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제야 Aug 20. 2023

고통에 대하여

의미있는 고통

 내가 정말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을 때 '고통'이라는 것의 본질을 곰곰이 생각하곤 했다. 삶의 예고된 성장통처럼 여겨지는 이별이나 상실, 인간의 유한성을 한정하는 죽음 등 철학적인 관점부터, 뇌의 작용으로 인한 통각의 고통까지 꽤 많은 부분에 대해 이것저것 생각해 본 것 같다.

 

 이혼하는데 뭐 이리 철학적 사유가 필요하냐 한다면, 그때 겪은 그 괴로움의 스펙트럼이 단순히 '슬프다, 화난다' 따위로 표현될 만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당시 나는 그 다음이 없을 것처럼, 그냥 진공 상태로 우주 한가운데 덩그마니 부유하는 느낌이었다. 어쨌든 조금이라도 나아지기 위해서는 최소한 이 감정이 무엇인지, 내가 이겨낼 수 있는 종류의 것인지는 알아야만 했다.  


 모든 것이 지난 지금에야 땅에 발을 딛고 지난 감정들을 가끔 꺼내어 본다. 혹여나 비슷한 감정이 일어나면 감각의 데이터를 뒤져 중심점을 잡는다. 특히나 심리적 통증에 관한 감각은 더더욱 면밀히 관찰하는데, 섣부른 대처로 비슷한 감정의 늪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하는 것이다.


 고통에 대한 글을 다시 한번 쓰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원래 감기도 다 나아가는 듯할 때, 가장 다시 걸리기 쉬운 법이니까.





 신체의 통증을 설명하는 의학적 관점으로도, 때로는 무의식까지 침투하는 괴로움에 대한 철학적인 관점에서도 '고통'이라는 개념은 인간이 결코 피할 수 없는 감각으로 규정된다.


 사실 아픔과 슬픔은 대체로 수동적이다. 자해 따위로 괴로움을 자처하지 않는 이상, 대체로 의도치 않게 벌어지는 어떠한 상황 때문에 '고통'을 마주하지 않는가.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 고통이란, 엄청난 무력감을 선사하는 반면 매우 전투적이고 능동적인 특성을 지니기도 한다. 크기와 깊이가 어떻든 일단 괴로움이 다가오면 반사적으로 어떻게든 이를 거부하고 극복하려는 의지가 생겨나기 때문이다.


 고통을 겪고 나면 성숙해진다고들 한다. 하지만 정작 고통 중에 있을 때에는 이 시간이 성장을 위해 반드시 겪어야 하는 필수불가결한 요소라던지, 누구나의 인생에 반드시 등장하고야 마는 것이라는 그런 흔해빠진 위로 따위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특히나 심리적 고통 중에 있을 때에는 더더욱 그러하다. 한 번 겪었다 해서 다시 아프지 않으리란 보장은 없다. 때로는 전혀 관계없는 것들이 트리거가 되어 같은 또 다른 고통을 야기하는 것처럼, 수두 마냥 한 번 앓고 지나가면 면역이 생기는 그런 종류의 것은 아니란 말이다.   

 


고통은 지극히 개인적이고 신성한 것

 오랜만에 서점에서 신간 서적들을 훑어보니 참 많은 작가들이 아픔을 승화시킨 작품을 썼더라. 하긴, 수 없이 많은 예술가들도 비극적인 삶 속에서 불멸의 명작을 남기지 않았나. 마치 가마 속에서 구워지는 도자기처럼, 고통에 굴복한 몇몇은 깨어지더라도 이를 견디어 낸 이들은 뽀얗게 빛을 발하며 존재를 드러내는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며 책 제목을 훑어보다가 보니 문득 펄 벅의 <자라지 않는 아이>가 생각났다.

 딱따구리처럼 손톱을 깨물며 초조하게 조정기일을 기다리던 그때, 나는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방구석에 틀어박혀 대체 이 시간이 내게 어떤 의미가 있을지를 생각했었다.

 당시 이러한 감정을 다스리는데 여러 책과 강의가 꽤 많은 도움이 되었는데, <자라지 않는 아이>는 고통을 마주하는 것에 관련하여 자주 인용되던 책이었다. <대지>라는 대작을 남긴 역사 속에 영원불멸할 작가가 남긴, 정신지체 딸을 둔 어머니로서의 인간적 고뇌를 고백하는 자서전이다.


