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눈물 날 것 같아…”

사랑에 빠진 도시, 베를린에서의 첫날밤

by DIA

다시 혼자가 되면서 호스텔까지 어떻게 가야 할지 막막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까지 살아서 온 내가 기특했고 곧 테크노를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설렜다. 홀로 걸어가면서 가장 걱정스러웠던 건 소매치기였다.

유럽에 도착하기 전부터 소매치기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들어서 무서웠고 그 순간 내가 택한 방법은 고개를 쳐든채 당당하고 빠르게 걷기였다. (당당해 보이면 얕보지 않을 것 같았다...) 무거운 캐리어를 끌고 구글맵에 의존한 채, 종종걸음으로 호스텔을 향해 달렸다. 쉴 틈 없이 달려 도착한 호스텔에서 가쁜 숨을 내쉬며 체크인을 했다.


“허억, 허억.... 안녕 내 친구가 이미 체크인을 했거든.."

"안녕! 친구 이름이 뭐니?"

“테크노야”

“그럼 너의 이름은?”


땀을 뻘뻘 흘리며 어색한 영어로 체크인을 하던 중, 테크노가 등장했다. 그 순간 마치 테크노에게 후광이 비치는 느낌이었다. 나는 6인 혼성 호스텔에 머무르게 되었다. 걱정했던 것과 달리 생각보다 조용하고 쾌적해서 놀랐으며, 아무도 없는 시간대라 그런지 첫인상이 아주 좋았다. 신속하게 짐을 풀고 나갈 채비를 마친 뒤,

테크노와 함께 이스트사이드 갤러리로 향했다. 장거리 비행 끝에 도착한 터라 여전히 꾀죄죄한 꼴이었지만 각성이 됐는지 피곤하지 않았다.

기차를 타기 전에 마트에 들러, 신중하게 납작 복숭아 2개를 고르고 떡진 머리를 조금이라도 감추고자 드라이 샴푸를 하나 샀다.

교과서에서나 보던…베를린 장벽에 가다!

이스트사이드 갤러리에 도착해 긴 담장을 옆으로 걸으며, 교과서에서 본 걸 실제로 본다는 사실에 흥분되기 시작했다. '내가 이걸 보다니.. 내가 베를린에 있다니 ‘ 그 순간 나는 베를린에 왔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완벽한 날씨 아래 길게 뻗은 콘크리트 담장, 위에 그려진 이색적인 그림들 모두 매력적이게 느껴졌다.


한참 넋을 놓고 구경하다 보니 담장 뒤로 호수가 펼쳐졌다. 그 호수 앞에는 작은 펍이 하나 있었는데,

그곳에서 레몬 맥주 하나를 하나 사서 테크노와 함께 호수 앞에 걸터앉았다


"너무 여유롭다. 나 눈물 날 것 같아 “

“울면 안 된다ㅋㅋㅋㅋㅋㅋㅋ”

“나 되게 힘들었거든 근데 이렇게 유럽에 오니까 기분이 너무 이상해..”

“잘 왔어 진짜”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근 1년간 느껴보지 못했던 안정감을 머나먼 나라에서 느끼다니 참 이상한 일이었다. 테크노는 2주 전부터 스페인에서 여행했는데, 이전에 있었던 에피소드를 들으며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한참을 이야기했다. 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 우리는 굶주린 사자들마냥 주변 피자집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우리는 피자집에 들어가 루꼴라 잠봉 피자를 하나 시킨 뒤에 그 집 화장실에서 야무지게 납작 복숭아를 씻어서 봉투에 넣고, 주문한 피자를 챙겨 나왔다.

그런데, 강가로 향하던 중 맥주 가게가 눈에 띄었다. 예전부터 친언니에게 독일 맥주가 맛있다는 이야기를 귀에 딱지가 붙도록 들어서인지 가게를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그래 피자랑 맥주 조합은 못 참지..’

불과 한 시간 전에 레몬 맥주를 한 병 들이켜기는 했지만, 그 가게가 내 눈에 띈 이상 맥주를 마시라는 신의 계시라고 생각했다. 가게에 들어서자마자 양쪽 벽에 다양한 종류의 맥주가 빼곡히 들어있는 걸 보고 신선한 충격을 느꼈다. 마치 맥주계의 도서관 같은 느낌이었달까 나는 한국에서도 소주만 마시는 강경 소주파라 맥주에 대해선 무지했기에 급하게 언니에게 SOS를 쳤다.

답장을 기다리는 동안, 가게를 구경하던 내 옆으로 베를리너 언니가 나타났다. 그녀는 신기하게 생긴 맥주 한 병을 집어 갔는데,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나도 호기심에 이끌려 같은 맥주를 집었다. (병이 예쁘게 생겼지만 딱히 맛있지는 않았다….)

