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과 차별
항상 다른모습과 성격으로 살아가는 인간으로써는 지극히 상호보완적이다. 나의 부족함을 타인이 충족할수있고 타인의 요구조건은 나에게 있어서 역할이 된다. 그리고 개인은 직업을 가지며 책임감을 학습해온다. 여기서 계급은 점차 모습을 드러내며 각자의 생존권을 정당화한다.이것은 노골적으로 "자기자신에게 충실함"이라는 문장으로 산출되며 삶이라는 맥락으로도 해석이 되어왔다. 서로 가지고 있지않은 재화, 자원, 물질들을 각각의 특수해진 개인들이 부여받음으로써 독점이 가능해진다. 비슷한 역할을 하는 구성원글이 결집한 후에 계급은 이미 정해진다. 그리고 각자가 창출해내는 기술이나 가치들이 얼마나 희소한지,절실한것인지에 따라 추상적인 척도를 매기고 거기에 "신성함"이라는 암묵적인 의미또한 담고있다.
이것은 소스타인 베블런이 비평해왔던 노동철학이랑 관계가 깊다. 노동철학은 개인의 근면성실, 정직함, 헌신, 도전정신, 과 같은 도덕적 요소들은 모두 경제적 개념으로 환산되어 다음과 같다.
돈 벌기위한 근면성실,
성과주의에 대한 정직함,
직장이나 집단을 위한 헌신,
그리고 투자. 라는 뜻으로 바꿀수있다.
모든 계급에는 차별을 동반하지만 당연시되어온 나름의 이유들이 계급마다 존재한다.
상업무역을 하여 부자가 된 계층에겐 급변하는 시장 경제에서 살아남기위해 여러 도시들을 활보하며 시세맞추기위해 발벗고 나선만큼 힘들었다고,
기업으로 성공한 자본가 계급에게는 남들이 나설수없는 분야에 획기적인 발상과 소비자들의 선호도에 맞추기위해 수많은 난제들에 직면했고 리스크를 감수해야만했다고,
그리고 연예계로 성공한 사람들에게는 자신들이 아무리 편하게 돈버는것처럼 비춰져도 모든 사회적 시선들을 관용적으로 대처하는데 있어서 정신적 스트레스를 극복해야만하는 고통스러운 과정이 있었다고 모든 계층들은 각자의 입으로 말할수있다.
결국 상류층들은 경쟁에서 승리하기위한 갖가지 노력들은 막중한 위험부담에 기초하지만 도전하지않은 중산층, 빈곤층의 사람들은 결과를 얻어내지못했기에 그들은 계급적 차별을 주도하는 자신들에게 비난할 자격조차 없다는 식으로 본다는것이다.
하지만 성공하기위한 노력에 기회비용이 컸다는건 막연히 고통을 상정하지는 않는다.
그저 결과가 실패할수있는 확률이다. 그저 노력의 총량은 절대적이다. 평범한일이든 단순 노동이든 원대한 일이든 개인의 기준에서는 그 두가지중 하나를 선택한 후에 과정이 펼쳐질뿐이다. 단순 노동은 그것대로 또 힘들다. 성공의 가역적 범위가 클수록 노력에 따르는 고통을 우선적으로 과대평가한다. 그러한 고통은 삶의 지혜가 아니라 자신의 계급적 이익과 차별을 정당화시킬수있는 일종의 성역화가 진행된다.
경영인의 삶을 옹호하는 이유도 그런 원리다. 경영인은 엄청난 사업자금의 부담을 가지고 회사를 창업하여 적자를 회복해야만하는 환경에서 대부분 시작한다. 그러나 위험을 감수한 노력으로 얻은 결과값은 개인 삶에 대한 자긍심과 고양심에만 머물러야하지만, 많은 사람이 위험을 피하고 평범한 삶을 사는것 자체를 과소평가하여, 모든 자아실현의 철학적 토대는 마치 성공한 사람들이 발설하고 신뢰받을수있는 전문성으로 둔갑한다. 이러한 전문성은 동기부여라는 내용으로 알려지게되고 개인이 성공하지못한 이유를 평범한 각 개인이 논변하더라도 하찮은듯이 그들은 묵과할수있다. 왜냐면, 그들이 믿는 계급적 차별은 자기네들같은 누군가가 엄청난 위험에 도전하면서 성공하는 과정중에 위험을 회피하는 대다수의 계층들은 마치 방만함을 자발적으로 선택했다는식으로 본다. 개개인들의 태도를 단초삼아서 거시적인 체계를 식민지화 한것이나 다름없다.
그저 사회적 도전이 예외적인 사안일뿐이다.
