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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Zeugitai Apr 16. 2023

솔직함이 무모해질 때

 "거짓말 없는 세상"이라는 영화를 보고

인간은 진실만을 추구한다고는 익히 알고 있다. 오랜 역사나 세월 동안 실증적 가치를 중시해 왔던 만큼 자연에서든 사회에서든 생존할 수 있는 지평이 되어준다. 그러나 내가 진실을 추구하더라도 타인에게 진실됨을 요구하는 것과는 매우 다르다. 타인에게 진실됨을 요구하는 것은 사실 관계에 암묵적으로 제시된 규범이다. 알면서도 모른다고 가정하고 행동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는 건 "보편적 선의"로써 잠재적 구실을 마련해 둔다. 그리고 실질적으로 거짓의 역할은 한 개인과 외재적 세계 간의 비일관성을 토대로 작동한다. 근본적 이유는, 주체가 객체를 인지하기 위해서는 나라는 주체로부터 매개하기 때문에 접근할 수 없는 "불가입성"이다. 그래서 타인의 내면은 오직 관찰되는, 또는 행동으로 옮겨지는 동적인 발현이 있어야만 반추적으로 타인의 의도가 어떤지를 해석하는 것이다. 왜냐면 욕망은 모두가 탐닉하고 있다는 사실은 "나"라는 존재가 안다는 건 이미 인간으로 파악되는 타인에게도 욕망이 내재되었다는 것으로써 명명하게 되어, 사실적 범위에서만큼은 충분히 정당한 자격이 부여된다는 걸 피상적으로 담지한다.  그러나 진실이나 욕망은 역설적이게도 그것이 솔직한 만큼 사회에 겉으로 표출되는 것은 완강하게 배척하려는 분위기를 야기한다. 왜냐하면 자신의 추악한 부분의 내면이나 깊숙한 욕망을 잘 알고 있다는 것으로 그것이 바로 "진실"이라고 파악된 이상, 그런 원초적인 진실이 관철되는 것에 위화감을 느낀다. 즉, 나로 하여금 수치스러운 근원적 내면이나 욕망은, 타인 또한 그것이 있다고 생각되는 순간에, 그것은 반대급부의 개념으로 형성된다. 바로 일탈 행위나 반인간적 행동으로 보여진다. 욕망이 부끄럽다는 인식은 학습효과로도 각인되지만 진화론적인 회피본능도 작용한다. 전전두엽이 발달하면서 욕망을 지성으로 표출해야한다는걸 인간이 깨닿게되면서 정서적 관계라는 상위 구조하에 내면과 욕망은 지극히 "개인적인 발산과 해소"로 탈바꿈되었다. 그리고 사회가 생기면서 공적인 영역과 사적인 영역이 분리됨으로써 정형화되었다. 그리고 프라이버시, 개인정보, 개인주의 와 같은 사적인 소유권을 넘어서는 인간실현의 기초아래 더 이상 생소할것도 없는 내면을 솔직히 표방하는것이 진정한 행복추구라는 사상도 오늘날에 등장한다.

그리고 사적인 부분과 공적인 영역을 교류할수있는 유일한 소통망은 가족이다. 외부세계에 직업이나 직책으로 환원된 구성원들이 일이나 학업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면 담소를 나누고 있었던 일들을 식사자리에 올림으로써 가치관은 증축된다.

그렇다면 흔히 알고있는 규칙, 원리, 사회체계는 거짓말이라고 할수있을까?



일단 거짓말이 무엇인지부터, 아니 어떤 기능을 하느냐에 본질을 분석해보자.

거짓말은 목적을 함축하는 의도이다. 그리고 인간의 생각, 심리구조에 어떤 반응을 하느냐에따라 그러한 거짓말은 전략적 모형이 조금 더 정교하고 세분화된다. 일반적으로 무언가를 지칭하는 단어나 소통또한 거짓말이다.  반대로말하면 절대순수성은 존재하지않기때문에 발생하는 하나의 사회 현상이다.

