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던 겨울이 거짓말처럼 끝나가는 것을 가만히 앉아 지켜본다. 8월의 마지막 주가 되니 봄의 기운이 내가 모르는 어느 비밀스러운 장소에서 뿜어져 나오기라도 하는 모양이다. 여전히 아침과 저녁은 부정할 수 없는 겨울이지만 한낮의 햇살이 따사롭다. 여기저기서 봄이 느껴지기 시작하면 북반구에서 인생의 대부분을 보낸 나로서는 갑자기 3월이 된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 어리둥절할 때가 있다. 그렇게 봄과 3월에 대해 생각하다 보면 대학 신입생 때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게 되는 일이다.
대학은 완전히 새로운 세계였다. 인천에서 초등학교와 중학교, 고등학교까지 나온 내가 처음으로 ‘인천 사람’이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 발을 디딘 것이다. 과연 ‘서울 사람’들은 달랐다. 인천 사람들에 비해 걸음이 빠른 것 같았고, 또…… 아무튼 뭔가 다른 게 분명했다. 서울에서 나고 자란 친구들의 이야기를 듣는 일은 다른 세상에 대한 경험담을 듣는 일처럼 흥미로웠다. 자주 어울리던 친구들 중 다정하고 수줍음 많던 한 친구는 집에서 항상 ‘공주님’이라고 불린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서울은 정말 인천과 문화가 다르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친구들이 말하는 것들은 인천의 고등학교에서는 알려주지 않은 것들이었다. 새로운 세계의 낯선 문화를 빠르게 주워 담았다.
신입생 시절을 지나며 새로운 세계가 요구하는 것들을 정신없이 배우는 동안 시간은 흘러 삼 학년이 되었다. 배울 만큼 배웠다고 생각했던 건지 이제 스스로를 그런대로 성인이라고 인식했던 모양인데, 앞으로 이야기하려는 사건은 위태로워 보이기만 하는 바로 그 시기에 일어난 일이다. 국문과에 들어갔지만 현대문학을 멀리하던 나는 할 수 있는 한 현대문학과 관련된 수업을 듣지 않는 방향으로 시간표를 짜곤 했다. 그러나 그렇게 끝까지 현대문학을 피하다간 졸업을 할 수 없을지도 몰랐다. 평생 대학생이어야 하는 건 현대문학 수업을 듣는 일보다 더 끔찍할 것 같아서 어쩔 수 없이 들은 수업이 졸업하고 십 년이나 흐른 지금도 잊을 수 없는 ‘시 창작론’이었다.
수업을 담당한 교수는 시인이었다. 문단에서 활동 중이던 시인은 우리에게 들려줄 흥미로운 이야깃거리를 많이 가지고 있었다. 여성 문인들이 겪는 고충이나, 젊은 시인으로서의 경험 같은 것들을 들으며, 갓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아무것도 모르던 내가 성인이 되어 이런 이야기를 나누고 (실제로는 가만히 앉아 듣고) 있다니, 따위의 생각을 하며 자아도취에 빠져 들었다. 수업이 끝날 즈음 시인은 과제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좋아하는 시 한 편을 골라 왜 그 시를 좋아하는지에 대해 글을 써올 것. 어렵지 않다고 생각했다. 시인은 설명을 계속 이어나갔다. 그리고 싫어하는 시를 한 편 골라 마찬가지로 왜 싫어하는지에 대해 써올 것.
좋아하는 시에 대해 쓰는 건 어렵지 않다. 좋아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싫어하는 시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분명히 언젠가 읽고 별로 마음에 안 든다고 생각한 시가 있기야 했겠지만, 굳이 싫어하는 시를 기억하고 있을 리는 없었다. 그렇다면 과제 마감일까지 부지런히 시를 새로 읽고 어떻게든 싫어하는 시를 하나 찾아내야만 했다.
세상에서 가장 재미없는 일 중 하나는 싫어하는 시를 찾겠다고 눈에 불을 켜고 시를 읽는 일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렇게 눈에 불이 켜져 있으면 어떤 시를 읽어도 감흥이 있을 리 없다. 그런 식으로 시 한 편을 찾았다면 이제 왜 그 시가 싫은지에 대해 분량에 맞는 글을 써야 하는데, 그런 이유가 있을 리가. 결국 마감은 다가오고, 대충 찾은 시에 대충 이유를 붙여 분량을 채우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마감날이 되어 쓴 글을 인쇄하고 나니 손에 들린 건 종이 몇 장이었다. 아무리 다시 읽고 또 읽어도 안에 담긴 내용은 ‘내가 이 시를 싫어하는데, 싫어하는 이유는 내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이다.’ 정도로 요약할 수 있었다.
