오히려 고통을 각오해야만 직업에 있어서 발전이 있다. 재미를 추구하려는 욕망은 인간의 놀이 본능 리비도라는 성 에너지에서 발산된다. 이러한 "쾌"라고 불리는 욕망은 한계수요가 분명히 존재한다. 마냥 즐거운 자신의 일이나 직업에서의 재미나 쾌락은 계속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쾌락은 대상에 따라 적응이 된다. 그리고 새롭고 자극적인 또 다른 것에 몰두하다가 쉽게 포기하는 게 인간이다. 그리고 즐거움에 만성적으로 노출되면 편안함과, 쉬운 것만 추구하게 되어 고통감정에 대한 거부반응이 생성된다. 이것은 인간에게 가장 극복하기 힘든 적응성에 해당된다. 장사가 안 망하고 성공하고, 기업에서 살아남고 이러한 것들은 즐거워서 포기를 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포기를 하지 않는 근원적 힘은 즐거움이 아니라 고통이 수반되었기때문이다.역설적으로 인간은 즐거우면 쉽게 포기를 하는 성향이 있음에도 가장 기초적인 과학적인 매커니즘마저 무시해버리고 허술한 내용을 설파하는 조남호를 보고있자니, 너무나도 무지몽매하고 순수해보인다.
행위(노동)나 놀이에서 쾌락을 추구하는 이유는 그런 행동을 반복하고 지속하려는것뿐이다. 그리고 그런 쾌를 추구하는 행동들이 암담하다고 자각하는 원인이 되는 것이라면 결과론적인 불안함, 무력함에서 비롯된다. 결과가 보장되지 못하거나 경쟁에서 밀릴 거라는 생각과 실패에 직면할 때 직업에 대한 "쾌"가 머릿속에 상기되는 것은 뇌과학적으로도 불가능한데도 조남호는 외부의 중압감, 고통 그리고 직업적 즐거움 이 두가지가 공존한다는 이상한 소리를 하는것이다. 인간은 행위에 피력되어있는 위험 혹은 보상이 주어지지않는다고 느낀다면 기존의 그런 행위를 회피하고 다른 행위를 탐닉한다. 예를 들면, 축구가 즐거운데 1년안으로 축구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기하급수적으로 감소한다고 가정해보자. 그래도 감소하기 전까지 축구가 즐거워서 계속할까? 실제로는 아니다. 그에게 축구는 더 이상 보상이 주어지지않기때문이다. 축구라는 행위가 즐거운 이유는 축구를 할수있는 사회적 자원이나 환경이 원만하게 이뤄져있다는 상태로부터 무의식에 영향을 끼친다. 또다른 예를 들어보자, 키가 클 나이의 중학생이 있는데 키크는것에 흥미가 있어서 생활습관(키크기위한 노력들)를 열심히하는데 최근사이 유전자 조작으로 키를 인위적으로 수정할수있거나,또는 다른 사람들도 평균적으로 키가 더 커지고있다거 가정해보자.( 여기서 사실 키라는 신체적 조건은 상대적으로 의식이 되는 경쟁적 자아에 해당된다) 키가 크고싶다는 의도는 타인보다 우월한 신체적 능력을 가진다는 조건이 필수적이다. 그리고 그러한 "쾌"는 "생활습관개선"이라는 노력행위에 피력되었다. 그렇게 해서 노력하려고 했지만 결국은 자신이 추구하던 쾌라는 목적에 방해만 되었기에 의욕은 당연히 상실한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조남호는 포기의 미학을 모르는 것 같다. 끝까지 잡고 있거나 인내력이나 쾌로는 성취하기가 매우 벅차다. 도전과 혁신은 무언가를 포기했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다. 어쩌면 파괴의 역설이기도 하다. 한 개인이 모든 것은 짊어질 수는 없다. 얼마나 효율적으로 노력을 재활성화했느냐가 중요한 축을 결정짓는다. 그리고 이러한 것을 포섭하는 상위가치는 당연히 "재능"이 자리매김한다. 끝까지 강연 내내 상투적인 문장으로만 진행하는 건 우스꽝스럽다.그냥 아름다워보이는 단어를 2개씩 끼워맞추는 유치원 6살배기 어린아이들이 더 신빙성이 있을거같다. 연설내내 모든 복합적인 중요한 소재들을 축약시키거나 심지어 곡해시키기도한다. 그리고 매우 간단한 소절로 사람들한테 명료하게 어떠한 내용들을 던지면서 "열심히해라""즐거움" 이런것들을 연신 반복하고있다. 듣는사람도 오죽한데 내가 저런 내용을 누가 시켜서 말하게 되더라도 지쳐서 쓰러질것만 같다.
