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젊은 여성들 사이에서 ‘프로아나’라는 단어가 유행처럼 번진다는 뉴스를 접했다. ‘프로아나’는 찬성을 뜻하는 ‘프로(pro)'와 거식증을 뜻하는 ’애너렉시아(anorexia)'의 합성어로 거식증을 동경한다는 뜻을 내포하며, 가시처럼 마른 몸에 집착하는 사람을 일컫는다. 놀라운 일이지만 별로 놀라울 일이 아니다. 이미 다이어트에 대한 강박과 섭식장애는 날씬한 몸을 주입하는 사회에서 감기처럼 자연스러운 것이 되었으니 말이다.
가느다란 팔과 다리, 선이 예쁜 어깨, 풍만한 가슴, 굴곡진 골반. 이 모든 것을 한 번에 가지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알고 있지만 저런 몸을 가지고 싶다는 지옥에 빠진다. 나도 다를 바 없다. 세상이 요구하는 몸과 십 대 시절부터 내가 지향하는 몸이 겹쳐진다. 나는 위의 카테고리를 하나씩 빼보기로 했다. 현실에 도달할 수 있는 것들로는 ‘가느다란 팔과 다리’와 ‘선이 예쁜 어깨’였다. 저 신체 조각을 가지기 위해 고군분투했고 마침내 가지게 되었지만, 떨쳐낼 수 없는 압박과 부족함이 뇌 주름 사이사이에 껴서 나오질 않는다. 지금부터 보편적이라서 안타까운 섭식장애를 겪은 경험에 대해 몇 자 적어보려고 한다.
입이 짧고 식사를 거부하던 어린 나의 몸은 빼빼 말랐었다. 그때는 마른 몸이 예쁘다거나 부럽다는 생각을 단 한 번도 해본 적 없었다. 그러다 중학생이 되면서 식욕이 올랐고 체중은 급격하게 증가했다. 난생처음으로 통통한 몸을 가지게 되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날씬할 수도 있겠으나 또 다른 시각으로 본다면 살집이 있는 몸이었다. 그럴 수 있다. 사람의 체중은 먹는 음식의 칼로리와 양에 따라 초 단위로 엎치락뒤치락하고 있으니 말이다.
문제는 살이 찌면서 딱 맞아진 교복에서 출발한다. 교복은 두툼한 팔뚝과 타이어 같은 뱃살을 제대로 가려주기는커녕 도드라지게 만들었다. 덕분에 나는 주위로부터 ‘살쪘다’는 말을 자주 듣게 되었다. 무례한 말을 서슴없이 하는 사람의 인중을 때렸어야 했는데 당시에 나는 스스로를 탓하고 끊임없이 먹던 자신을 미워하기 바빴다.
게다가 미디어에는 한 손으로도 잡힐 만큼 얇은 팔과 다리를, 소위 ‘개미허리’라 불릴 만큼 가느다란 허리를 가진 연예인들이 자신의 몸을 뽐낸다. 보통의 몸도 허락되지 않는다. 보기에 살집이 미세하게라도 보인다면 지탄의 대상이 된다. 나는 손가락질받고 싶지 않았고, 더욱더 마른 몸을 동경하게 되었다. 결국 미디어의 허상과 사회의 압박이 만들어낸 좁디좁은 틀에 나를 맞추기 시작했다. 문 틈보다 작은 그 틀 안으로.
종아리에는 살이 잘 찌지 않지만, 허벅지와 팔뚝, 복부는 내가 가장 스트레스받는 부위였다. 대학 입시로 스트레스를 받았던 열아홉 살부터 나는 심한 다이어트를 감행했다. 아침은 굶었고 점심에 나오는 급식은 젓가락으로 새 모이만큼의 밥알을 집어서 입에 넣거나 식판의 가운데에 놓인 소량의 반찬만 먹었다.(이 와중에도 맛있는 반찬은 먹고 싶었다) 그리고 체중감량에 탁월하다는 차를 꾸준히 마셨고 저녁은 굶거나 달달한 커피우유로 때웠다. 빈약한 영양섭취로 인해 반드시 사달이 날 게 분명했다. 결국 나는 응급실에 실려가서 세 종류의 수액을 맞고 겨우 집에 돌아갈 수 있었다. 다음날 학교는 당연히 가지 못했다. 몸을 회복하기까지 몇 달이나 걸렸다.
스무 살에는 마른 몸에 대한 집착이 더욱 강해졌다. 극단적인 다이어트로 이미 쓰러진 전적이 있음에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것이다. 단식에 가까운 식단을 병행했고 운동은 역시나 하지 않았다. 어느 날은 솟구치는 식욕을 참지 못해서 치킨이나 피자 같은 고칼로리 음식을 먹었고 혹여 늦은 시간에 식사를 하면 습관적으로 구토를 하기 일쑤였다. 눈물로 퉁퉁 붓고 시뻘건 핏줄이 죽죽 그어진 눈을 보면 잠깐 망연자실했다. 하지만 나는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이 더 혐오스러워서 이 짓을 멈추지 못했다. 나중에서야 잦은 구토가 치아를 부식시킨다는 무시무시한 말을 듣고 나서 스스로 구토를 하지 않도록 제어했지만 여전히 살에 대한 집착이 잔존했다. 도대체 나는 얼마나 말라야 만족하고 안심할까.