 이 책은 문학적 가치뿐만 아니라 정신의학나 심리학, 때로는 영성 분야에서도 가치 있게 조명되는 책이지만, 나는 그 모든 해석의 여지를 떠나 저자가 고통을 응시하고, 인정하고, 겪어내는 과정을 따라가며 고통의 본질을 조금이나마 들여다 볼 수 있었다.


 그녀는 절친한 친구 화이트에게 썼던 편지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지적장애를 앓는 딸 캐롤에 대해 말할 수 없었던 이유에 대해 '그것은 슬픔처럼 지극히 개인적이고 신성한 것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어쩌면 그녀가 말하고자 한 것은, '고통이란 가장 인간적인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어느 누구나 공감을 할 수는 있지만, 사실 철저히 개인적인 고유의 감정이자 쉽게 해결할 수 없는 인간 실존에 관한 것이라는 것.


 몇몇 구절은 필사 노트에 적어두고 가끔씩 꺼내어본다. 특히나 나는 오랜 시간 고통을 겪어내며 변화하는 그녀의 태도가 인상적이었는데, 유려한 문체로 기술된 비정형적 감정을 눈으로 훑고 나면 마음이 차분해진다.


'(전략) 삶에 대항해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삶에 순응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나를 중심에 두고 생각하면 견디기조차 힘든 삶이다. 그렇지만 중심을 조금만 옮겨도, 쉽지는 않지만 슬픔을 견딜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p75)'


 감정은 어떠한 '일'처럼 시작과 끝이 분명히 정해진 것이 아니다. 때로 출발점이 분명해도 그 끝이 언제가 될지, 그 임계점이 어디인지 정확히 모른다. 그렇기에 완벽히 떨쳐낼 수도, 거부할 수도 없는 것이다. 결국 그러한 감정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만 하는 것이다.



불행하고 고통스러운 삶이 우리를 단련한다
-니체


 때로 누군가는 고통을 통해 성장하지만 그 정도는 사람마다 다를 것이며, 어떤 누군가는 고통을 결국 좌절과 포기로 마무리짓기도 한다. 어쨌든 고통이란 그 속성이 무엇이건 간에 변화를 일으킴 분명하다. 펄 벅은 그녀의 고통의 결실로 80편에 가까운 책들과 국제 고아, 정신지체 아이들을 위한 빛나는 업적들을 남겼다.


 '불행하고 고통스러운 삶이 우리를 단련한다'던 니체의 말처럼, 때로 의미 있는 고통은 더 깊게 그 속에 빠져들길 원한다. 나 역시도 그러하다. 두 번 다시 절대로 겪고 싶지 않을 고통이었지만, 그 몇몇 감정과 깨달음은 정제되지 않은 원석처럼 새로운 발견이 되었으니까. 이런 것들이 인생을 재정비할 초석이 되는 것이다.


 사실 분명한 이유와 의미가 존재한다면 우리는 이러한 힘듦을 '고통'이라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기꺼이 맞아들일 수 있는 '시련'이나 '도전' 등으로 표현한다. 이렇게 지칭이 달라지면 그 이면에 감내해야 할 인내나 아픔 등의 본질 또한 달라진다.

 결국 이러한 속성 때문에 감정을 다루는 태도가 중요하다는 결론이 나는 것이다.


 기쁨과 다르게 슬픔과 고통에는 능동적 책임이 실재한다.

 고통을 안겨준 누군가에게 끝없이 책임을 묻거나, 이미 벌어진 일을 하염없이 되씹는다 해서 해결되는 문제도 아니다. 결국 이러한 종류의 감정을 직시하고 스스로 겪어내는 과정에서 '회복과 성장'이라는 모양새를 갖추어 가는 미학이 존재하는 것 같다.

 이것은 분명 직접 경험하지 않고서는 절대로 내 것이 될 수 없는, 누군가를 따라 해서 얻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마치 글처럼, 누군가 내 문장을 따라 한다 해서 결코 그 언어의 의미와 깊이가 같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결국 고통이 인간 실존의 증빙이라면, 그래서 삶에서 결코 피할 수 없는 그 무엇이라면 그것이 오롯한 슬픔으로 존재할리 없다는 믿음도 생긴다. 물론 우리는 펄 벅이 아니고, 고흐도 아니기에 모든 고통이 작품처럼 남진 않겠지만, 어찌되었건 모두의 인생에 때때로 들이닥치는 크고 작은 고통이 그저 영원히 아픔 자체로 남지는 않을 것이다. 진심으로 그렇길 바란다.


 


타이틀 이미지

ⓒ anaise , 출처 pinterest






 


매거진의 이전글 한 끗 차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