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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지호 Mar 14. 2023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재난 트릴로지" 최종장.

<스즈메의 문단속> 영화 리뷰.


재앙(災殃)은 피해 갈 수 없다. 그렇기에 재앙이라 불린다. 때론 재앙이 인간의 손에서 야기되기도 하지만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재앙도 존재한다. 우리는 이러한 재앙을 자연재해(自然災害) 라 부르며, 천재지변(天災地變)이라고도 한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의 의미인 "일이 잘못된 뒤에는 손을 써도 소용이 없다"라는 오랜 속담이 오늘날까지도 "안전불감증"이라는 유사한 말로 몇 년간 우리를 괴롭혀 오고 있으나, 어찌 보면 이는 재앙과 재난 앞에서 무력해지는 인간의 모습과 삶이 덧없음을 나타내는 격언일지도 모른다. 그러한 재앙이 우리를 스쳐 지나가고 나서야 우리는 다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염원하며 끔찍한 인명피해가 발생하지 않기 위해 조치를 취하지만 이미 소는 외양간을 떠나고 난 뒤. 우리의 머리와 가슴속에 남아있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생기고 나서야 우리는 이것이 재앙임을 깨닫게 된다.




1.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신작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작품 <스즈메의 문단속>은 이러한 재난을 맞이하는 인간의 초연한 모습에 대해 다루고 있다. <스즈메의 문단속>은 영화 <너의 이름은>으로 국내에서 명성을 날리게 된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신작이며, 국내에서는 3월 8일 정식 개봉 한 바 있다. 사실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작품들은 대거 비슷한 서사의 양식을 띄고 있어 패턴화 시키는 게 가능할 정도다. 초자연적 현상을 맞이하는 주인공, 젊은 청춘의 사랑, 게다가 <너의 이름은>부터 시작되어 <날씨의 아이>, <스즈메의 문단속>으로 이어지는 재난과 인간의 관계를 다룬 서사가 세 번 연속 이어지는 것을 보고 나는 과감히 이 세 영화를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재난 트릴로지"라고 말하고 싶다. 다만 세 작품은 서사는 유사하나 명확한 차이점이 존재하고 이 차이점이 세 영화의 가장 큰 핵심 주제라고 생각되는데, 그것은 각 영화의 등장인물들이 사회와 개인의 관계에 대해 바라보는 시선이다.


<너의 이름은>은 국내외로 많은 사랑을 받은 바 있고 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신카이 마코토의 대표 작품으로 길이 기억될 것이다. 그러나 <너의 이름은>이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첫 번째 작품이 아닐뿐더러 이미 그는 앞서 많은 영화들을 제작한 바 있다. 해당 작품이 대중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을 수 있던 것은 역시 대중성이 가장 뛰어났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고향과 성별이 다른 학생이 서로 몸이 바뀌어 생활하게 되는 소위 발칙한 상상력에서부터 출발하는 영화는 너무 극단적인 판타지의 영역도, 너무 심심한 리얼리즘의 영역 어느 한쪽에 매몰되지 않는다. 가장 우선시 되는 것은 그들의 소중한 일상. 소시민으로서 살아가는 담담한 일상 속 초자연적 현상으로 인해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일탈에 대한 짜릿함. 무엇보다도 그러한 일상 중 부딪히게 되는 커다란 자연재해에 정면으로 맞서 싸우는 소년만화의 특징까지. 이야기의 흐름에 있어 상승과 하락이 적절히 분배되어 있고 등장인물 모두가 한마음 한뜻으로 사건을 해결해 가는 모습이 사회 속에서 최선을 다하는, 곧 인류 사회에 문제가 되는 사건을 직면하고 타파해 나가는 주인공들의 책임감 있는 성숙한 모습에 관객은 만족감을 느끼며 모난 곳 없는 서사가 더해짐에 따라 대중성을 확보했다.


<날씨의 아이> 또한 사회와 등장인물 간의 관계에 대해 다루고 있다. 다만 해당 작품은 <너의 이름은>에 비해 혹평을 받은 바 있는데, 이유는 부족한 개연성이었다. <날씨의 아이> 속 등장인물들 또한 <너의 이름은> 속 등장인물들처럼 초자연적 현상을 경험하고 재난 또한 마주한다. 다만 <날씨의 아이>속 등장인물들은 본인들의 문제를 무엇보다 우선시하여 재난으로 인해 발생하는 사회적 문제를 회피하는 모습을 보인다. 영화는 분명 "그 누구도 대신 희생될 수 없다."라는 장황한 메시지를 담고 있지만 이를 표현하는 방식이 "사랑만 있으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라는 의미로 변질되어 이를 바탕으로 행동하는 등장인물들이 미성숙한 생각이 관객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었으며, 상식선의 영화가 아닌 오로지 감성만으로 보는 영화로 변모했다. 또한 주제를 설명하는 과정이 어색하고 영화 속 줄거리에 대한 정보가 너무나도 부족했기에 이는 곧 줄 등장인물들의 완성도를 해치게 되어 작품의 몰입을 방해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신카이 마코토 감독은 주로 이야기의 흐름을 위해 등장인물들에 대한 설명을 과감히 생략하는 경우가 많은데, <너의 이름은>에선 부각되지 않던 그러한 단점이 <날씨의 아이>가 안고 있던 단점과 맞물려 더욱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영화 속 등장인물들이 결국 재난을 막지 않는 선택을 했기 때문에 영화의 배경이 되는 도쿄는 결국 홍수로 물에 잠기게 되는 등, 상식선에선 납득 불가능한 상황이 다수 연출되었던 것이 <날씨의 아이>에 대한 나의 평이다.


