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사리 Aug 27. 2023

원숭이 마음에게, 우주가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던 겨울이 거짓말처럼 끝나가는 것을 가만히 앉아 지켜본다. 8월의 마지막 주가 되니 봄의 기운이 내가 모르는 어느 비밀스러운 장소에서 뿜어져 나오기라도 하는 모양이다. 여전히 아침과 저녁은 부정할 수 없는 겨울이지만 한낮의 햇살이 따사롭다. 여기저기서 봄이 느껴지기 시작하면 북반구에서 인생의 대부분을 보낸 나로서는 갑자기 3월이 된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 어리둥절할 때가 있다. 그렇게 봄과 3월에 대해 생각하다 보면 대학 신입생 때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게 되는 일이다.


대학은 완전히 새로운 세계였다. 인천에서 초등학교와 중학교, 고등학교까지 나온 내가 처음으로 ‘인천 사람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 발을 디딘 것이다. 과연 ‘서울 사람들은 달랐다. 인천 사람들에 비해 걸음이 빠른  같았고, …… 아무튼 뭔가 다른  분명했다. 서울에서 나고 자란 친구들의 이야기를 듣는 일은 다른 세상에 대한 경험담을 듣는 일처럼 흥미로웠다. 자주 어울리던 친구들  다정하고 수줍음 많던  친구는 집에서 항상 ‘공주님이라고 불린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서울은 정말 인천과 문화가 다르기라도  모양이었다. 친구들이 말하는 것들은 인천의 고등학교에서는 알려주지 않은 것들이었다. 새로운 세계의 낯선 문화를 빠르게 주워 담았다.


신입생 시절을 지나며 새로운 세계가 요구하는 것들을 정신없이 배우는 동안 시간은 흘러  학년이 되었다. 배울 만큼 배웠다고 생각했던 건지 이제 스스로를 그런대로 성인이라고 인식했던 모양인데, 앞으로 이야기하려는 사건은 위태로워 보이기만 하는 바로  시기에 일어난 일이다. 국문과에 들어갔지만 현대문학을 멀리하던 나는 할 수 있는 한 현대문학과 관련된 수업을 듣지 않는 방향으로 시간표를 짜곤 했다. 그러나 그렇게 끝까지 현대문학을 피하다간 졸업을   없을지도 몰랐다. 평생 대학생이어야 하는  현대문학 수업을 듣는 일보다  끔찍할  같아서 어쩔  없이 들은 수업이 졸업하고  년이나 흐른 지금도 잊을  없는 ‘ 창작론이었다.


수업을 담당한 교수는 시인이었다. 문단에서 활동 중이던 시인은 우리에게 들려줄 흥미로운 이야깃거리를 많이 가지고 있었다. 여성 문인들이 겪는 고충이나, 젊은 시인으로서의 경험 같은 것들을 들으며,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아무것도 모르던 내가 성인이 되어 이런 이야기를 나누고 (실제로는 가만히 앉아 듣고) 있다니, 따위의 생각을 하며 자아도취에 빠져 들었다. 수업이 끝날 즈음 시인은 과제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좋아하는   편을 골라   시를 좋아하는지에 대해 글을 써올 . 어렵지 않다고 생각했다. 시인은 설명을 계속 이어나갔다. 그리고 싫어하는 시를   골라 마찬가지로  싫어하는지에 대해 써올 .


좋아하는 시에 대해 쓰는 건 어렵지 않다. 좋아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싫어하는 시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분명히 언젠가 읽고 별로 마음에 안 든다고 생각한 시가 있기야 했겠지만, 굳이 싫어하는 시를 기억하고 있을 리는 없었다. 그렇다면 과제 마감일까지 부지런히 시를 새로 읽고 어떻게든 싫어하는 시를 하나 찾아내야만 했다.


세상에서 가장 재미없는 일 중 하나는 싫어하는 시를 찾겠다고 눈에 불을 켜고 시를 읽는 일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렇게 눈에 불이 켜져 있으면 어떤 시를 읽어도 감흥이 있을 리 없다. 그런 식으로 시 한 편을 찾았다면 이제 왜 그 시가 싫은지에 대해 분량에 맞는 글을 써야 하는데, 그런 이유가 있을 리가. 결국 마감은 다가오고, 대충 찾은 시에 대충 이유를 붙여 분량을 채우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마감날이 되어 쓴 글을 인쇄하고 나니 손에 들린 건 종이 몇 장이었다. 아무리 다시 읽고 또 읽어도 안에 담긴 내용은 ‘내가 이 시를 싫어하는데, 싫어하는 이유는 내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이다.’ 정도로 요약할 수 있었다.