결과란 노력이나 능력의 전유물이 아니다. 발생해버린 하나의 현상일뿐이다. 그리고 자신은 그저 현상에 매우 적절한 행위를 해왔던것이다. 그러한 가치들은 자신이 만든 피동적이고 인위적인 느낌을 심어주지만 사실 자신에게 "의지"라는것이 만족되어질수있었던 계기의 연속성이다. 그것이 바로 과거부터 현재를 일컫는 감관이다. 이러한 점층적 양상은 미래를 "비교적 당연해진 느낌" 즉, 미시감으로 예측할수있다. 여기서 미시감이란 후험적인 안목과 얼핏 비슷해보일수있지만 매우 다르며 결정적인 차이는 개별적 경험들의 특색과는 무관하게 "자아"가 미래에 상황이든 방식으로든 어떻게든 총 망라하여 자신과 자신의 의식이 "현존"하려는 경향성을 띄고있다는것이다. 한마디로 모르고 불확정적인 미래가 아니라, 불확정성 그 자체가 규칙이고 절차이다. 그래서 각자 개인은 시간을 통과할 뿐, 의식이 반복되기에 어디든 존재한다. 현재를 아무리 생동적으로 예의주시해도 매번 과거로 밀려나고 천착되고 새로운 시간을 연속적으로 맞이하기에 어떤 의식상태든 결코 자신을 완벽하게 대표할수없으며 통합되지도 않는다. 이미 시간은 지나갔지만 과거의 경험을 되새겨보면 단순히 기억속이 아니라 현존한다는 의식이 분명이 있었다는 느낌을 확연히 받을수있다. 그래, 명제는 여기로부터 기인한다. 즉, 과거에 나 자신또한 의식하는 자아를 "지극히 현재적"(이건 단순히 과거를 회고하면서 느끼는게 아니라 형이상학적 내면이 "지금 이 순간"으로 움직인다)으로 생성한다. 이러한건 하이데거의 철학이 잘 설명해준다. 현재라는건 모든 가치를 통틀어서 유일하게 특정할수없으며 준거할수도없는 개념이다.
그럼 자유를 나눌수는 없을까?
개인적으로 나눌수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해관계에 따라 관철될수는있다.
라고 여기에 대한 물음에 난 이렇게 말해본다.
왜냐면 자유는 담론일뿐이다. 그리고 그걸 통해 각자 서로다른 개인이 무엇을할지 궁극적인 삶의 욕망을 표출할수있는 목표을 사화적으로 다양하게 얻어내는것이다.
가장 추상적이고 이상적인 상위가치라는 자유라는 미명아래, 하위의 세부 옵션으로 변경한다면 "○○(각자의 목표)할 자유" 라는 구호로 내세울수있다. 그러나 이런 형태에서 은폐되는 사실이 있다. 내가 추구하는 만큼 무언가 혹은 부류를 배척으로써 지양해야한다는 것이다. 즉, 자신이 누리는 자유는 최대효용이지만 그 최대효용을 위해서 누군가가 양보를 해야한다. 그리고 그러한 공리주의적 토대안에서는 소수인들은 항상 존재한다. 그런 소수인들은 다수의 위력앞에 인간적 희생은 불가피해지며 억압받는다. 그러나 요즘은 과거처럼 시대가 획일적이지않기에 이해관계나 계급투쟁에서 벗어날수있는 수단은 생겨났다. 그래도 과거에비해 다의적인 현대사회라지만, 개인의 관점만큼은 아직 다양성 보다는 보편성에 초점을 맞춘다. 다르다는것 자체에 인식론적 불쾌감은 항상 내재되있는것이 인간의 근저에 깔린 본능이다. 원시인류에서 나 자신과 다르다면 상대편으로 간주해서 자신의 무리나 집단을 보호해야했기때문이다. 그런 인간 본원적 가치는 오늘날 편견으로 남아있다. 그러나 이건 교육으로 극복가능하다. 자연 본능을 개진할수있는 효과적인것은 사회적 슬로건이나 분위기를 의미기억으로써 모방하는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편견을 가진 교육 엘리트 계층들은 교육 자체를 더 굳혀진 편견으로 가르치려는 모양이다.교육에는 지혜나 진실보다는 정답만을 요구하는것에 좀더 치우쳐있다. 그리고 나아가 돈 뿐만 아니라 인간에게도 값어치가 매겨진다. 얼마나 똑똑한지, 학력, 개인적 환경 등. 인간을 평가하는 잣대또한 물질적으로 변해간다. 마치 자본주의가 공공재를 흡수해나가는 200년전의 단계를 밟는것같다.
"개인의 욕망은 철저히 제한되는만큼 진정 개인들은 다수의 욕망이 되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