2. <스즈메의 문단속>, 재난 트릴로지의 최종장


그렇다면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재난 트릴로지"의 마지막, <스즈메의 문단속>은 어떨까?


<스즈메의 문단속>에서 다루는 대표적인 자연재해는 지진이다. 작품 속 지진은 실제로 일본에 일어났었던 지진을 배경으로 하여 애니메이션으로 각색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일까? <너의 이름은> 속 재해였던 운석 충돌과 <날씨의 아이> 속 기록적인 폭우보다 사실적이게 느껴지게 된다. 또한 애니메이션이라는 장르의 특징을 살려 이러한 자연재해를 '미미즈' 라는 가공의 생물체로 표현했는데 인간의 이해를 넘어서는 미지의 존재에 대한 공포를 자연재해로 형상화했다는 점이 또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자연재해인 '미미즈'를 막기 위해 주인공 '이와토 스즈메' 와 '무나카타 소타'가 일본 전역을 누비는 것이 영화의 주된 줄거리이다.



<스즈메의 문단속> 역시 사회와 개인 사이의 관계에 대해 다룬다. 초자연적 현상, 청춘의 사랑, 다가오는 재난. 소재는 전부 동일하다. 하지만 이 영화의 등장인물은, 개인의 삶보다 사회의 안위를 무조건적으로 우선시하지도, 그 누구도 희생되어선 안된다는 일념으로 문제상황을 회피하지도 않는다.(<너의 이름은>이 사회의 안위를 무조건적으로 우선시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오히려 이 두 가지의 의견 모두 적절히 수용한다. 마치 신카이 마코토 감독이 그의 전작 <날씨의 아이>의 단점을 외면하고 회피하려 하지 않음과 동시에 <너의 이름은>의 장점은 적절히 수용하는 노력이 돋보이는 작품으로 느껴졌다. 그중 인상 깊었던 것은 주인공 스즈메의 선택, 소타가 삶에 대해 생각하는 자세, 그리고 자연재해를 받아들이는 인간의 초연적이고 의연한 자세였다. 극중 스즈메는 미미즈로 인해 발생하기 직전인 지진을 막기 위해 소타를 희생하기에 이른다. 소타는 본인의 희생이 불가피한 것임을 알고 있으나 삶에 대한 욕구와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희생되기를 주저한다. 하지만 재해로부터 인명피해를 막고자 하는 그의 고뇌와 그에게 주어진 사명을 완수해야 한다는 책임감으로 본인이 스스로 희생하게 되는, 이른바 "사회적 선택"을 하게 된다. 스즈메는 그러한 소타의 사명과 책임을 거부하고 부정하지만 결국 그녀도 소타와 마찬가지로 사회의 안위를 위한 "사회적 선택"을 하게 된다. <날씨의 아이>속 등장인물들과 가장 큰 차이점이 바로 이것이다. <날씨의 아이> 속 등장인물들은 스스로가 사회에 속해있다는 그러한 굴레를 전혀 인지하지 못하며 그러한 굴레를 느꼈을 때 속하기를 거부한다. 오직 사랑이 먼저였고 그 외의 것들을 알지 못한 그들의 미성숙한 행적이 자연재해라는 인명피해로 변질되기에 이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그러한 선택에 죄책감을 전혀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 해당 영화가 다른 영화들에 비해 비판받는 부분 중 하나이다. <스즈메의 문단속>속 등장인물들은 미성숙한 선택을 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희생을 당연시하지 않으며 삶에 대한 의지를 굳건히 간직한다. 이들은 재해를 막기 위해 희생을 감수하지만 이 과정 속에서 이들의 고심과 고뇌가 영화 속에서 그들의 독백과 대사로 나타난다. 희생이 당연시되는 사회는 잘못된 사회이다. 이는 역사가 반증하다. 우리는 이러한 사회를 "전체주의" 라 부른다. <스즈메의 문단속>은 이러한 서사를 통해 <날씨의 아이>의 주된 이야기였던 "그 누구도 희생되어선 안된다."라는 메시지는 그대로 유지하되, "모든 생명은 소중하다."라는 <너의 이름은>의 메시지 또한 적절히 전달해 준다. 등장인물 소타가 희생되기까지 소타는 그의 운명을 부정한다. 희생되고 싶은 사람은 없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을 위해 마주하고 싶지 않은 현실과 맞닥뜨리는 사람은 있을지언정. 이러한 고뇌가 영화 속에도 잘 담겨있다. 스즈메 또한 그러하다. 소타의 희생이 당연하다고 생각하지 않으나, 당장의 사회를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하게 된다. 이는 곧 줄 죄책감으로 변질되며, 희생된 소타를 찾기 위한 이야기가 영화의 중후반부에 전개된다.