한 손에는 맥주, 한 손에는 피자를 손에 쥔 채 강가로 향했다. 우리는 낮은 담장을 넘어 강가 앞으로 기어들어 갔고 해 지는 노을을 바라보며 피자를 먹었다. 베를린에서의 완벽한 저녁이었다…. 그날의 온도, 습도, 분위기는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베를린에 왔으면 클럽에는 가 봐야지!


“아 맞다 외국인 친구가 오늘같이 클럽 가자고 했는데.”

“뭐 위험하거나 그렇지는 않은가? 분위기가 어때”

“생각보다 남들한테 신경을 전혀 안 쓰긴 해, 진짜 자기들끼리 놀러 온 느낌이야.”

“쉽지 않을 것 같긴 한데..”

“근데 내일 일정도 있으니까 가더라도 오래 있지는 않을걸? 한 번 생각해 봐”

“음…. 한 번…. 가보지 뭐…!”


‘에라 모르겠다.. 이때 아니면 또 언제 가보겠어.’ 그렇게 나는 테크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생전 클럽 주변도 가본 적 없는데, 인생 첫 클럽이 베를린 클럽이라니... LV. 1짜리 조무래기가 보스를 상대하는 기분이었다.

우리가 오늘 가게 될 클럽은 트레져(Tresor)라는 곳으로 다른 클럽과 비교해 상대적으로 무난한 편에 속한다고 한다. 우리는 클럽에 가기 전에 옷을 갈아입기 위해 호스텔로 돌아갔다. 내 기준(?) 섹시한 옷 두 벌을 주섬주섬 챙겨 입고선 거울에 비친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너무 헐벗은 거 아닌가….’ ‘K-유교걸’로서 과한 거 아닌지 걱정하며 테크노에 물었다. “어때? 이렇게 입고 가려고”

테크노는 아무 말 없이 뒤가 시원하게 파인 검정 상의를 건넸다. “이거 한번 입어봐”

테크노의 의견을 받들어 옷을 갈아입었다. 전보다 더욱 과감한 노출이었지만 상·하의가 찰떡으로 어울리는 것을 보며 ‘역시…. 남달라….’라고 생각했다. “거기 가보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야.” 지금 입은 옷도 충분한 것 같은데 다들 어떻게 입으면 이게 아무것도 아닌 걸까. '다들 빤스만 입고 가는 건가.' 점점 클럽이란 곳이 어떤 곳인지 궁금해졌다.



모든 준비를 마친 후, 우리는 클럽에 함께 갈 친구들과 접선하려 역으로 향했다. (아무래도 여자 두 명만이 가기엔 위험 부담이 있어서 테크노가 미리 동행자들을 구했었다) 추위에 떨면서 기다리던 도중, 멀리서 외국인 남자애가 걸어왔다. “혹시 쟤 아니야?” 테크노에 물었다. “오 맞아 안녕” 테크노와 외국인 친구의 인사를 시작으로... 1차 영어 듣기 평가가 시작됐다.


“안녕 난 이반이야 반가워”

“안녕 난 디아야..ㅎ 반가워” (디아는 내 영어 이름이다.)


이반은 우리처럼 유럽으로 여행을 온 미국인 친구였다. 이반의 첫인상은 무뚝뚝해 보였는데, 표정 변화가 거의 없어서 영어가 부족한 나로서는 대화하기가 더욱 어려웠다. 결국 나는 테크노와 이반의 대화에 어색하게 몇 마디 덧붙이다가 다른 친구들이 일찍 도착하길 기도했다. 그렇게 1년 같은 1시간이 시간이 지난 뒤, 늦게 도착한 나머지 친구들과 함께 클럽으로 향했다. 그 친구들은 우리보다 어렸는데, 그중 한 명은 얼굴에 장난기가 가득한 20살의 남자친구였다.


“전공이 뭐야?”

“나 연기 전공하고 있어”

“오 그럼 k-스타 되는 거야? ㅋㅋㅋ”

“뭐 비슷하지ㅋㅋㅋㅋ”


장난스러운 말투로 질문폭격을 해주던 친구 덕분에 어색한 분위기가 풀렸고, 나도 점차 편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그는 IT를 전공하면서 일을 병행하는 학생이었는데, 나와는 완전히 다른 세계를 사는 친구의 이야기가 매우 흥미로웠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보니 금세 클럽에 도착했다. 클럽에는 줄이 길게 서 있었고 테크노가 말한 대로 과감한 옷을 입은 사람들이 많았다. ‘다들.., 클럽에 엄청나게 진심이다...’