특히 철학자 들뢰즈는 모든것이 오염된 개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인간은 유일한 순수성은 자연에사 태어나는 순간의 육체로 느끼는 감각 뿐이라고말한다.  

그러한 모든 순수성은 인간의 언어로 번역되고 응용된다. 그러나 인간마다 생각은 모두 다르다. 이러한 생각의 차등적 관계를 조정하기위해서 "거짓"을 사용한다.(여기서 거짓은 인간으로써 탄생한 과학이나 조직적으로 배열된 수사학을 의미하는게 아니라 언어나  무작위로 생겨난 원시 규범 과 같은 정념론적인 차원에서의 "거짓"이다)

이러한 거짓은 끊임없이 서로다른 각축을 겨누는 오합지졸 각자만의 생각들을 획일화시키기위해서 "꾸며내기"를 필요로한다. 그것이 규율이나 예의범절과 같은 상례적인 가치들이다. 이러한 규범은 개인의 생각을 선험적으로 매듭짓는 거시적인 역할을 한다. 그리고 개인이 살면서 도덕이나 양심을 판단할 기회를 상실한채 교육을 통해 개인의 생각인거처럼 할당된다. 마치 자신이 처음부터 규범을 추구해왔거나 사회의 거짓(규범)이 내가 "원했어야만했던 진실"로 착각한다.

그래서 규범이나 사회체계란, 내면을 반영하는것이 아니라 욕구를 적절하게 표출할수있는 방법론적 거짓이어야만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래서 개인이 진실인만큼 외부는 거짓의 특성을 띄는건 필연적으로 반비례한다. 인간이 어떤 방식으로 내면이나 욕망을 숨기고싶어하느냐는 곧 규범을 측량해주는 기준점이 된다. 그걸 서로가 파악하는 즉시, 산정된다.

나폴레옹의 명언이 생각난다. 역사는 거짓의 집합이다.

그렇다, 진실은 달콤하지만 공허한 주체적 연민이다. 진실이란 사유할수있지만 모두가 재고할수는 없는법이다.



그래서 밑에 사진도 나오다시피 거짓말 없는 세상이라는 영화를 봤다.

이 영화는 세상 사람 모두가 유전적으로 거짓말을 못한다고 가정한 후에 거짓말하는 유전자로 변이된 주인공으로 구성이 되는 내용이다. 현실과달리 저기서는 진실로 대화하머 모든 관계교류 자체는 진솔함이다. 현실에서 거짓말이 어떻게 범용되고있는지를 영화에 거짓말이라는 소재를 "희소한 개인의 능력"으로 설정함으로써 매우 신박하고 흥미로운 장면들이 이어진다. 정확히 보자면, 거짓말보다는 영화에서 나타나는 진실의 효력으로 존속되는 사회임에도 그런 체계를 철저히 붕괴시키는 "거짓"은 개개인들에게는 행복을 가져다주고 사람들이 주인공으로 인해 기뻐하는 모습이 영화에 자주 등장한다.

그러나 이 영화는 단순히 거짓을 '거짓"이라고 직유해놓은 의미가 아니다. 거짓이 유발하는 효과는 "타인을 행복하게 해주는것, 원하는걸 이루게하는 힘"을 상징하고있다는게 맹점이다. 한마디로, 영화에서나오는 거짓은,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이 진정하게 원하는 내면과 욕구를 대변해주는 역할을한다.

죽음을 앞둔다면 천국이 있다는 거짓말을, 식탁위에 올라온 맛없는 음식임에도 가족의 요리에 정성과 수고로움을 격려하게위헤 거짓말을 하고, 자살을 하려는 동료를 위해 심히 과장되더라도 잘될거라는 거짓말을한다. 그러한 모든건 영화가 아닌 현실에서만큼은 오히려 진실이 그런 역할들을 수행한다.

그래서 난 이렇게 생각한다. 진실은 참이 아니라 "인간 본연의 당위성"이라고.

그리고 거짓만큼 진실이라고 공언할수있는건 더욱이나 없을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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