살다 보면 우연의 일치라고만 설명하기는 힘든 신비로운 경험을 하게 되는데, 그런 일들은 우주가 우리와 소통하려고 할 때 생기는 일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종종 한다. 마치 영화 <인터스텔라>의 한 장면처럼 말이다. 블랙홀 속으로 들어간 주인공 쿠퍼는 책장을 경계로 모든 시간 속에 존재하는 딸의 방 안을 보게 된다. 그 방에 있는 과거의 자기 자신에게 가족을 떠나지 말고 집에 남으라는 메시지를 보내기 위해 책을 떨어뜨려 소통을 시도하는데…… 과연 과거의 쿠퍼는 우주가 보내는 메시지를 알아챘을까, 알아채지 못했을까?
수업을 시작하며 시인은 우리에게 시 한 편을 소개했다. 공교롭게도 그 시를 쓴 작가는 내가 특별히 ‘싫어하는 시’로 선정한 작품을 쓴 시인과 같은 인물이었다. 책상 위의 과제를 내려다봤다. 가련한 10 포인트 크기의 글자들이 파들파들 떨며 불안하게 종이 위에서 흔들리는 것 같았다. 시인은 말을 이어나갔다. 이어진 말은 더욱 놀라웠다. 그 말에 의하면 내 과제는 ‘내가 교수님의 스승님이 쓴 이 시를 싫어하는데, 싫어하는 이유는 내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요약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 이후 수업에서 무슨 이야기가 오갔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나의 내면은 그럼에도 제출에 의미를 두고 과제를 낼 것인가, 조용히 미제출로 남을 것인가 사이를 오가느라 아무것도 신경 쓸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그날의 나는 과제를 제출했을까, 하지 않았을까?
만일 미래의 내가 블랙홀 속에 들어갔다면 책상 위의 책을 마구 떨어뜨린다거나, 싫어하는 시가 인쇄된 종잇장을 더욱 파들파들하게 흔들어댄다거나, 아예 그 위에 커피라도 쏟아버릴 수 있었을 텐데. 인천 사람이나 서울 사람이나 우주의 입장에서는 아무런 차이도 없다는 걸 알려줬을 텐데. 그렇다면 과제를 제출하는 것이나 제출하지 않는 것도 우주의 입장에서는 별 상관없는 일이라는 진실을 알 수 있었을 텐데.
왜 쿠퍼처럼 미래에서 긴급한 메시지를 보내지 않았느냐고 그때의 내가 묻는다면 지금의 나는 답할 것이다. 그날 우주는 나에게 분명한 메시지를 보냈다고. 내가 그걸 알아듣지 못한 건 아직 배워야 할 것이 많았기 때문이라고. 한 학기 동안 들었던 시 창작론 수업은 시를 어떻게 써야 하는가에 대한 답을 주지도 않았고, 괜찮은 학점이 되어 돌아오지도 않았지만 그것보다 더 가치 있는 걸 배울 수 있는 수업이었다. 거기서 뭘 배웠느냐고? 때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편이 더 지혜로운 것일 수 있다는 것. 우리가 하는 그럴듯해 보이는 꽤 많은 말들이 사실은 생각보다 쓸모없다는 것. 자아가 원숭이처럼 날뛸 때마다 시 창작론 수업의 교훈을 떠올리면 마음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는 일이다. 잠깐의 부끄러운 실수가 평생의 가르침이 된 셈이니 따지고 보면 좋은 일이다. 앞으로는 아무리 마감이 급해도 그 따위의 글은 쓰지 않을 테니까. 그때 우리에게 시를 가르쳤던 시인이 아직도 내가 제출한 과제를 기억한다면 생각보다 조금 더 부끄러운 일이긴 하지만, 어쩔 수 없다. 그건 내가 대신 잊어드릴 수 있는 일도 아니고, 나조차도 잊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에 두 사람 사이의 비밀로 간직하기로 하면 될 것 같다. 말하자면 그건 한 인간이 성장하는 아주 자연스러운 과정이었다고나 할까? 굳이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거듭 강조하는 품새를 보니 십 년이 더 지났어도 여전히 부끄럽긴 부끄러운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