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세월이 지나 난 어른이 됐고 많은 걸 잊을 줄 알았는데. 이상하게... 원래 계속 여기 살았던 듯 떠난 적이 없는 듯해요. “ - 영화 <시네마 천국>
아빠는 치밀하게 짜인 구조물 같은 사람이다. 이십 대 초반까지는 이 생각이 전혀 변하지 않았다. 예전에 아빠에게 쓴 편지에서도 나와있듯이 그는 팩 하는 성미와 날카로운 예민함을 지녔다. 허튼 구석을 용납하지 않고 뭐든 똑 부러지게 말하고 걸어야 했다.
이와는 반대로 소량의 낭만에도 감동받는 성정을 타고나기도 했다. 나는 아빠의 성격을 빼다 박은 딸이다. 그래서일까. 우리는 좋아하는 영화와 음악에 있어서 많은 면이 겹친다. 그래서 취향에서도 아빠의 영향을 크게 받을 수밖에 없었다. 독서를 좋아하던 나와 언니는 초등학교 때 서점에서 아빠가 직접 골라준 책을 반복해서 읽었고 루이스 쌔커의 <구덩이>와 안도현의 <연어>는 나중에 조카에게도 추천해 줄 만큼 인상적인 작품이 되어버렸다. 이후에는 아빠가 사랑했던 존 덴버와 비틀즈, 김광석과 유재하의 음악에 빠진, 내 또래가 잘 모르는 노래를 자주 듣는 성인으로 자랐다.
특히나 영화에 있어서는 할 말이 차고 넘친다. 우리를 감싸고 흐르는 작품을 꼽으라면 <시네마 천국>이라고 할 수 있다. 아빠와 함께 볼 영화를 고르던 중이었는데 이 영화를 발견한 아빠가 자신의 인생 영화라면서 한 번 보자고 제안했다. 타이틀은 참 유명했으나 끌리지는 않았다. 그래도 가벼운 마음으로 재생버튼을 눌렀다. 긴 러닝타임에는 작은 극장에서 벌어지는 매 초의 시간을 담아내고 있었다. 진정성 있고 인생의 철학이 담긴 대사가 유독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마지막에 편집된 키스신이 연속으로 흘러나오는 명장면에서 나는 아이처럼 펑펑 울고 말았다.
아빠는 뭐가 그리 슬펐냐고 물었는데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정형화된 언어로 대답할 만큼 내 감정을 명확하게 드러내는 법을 몰랐던 것도 있지만, 그때 눈물의 이유를 정말 알 수 없던 게 더 컸다. 막연하게 본다면 어린 토토를 사랑했던 알프레도의 마음에 감동을 받아서랄까.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당시 나는 주인공 토토처럼 고향을 떠나 성공만을 쫓지도 않았고 주어진 일만 충실히 해나가던 어린 대학생에 불과했다. 왜 나는 겪어보지도 않은 일을 간접적으로 마주하고 헤아릴 수 없는 마음을 느꼈던 걸까?
후폭풍이 다 가기도 전에 아빠는 배가 고프다며 라면 하나를 끓여서 나눠 먹자고 했다. 나는 부은 눈을 한 채 흰 김을 뿜으며 먹음직스럽게 끓여진 라면을 바라보았다. 태풍이 휘몰아친 듯 정신없이 울었음에도 그 라면이 참 맛있었다는 기억이 있다. 그날 밤, 나는 <시네마 천국>의 OST인 ‘Love Theme'을 반복해서 들으며 내가 느꼈던 감정을 곱씹고 눈물의 원인을 알아내기 위해 애썼지만 허탕만 쳤다.
시간이 흘러 나홀로 일본에서 지내고 있었던 시절이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외국에서는 고향 음식을 먹는 일이 매우 드물다. 나는 라면을 매우 좋아했지만, 더럽게 못 끓이는 사람인지라 매번 친구들이 보내준 한국 컵라면으로 끼니를 때우곤 했다. 언니에게 먹고 싶은 음식 리스트를 보내면서 ‘먹고 싶다’는 말로만 대화창을 채운 적이 무수했다. 그때 나는 문득 아빠가 끓여준 라면이 그리웠다. 숟가락으로 호호 불며 입천장을 데어가며 먹었던 국물과 꼬들꼬들한 면발, 적당히 익은 반숙, 그걸 섞어서 먹으면 기가 막힌다고 했던 아빠의 말까지.