AI 인공지능이 도래해서 직업이 걱정인데 나 자신의 창의성이 있으면 해걸된다는 소리를 마지막에 덧붙이는 조만호이다. 창의성을 그저 그럴듯하게 쉽게 내뱉을말도 아니다. 모든 경험이나 자료, 정보들을 주의깊게 분석하고 조합해서 독특한 결과물을 창조하고 나아가 사람들의 선호도에도 환원해야 가능한것이 "창의력"이다. 대다수에게응 수십년 넘는 엄청난 세월이나 시간을 할애야할지도 모르는 "창의성"은 그렇게 수월한것은 절대아니다.
이 외에 더 이상은 지적할 필요도 없는거같다. 조남호는 구체적으로 주장을 세분화시키거나 언변이 출중하지도 못해서 그의 단순하고 표층적인 내용으로는 너무 많은 변수가 혼선되어있기때문이다.
그래서 결국 사기꾼 조남호에게 쏟아진 비난들이 많이 생겼다. 막되먹었다며 욕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물론 성공에 대한 진실된 강연으로 돈을 버는것은 이해한다. 그러나 같은 구절이나 단어만 연결시켜서 어떠한 원칙이나 형식도없이 강단에서 아무런 잡담이나 늘어놓는것은 강연도 아니도 대화도 아니며, 골목길 폰가게 판매원 조차도 그런식으로 손님에게 홍보 안할거같은 실력도없는 언변이다.
비판은 의심이 지나치거나 편향될경우에 발생하는것이다. 태초부터 본인에 대한 의구심이었다면 질문형식으로 정중하게 사람들이 물어봤을것이다. 이미 조남호의 행보는 그전부터 확정지어졌었고 매우 왕성한 활동을 해왔던것에 의한 이미지이다. 그러한 이미지는 조남호 본인이 강연을 하면수 스스로 창발한것이다. 그리고 그런 이미지를 "이미지화"로써 색채를 입히는것은 본인을 보고 자유롭게 비판하는 사람들의 당연한 몫인데도 조남호는 한국 문화가 잘못되었다며 호도하는건 더더욱 이해가 안된다. 한국 문화가 아니라 집단과 개인의 심리적 관계질서일뿐이다. 막연히 자신이 스스로 언동한것에 대해 사람들의 "평가"라는 책임이 뒤따를 뿐이며 이를 겸허하게 인정할수있는 태도를 조남호 본인이 가져야할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사람들의 평가를 매도라고 폄훼하려고 고작 저런 영상에 출연해서 변명하는것으로는 자기 스스로도 기분이 상했던것이다. 그러나 최근사이 조남호의 터무늬없는 강연을 듣는 사람들은 줄었다. 왜냐면 그의 강연을 소비하는 주류 계층들은 수험생 자식을 둔 학부모가 전부였기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주타겟을 학부모로 삼아서 마케팅 전략을 구사했다. 하지만 최근에 입시 정책 변동으로인해 게다가 향후의 저출산을 총체적으로 고려한다면 2010년대 풍미했던 서커스 연설가라는 칭호를 부착하고 뒤안길로 사라질게 뻔하다. 결국 조남호의 등짝에 찬란하게 보여줬던 종이 날개는 예기치못한 불씨 하나만으로 검게 그을려서 타들어간채 흔적도 없어지는 중이다. 안타깝지만 그래도 지금같은 어려운시기에 최악의 상황만 모면하기를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