이십 대 중반부터 우울증 약을 먹기 시작했다. 장기간 약을 복용하면서 체중은 12 킬로그램이나 빠져버렸다. 의지로 빠진 것은 아니었다. 아파서 빠진 것이었음에도 예전보다 얄쌍해진 몸을 보는 것이 왠지 좋았다. 병적이었다. 이후로 강박은 더욱 나를 갉아먹었다. 굶어서 납작해진 배와 뾰족하게 솟은 갈비뼈를 만지면서 안도했다. 배가 조금이라도 나오거나 갈비뼈의 형체가 이전보다 도드라졌다고 느껴지지 않으면 살이 쪘다고 생각했다. 나름의 ‘과식’을 한 바로 다음날에는 한 끼만 먹었고 종종 그 한 끼마저도 샐러드를 섭취했다. 운동도 하지 않고 소식만 한 터라, 체중도 근육량도 당연히 평균 미달이었다. 우습게도 난 그 점이 자랑스러웠다. 속은 이미 썩어 문드러지고 있었는데도.
어느 날, 필라테스를 함께 하자는 언니의 권유로 운동을 시작했다. 내 인생에서 운동은 한 톨도 허락한 적이 없었건만 언니의 성화에 못 이겨 센터로 향했다. 그곳에서 나는 다른 세계를 마주했다. 처음에는 몸의 균형과 근육, 지방의 퍼센트를 확인했다. 유독 통증이 심한 목과 어깨, 등은 섬유근통증이라는 진단을 받을 정도로 심했고, 다리 근육도 약해서 발등이 내려앉은 상태였다.
마른 몸은 결코 나에게 건강을 주지 못했다. 늦었지만 이제야 깨달은 걸 다행으로 여기기로 했다. 무너진 몸을 복구하기 위해 1년간은 한의원을 다니면서 추나요법을 받았고 그것도 부족해서 아프기로 유명한 도침도 맞았다. 그리고 일주일에 두 번씩 필라테스를 했다. 거의 빠지지 않았다. 힘들고 지루할 것이란 예상과는 달리 필라테스는 나와 잘 맞는 운동이었다. 운동을 마친 뒤의 상쾌함을 처음 느꼈고 이 느낌을 계속 받고 싶어졌다.
어느덧 운동은 내가 사랑하는 취미이자 필수가 되었다. 내 몸은 점점 근육이 잡혔고 균형 감각이 나아졌고 코어힘도 강해졌다. 말린 어깨는 어느 정도 펴졌고 다리 힘도 생겼다. 내가 상체 힘이 센 편이라는 긍정적인 사실도 알게 되었다. 물론 지금 나의 몸은 그저 말라 보일지 몰라도 과거와는 달리 근육이 단단하게 잡힌 신체는 내가 보기에도 건강하고 만족스러웠다. 섭식장애의 문제점을 인지하고 내 몸을 사랑하는 법은 별다를 게 없었다. 여기로부터 완전히 탈출하지 않았어도 조금씩 벗어나기 위해 노력한다는 점에서 스스로에게 나름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다.
요즘은 퇴근 후 집에서 홈트레이닝을 한다. 처음에는 1킬로그램의 아령만으로도 버거워했지만 이제는 가볍게 들게 되었다. 무게를 늘려나갈 생각이다. 조금씩 만져지는 어깨와 팔 근육에 뿌듯함을 느낀다. 덧붙여서 식단에도 약간의 변화가 생겼다. 영양소가 적절하게 배분되지 않은 한 끼로 때우는 일이 잦았는데 요즘은 나름 건강하게 먹으려고 노력한다. 아침에 일어나서 꼭 사과 한 개를 먹거나 부족한 단백질을 채우기 위해 단백질 함유량이 높은 음식, 또는 셰이크를 마신다. 건강을 챙기기를 일상에 채우는 재미를 느끼는 중이다.
쉽게 지치지 않는 몸. 어깨와 팔에 다부진 근육이 붙은 몸. 검열하지 않은 몸. 과거와 달리 개선된 몸. 그 자체로도 사랑해 줄 수 있는 몸. 나는 조금 자유로워졌을까. 사실 아직도 강박이 찌꺼기처럼 남아있다. 언제쯤 이마저도 게워낼 수 있을까. 아직 확신할 수 없는 고민들이 둥둥 떠다니고 있다.
거칠게 말해서 그깟 ‘마른 몸’이란 도대체 뭘까. 밥도 굶고 타인과 자신을 비교하고 검열하고 삿대질하고 종국에는 사망에까지 이르게 만드는 강박은 형체 없이 나를, 젊은 여성들을 비웃는다. 어느 때는 이 모든 걸 갈갈이 찢고 그 비웃음을 무시하고 짓밟고 싶어진다. 하지만 매번 패배를 맛본다. 과연 건강도 챙기고 좋아하는 음식도 죄책감 없이 먹을 수 있는 날이 오긴 할까. 이마에 물음표만 박혀 있다. 결말이 나지 않는 시나리오를 죽을 때까지 쓰는 기분이다.
극복했다가도 극복하지 못한 비루한 동경과 집착. 내 이야기는 지극히 개인적이지 않다. 이런 일은 다수의 여성들이 이미 내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겪었다. 수치스러운 경험을 굳이 써내려간 건 이렇게라도 하면 남들에게 부끄러워서라도 강박으로부터 탈출할 낌새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다. 근데 어쩌지. 나는 부끄럽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