또 다른 흥미로운 점은 영화가 다루는 생명의 가치에 대한 무게였다. 작중 스즈메의 행적은 전사를 방불케할 정도로 용감하다. 영화와 애니메이션이라는 미디어의 특성과 작품의 전개를 위해 어쩔 수 없이 행동하는 주인공이라는 모습을 감안하더라도 말이다. 실제로 그녀는 "죽는 것이 두렵지 않다."라는 대사를 읊는데 이는 나의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들었다. '죽음이 두렵지 않다고? 그런 사람이 있던가? 경험해 보지 못한 미지의 영역에 대한 무지에서 오는 용감함인가?'라는 생각이 들었으나, 이후 재해라는 자연 현상과 희생이 가져다주는 삶에 대한 소중함이 우리의 삶이 너무나도 덧없기에 소중하다는 것을 영화는 우리에게 이야기해 준다. 스즈메의 죽음에 대한 무지가 자연스레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변하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통해 삶의 소중함을 깨우치며 이러한 그녀의 깨우침을 통해 내리게 되는 그녀의 선택이 자연스레 보상을 받게 되는 세 가지 단계가 매끄럽게 흘러감이 영화에 대한 나의 만족감을 한차례 고조시켰다.


죽음은 무섭다. 누구나 그렇다. 더군다나 이해할 수 없는 미지의 존재, 자연재해로 인한 죽음은 더더욱 우리의 상식을 벗어나는 일이다. 영화 속 스즈메도 결국 죽음이라는 것이 두렵다는 것을 느낀다. 자신의 삶이 끊어질 수 있다는 점에 대한 공포가 아니라 내 주변 사람들에 대한 죽음을 맞이하고서 죽음이라는 것이 두렵다는 것을 느낀다. 소타도 그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희생되었지만 그 직전까지도 그 또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느낀다. 하지만 그러한 재난과 재앙 앞에서 우리는 의연하게, 인간의 삶이 영원하지 않고 덧없듯이 이러한 자연적인 현상을 인간이 맞닥뜨리더라도 우리는 그저 고개 숙여 인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지나간 자들을 위해 씩씩하게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영화는 이야기해 준다. 때로는 재해라는 피할 수 없는 운명에 맞서기도, 때로는 마음 아픈 선택을 내려야 하는 순간도, 때로는 죽음의 두려움을 마주하기도 하는 평범한 소시민들의 모습을 통해 삶의 소중함을 이야기해 준다.


나아가 영화는 재난과 재해는 언제 어디서 우리를 찾아올지 모른다는 경각심도 심어준다. 오늘 찾아올지 내일이 될지, 그 재난이 우리의 목숨을 앗아갈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저 내일이 올 거라는 당연함 속에 우리는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그런 생명에 대한 가치를 영화는 부정한다. 내일은 절대 당연하지 않으며, 지나간 자들을 위해서라도 그러한 내일을 살아가선 안된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는 속담을 첫 문단에 쓴 바 있다. 소가 없어지기 전까지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문을 잘 잠가두어야 한다. 내일도 소가 있을 거라는 생각으로 문을 잠가두지 않는 것은 소를 풀어주는 것과 다름없다. 그러한 삶의 가치를 생각하며 영화를 관람한다면 영화의 마지막에는 눈물을 찔끔 흘리고 있는 본인을 마주할지도 모른다.



3. 두 편의 영화를 통해 찾아낸 신카이 마코토 감독과 관객과의 타협점의 산물, <스즈메의 문단속>


작품 외적으로 신카이 마코토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본인의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너의 이름은>의 대중성 있는 이야기의 장점은 그대로 유지하되 <날씨의 아이>의 개연성이 떨어진다는 단점은 최대한 수정하고자 하는 굳은 의지가 돋보이는 작품이었다. 앞서 나온 두 작품을 통해 그는 관객들과 소통하며 데이터를 쌓아가고 있던 것이 아닐까? 그렇게 쌓인 데이터를 통해 절충안을 내고 타협점을 찾아가며 만들어진 영화가 <스즈메의 문단속>이라고 느꼈다. 마치 감독이 "이 정도면 된 거지?"라고 영화관을 나오는 나에게 물어보는 것 만 같았다.


다만 역시 이야기의 전개를 위해 개연성을 어느 정도 포기한 것은 보인다. 그렇더라도 나는 "<날씨의 아이>만큼은 아니다!"라고 자신 있게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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