함께 모여서 들어가기를 기다리는데, 제2차 영어 듣기 평가가 시작됐다. 늦은 시간에 지쳐있던 나는 어느 순간 알아듣기를 포기하고 그냥 웃는 얼굴로 ‘오 진짜?’만 반복했다. 그렇게 입에 경련이 올때쯤 한 아저씨가 다가와 테크노에게 반갑게 인사했다. “오 테크노~ 안녕!” 고수 같은 느낌이 폴폴 나는 아저씨를 바라보며, 벌써 테크노가 베를린 클럽 사장님이랑 친해졌다고 단단히 착각했고, 그녀의 친화력에 남몰래 감탄했다. (한참 후에 알게 된 사실은, 그냥 클럽 좋아하는 분이었고, 테크노와는 전날 클럽에서 만난 사람이었다)

한참을 기다려 들어가게 되었는데, 클럽 안은 정말 문화 충격이었다. 강렬한 담배 연기 냄새와 앞이 안 보일 정도로 가득 찬 스모그, 번쩍거리는 조명... 모든 것이 날 것 그 자체였다. 그 순간 나는 테크노의 반응을 살폈다. EDM을 사랑하는 그녀인데도, 베를린의 클럽은 쉽지 않은 듯 당황스러워했다.


“여기 너무 재미없죠~ 잠깐 나갈래요?”

“ㅋㅋㅋㅋㅋㅋㅋ”


어차피 들어온 거, 조금은 즐겨보자는 생각으로 구석구석 둘러보다가 1층에 메인 스테이지로 돌아갔다. 다행히도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클럽 내부에서 사람들 간의 터치는 일절 없었고, 모두 자유롭게 춤을 추면서 자유분방하게 노는 분위기였다. “한 30분만 더 있다 나가자” 새벽 2시에 나가기로 테크노와 합의를 한 뒤 남은 시간 동안 정신을 놓고 미친 듯이 춤을 췄다.

시간이 흘러 함께 온 친구들과도 점차 뿔뿔이 흩어졌고, 나와 테크노 그리고 클럽 아저씨만 남게 되었다. 테크노는 클럽 아저씨에게 “우린 이제 나가려고!”라며 얘기했다. 그러자 아저씨는 자기도 나가겠다며 함께 밖으로 나갔다.

새벽 두 시가 돼서 밖으로 나왔을 때 줄은 이전보다. 끝도 없이 길게 뻗어 있었다. “와 이렇게 기다리고 들어갔으면 화났겠는데….” 테크노가 질려버린 듯이 말했다. 우리는 호스텔로 돌아가기 위해 버스 정류장으로 향해 걸어갔다. 버스 정류장 맞은편에는 케밥 집이 있었는데, 사람들이 모여 케밥을 들고 허겁지겁 먹는 걸 보며 마치 우리나라의 24시간 국밥집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어느 나라든 클럽 앞에 24시간 음식점 있는 건 비슷하네...’

“여기가 첫 클럽이라고 했었나?” 클럽 아저씨가 궁금한 듯 물었다. “응ㅋㅋㅋㅋ 근데 좀 쉽지 않네..” 나는 지친 목소리로 답했다. “오늘은 그냥 잊어버려... 여기 스타일이 어둡고 별로더라 다른 데로 꼭 가봐” 그 순간부터 클럽 아저씨는 신난 목소리로 유럽에서 좋은 클럽들을 추천했고 우리는 함께 이야기하며 재미난 시간을 보냈다.

버스가 도착하자 클럽 아저씨는 “나는 숙소까지 걸어갈 거야! 조심히 들어가~”라고 얘기하며 쿨 하게 인사했다. 알고 보니 우리끼리만 있으면 위험할까 봐 함께 기다려 줬던 것이다. 우리는 클럽 아저씨의 배려에 감동하며 짧은 인사를 나눈 뒤 버스에 탔다.

호스텔 앞까지 가는 버스가 끊겨서 우리는 중간 정류장에 내려 걸어가야 했다. 밤늦은 시간이라 걷기에는 위험하다고 판단했고 우리는 근처에 있는 전동 킥보드를 타기로 했다. 새벽 공기를 마시며 거리를 빠르게 지나치니, 마치 이곳이 내 동네인 마냥 편하고 자유로운 느낌이 들었다.


한참을 달려 숙소에 도착했고, 방으로 들어가자, 모두가 잠든 듯 깜깜했다. 혹여 누가 깨어날까 봐 조마조마한 심장을 붙잡은 채로 빠르게 잘 준비를 마쳤다. 침대로 들어가 커튼을 치자 나만의 조그마한 공간이 생겼다. 그때야 긴장이 풀린 듯이 졸음이 쏟아졌고 내일의 여행을 기대하며 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