“절대 돌아오지 마. 우리 생각도 하지 마. 돌아보지 말고 편지도 쓰지 말고. 향수병 따위는 너한테 없는 거다. 혹시 돌아오면 절대 나를 찾지 마.” - 영화 <시네마 천국>
분명 나는 알프레도의 말처럼 뒤도 돌아보지 않고 유학길에 올랐다. 일정 기간이 되면 귀국해야 했지만 일본에 머무는 시간만큼은 저런 마음가짐을 장착했다. 우물 안 개구리가 되기 싫었다. 넓은 세상을 배우고 다양한 사람을 만나면서 나를 단단하게 만들고 싶었다. 지긋지긋한 한국을 벗어나 다른 문화권에서 살며 스스로를 채찍칠하며 다듬고 싶어서 온 일본이건만. 정작 내 자아는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서 발버둥쳤다. 젊은 토토에게 뒤돌아보지 말고 떠나라는 알프레도의 대사처럼 슬픈 기색 하나 없이 씩씩하게 유학 생활을 했지만, 내 마음은 온통 한국과 가족과 손쉽게 먹을 수 있었던 음식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그제야 나는 편집된 키스신 장면의 의미와 굳게 닫힌 극장 앞에서 눈물을 쏟던 주민들의 심경을 깨달았다. 그건 평범한 라면 같은 것이었다. 누군가에게는 잘린 필름을 연결해서 붙인 쪼가리, 볼품없고 먼지 쌓인 극장이지만, 토토와 마을 주민들에게는 소중한 기억과 순간을 담은 물성이자 공간임은 틀림없다. 자주 먹을 수 있었던 한국 라면은 건강에 좋지 않고 영양도 없지만, 먼 타지에서 외롭게 지내는 나에게는 그립고 소중한 음식이었다. 하지만 아빠만의 비법으로 끓인 라면은 지금 내가 머무는 곳에서는 너무도 멀리 있었다.
지워지고 부서지고 별 것도 아닌 익숙함이 결코 지겨움만은 아니었음을. 보잘것없어 보이지만 그 안에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경험과 가치가 있다. 성공한 영화감독이 되었어도, 마음만은 작은 마을에서 알프레도에게 영사 기술을 배우던 어린아이인 토토처럼 말이다. 나는 곧바로 <시네마 천국>의 스틸컷을 핸드폰에 저장하면서, 아빠가 끓여준 라면의 맛을 회상했다.
돌아보지 않으려 해도 불가항력으로 자꾸 고개를 돌리게 되는 일이 있다. 예컨대 사랑했지만 애초에 떠난 연인과의 기억이 문득 고개를 들어서 가슴이 미어지는 순간, 어쩔 수 없이 포기했지만 열렬히 간직해온 꿈과 연관성 있는 단어를 볼 때마다 마음이 무너지는 심정, 타임머신이 발명되지 않는 이상 절대로 회귀할 수 없는 어린 시절의 필름 같은 것들.
나는 <시네마 천국> 감독판을 감상했다. 이번에는 혼자였고 장소는 낯선 일본이었다. 감정이 남아있음에도 서로의 마음을 거절하는 알프레도와 엘레나가 또 한 번 슬픈 이별을 한다. 표지가 낡아서 찢어진 소설책과 밤마다 나와 꿈을 꿔준 애착인형과 가족 식탁에 올려진 음식을 떠올렸다. 나를 지탱해 준 건 한시도 내 곁을 떠난 적 없거나 오랫동안 좋아했던, 익숙하기 그지없는 존재들이었다. 새로움에 초점을 맞춘 나머지 그 가치를 자주 잊고 말았다. 버리지는 않았으나 소중함을 까먹었던 것이 매우 미안해졌다.
세상 물정을 알게 된 지금의 나는 수박씨를 먹으면 뱃속에서 수박이 자란다는 농담 정도는 가볍게 무시해 버린다. 하지만 이런 농담에 쉽사레 넘어갔던 어린 시절이 그립기도 하다. 그때는 낯익은 것들을 죄다 소중하게 여길 수 있었다. 지금은 계산적으로 머리를 굴리고 효율적이지 못하거나 불필요한 것들은 내치고 만다. 그래서일까. 나의 성장에서 빼놓을 수 없는, 소중하고 지긋지긋한 ‘시네마 파라디소’ 같은 존재는 하나둘씩 사라진다.
그럼에도 여전히 잔존해 있는 것들이 있다. 아직은 건강한 아빠가 해주는 라면, 그보다 더 맛있는 음식이 있고 내 침대에는 까맣고 동그란 눈을 반짝이는 꼬질꼬질한 애착인형이 있다. 중학생 때부터 꼬박꼬박 읽었던 소설책이 있고 아빠와의 추억을 만들어준 <시네마 천국>이 있다. 이것들도 언젠가 사라져 버린다고 생각하면 허망하고 슬프겠지만 적어도 내 곁에 머물 때까지는 꾸준히 껴안고 싶다.
그럴 수 있을까? 오래 좋아하고 기억하는 박은아의 <다정다감>의 마지막 문장처럼.
반짝이는 게 있다면 잘 간직해야지. 그건 다듬지 않아도 내게 보석이니까. - 박은아, <다정다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