살다 보면 우연의 일치라고만 설명하기는 힘든 신비로운 경험을 하게 되는데, 그런 일들은 우주가 우리와 소통하려고 할 때 생기는 일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종종 한다. 마치 영화 <인터스텔라>의 한 장면처럼 말이다. 블랙홀 속으로 들어간 주인공 쿠퍼는 책장을 경계로 모든 시간 속에 존재하는 딸의 방 안을 보게 된다. 그 방에 있는 과거의 자기 자신에게 가족을 떠나지 말고 집에 남으라는 메시지를 보내기 위해 책을 떨어뜨려 소통을 시도하는데…… 과연 과거의 쿠퍼는 우주가 보내는 메시지를 알아챘을까, 알아채지 못했을까?


수업을 시작하며 시인은 우리에게 시 한 편을 소개했다. 공교롭게도 그 시를 쓴 작가는 내가 특별히 ‘싫어하는 시’로 선정한 작품을 쓴 시인과 같은 인물이었다. 책상 위의 과제를 내려다봤다. 가련한 10 포인트 크기의 글자들이 파들파들 떨며 불안하게 종이 위에서 흔들리는 것 같았다. 시인은 말을 이어나갔다. 이어진 말은 더욱 놀라웠다. 그 말에 의하면 내 과제는 ‘내가 교수님의 스승님이 쓴 이 시를 싫어하는데, 싫어하는 이유는 내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요약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 이후 수업에서 무슨 이야기가 오갔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나의 내면은 그럼에도 제출에 의미를 두고 과제를 낼 것인가, 조용히 미제출로 남을 것인가 사이를 오가느라 아무것도 신경 쓸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그날의 나는 과제를 제출했을까, 하지 않았을까?


만일 미래의 내가 블랙홀 속에 들어갔다면 책상 위의 책을 마구 떨어뜨린다거나, 싫어하는 시가 인쇄된 종잇장을 더욱 파들파들하게 흔들어댄다거나, 아예 그 위에 커피라도 쏟아버릴 수 있었을 텐데. 인천 사람이나 서울 사람이나 우주의 입장에서는 아무런 차이도 없다는 걸 알려줬을 텐데. 그렇다면 과제를 제출하는 것이나 제출하지 않는 것도 우주의 입장에서는 별 상관없는 일이라는 진실을 알 수 있었을 텐데.


왜 쿠퍼처럼 미래에서 긴급한 메시지를 보내지 않았느냐고 그때의 내가 묻는다면 지금의 나는 답할 것이다. 그날 우주는 나에게 분명한 메시지를 보냈다고. 내가 그걸 알아듣지 못한 건 아직 배워야 할 것이 많았기 때문이라고. 한 학기 동안 들었던 시 창작론 수업은 시를 어떻게 써야 하는가에 대한 답을 주지도 않았고, 괜찮은 학점이 되어 돌아오지도 않았지만 그것보다 더 가치 있는 걸 배울 수 있는 수업이었다. 거기서 뭘 배웠느냐고? 때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편이 더 지혜로운 것일 수 있다는 것. 우리가 하는 그럴듯해 보이는 꽤 많은 말들이 사실은 생각보다 쓸모없다는 것. 자아가 원숭이처럼 날뛸 때마다 시 창작론 수업의 교훈을 떠올리면 마음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는 일이다. 잠깐의 부끄러운 실수가 평생의 가르침이 된 셈이니 따지고 보면 좋은 일이다. 앞으로는 아무리 마감이 급해도 그 따위의 글은 쓰지 않을 테니까. 그때 우리에게 시를 가르쳤던 시인이 아직도 내가 제출한 과제를 기억한다면 생각보다 조금 더 부끄러운 일이긴 하지만, 어쩔 수 없다. 그건 내가 대신 잊어드릴 수 있는 일도 아니고, 나조차도 잊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에 두 사람 사이의 비밀로 간직하기로 하면 될 것 같다. 말하자면 그건 한 인간이 성장하는 아주 자연스러운 과정이었다고나 할까? 굳이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거듭 강조하는 품새를 보니 십 년이 더 지났어도 여전히 부끄럽긴 부끄러운가 보다.     




작가의 이전글 고양이 하는 말을 듣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