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동생에게 어릴 때 있었던 어떤 일을 기억하느냐고 물어본 적이 있다. 동생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했다. 동생이 아기였을 때의 일을 물었다거나 한 것도 아니다. 초등학생 무렵이었을 텐데도 기억에 없다는 걸 보면 누구나 오래된 일을 마음에 품고 사는 건 아닌 모양이다.
나는 동생과 반대다. 서너 살 무렵의 일도 기억난다. 뇌의 외진 구석에서 까맣게 잊고 있던 기억을 찾아낸 적도 있다. 자매인데도 우리는 왜 이렇게 다를까? 자매이지만 우리는 다른 사람이기 때문에 이렇게나 다른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다른 사람이 된 것일까? 여러 가지 복합적인 요인이 있겠지만, 우리가 세상에 나오는 순간에 가지고 태어나는 우주의 기운이 서로 다른 것도 한몫할 테다.
한국에서 나고 자랐다면 사주팔자라는 말이 생소한 사람은 없을 것 같다. 그렇다면 사주팔자의 뜻은 무엇일까? 사주(四柱)는 ‘네 개의 기둥’이라는 뜻이고, 팔자(八字)는 ‘여덟 글자’라는 뜻이다. 태어난 해, 달, 날, 시간으로 기둥을 네 개 세우고, 그 기둥 아래 글자 두 개씩이 들어가 총 여덟 글자가 채워지는데, 그 여덟 글자가 ‘아이고 내 팔자야’ 할 때의 팔자인 것이다.
어렸을 때 무슨 티비 광고에서 봤던 건지, 어디서 들은 건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때 들었던 연어에 대한 이야기는 아직도 기억한다. 연어가 어떻게 생겼는지 본 적은 없었지만 알을 낳기 위해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의 이야기를 꽤나 의미심장하게 받아들였던 모양이다. 그때부터였을지도 모른다. 목표를 위해 운명을 거스르는 일에 커다란 가치를 부여하기 시작한 것은. 결코 운명을 거스르지 못한대도 삶 앞에 당당하려면 적어도 운명에 맞서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는 세상의 말들을 내 마음에 하나씩 새겼다.
사주팔자의 세계에서 모든 걸 갖춘 ‘완벽한’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애초에 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글자는 딱 여덟 개다. 존재하는 글자수는 갑을병정무기경신임계, 열 글자와, 자축인묘진사오미신유술해, 열두 글자다. 인간이 가진 것이 팔자(八字)라면 수학적으로 모든 인간에게는 결핍이 있을 수밖에 없는 셈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왜 결핍을 가지고 태어날까? 그건 함께 살기 위해서라고 나는 생각한다. 혼자서는 결코 완벽한 존재일 수 없지만, 서로에게 부족한 것을 채워주면서 우리는 조화와 균형을 배우고, 그 과정 속에서 성장한다.
그렇게나 깊은 뜻이 있어서 모든 인간이 결핍을 갖고 태어나는 것이라면, 타고난 결핍을 채우기 위해 애써 노력하는 일은 어떻게 보면 우주의 뜻을 거스르는 일일 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세상은 왜 자꾸만 노력하라고 하는 것일까? 왜 결핍은 채워야만 하는 부끄러운 것이라고 말하는 걸까? 왜 우리에게 어떻게든 함께 살지 않기 위해 혼자서 더 노력하라고 말하는 걸까?
강물처럼 시간이 흘러 이제 연어를 흔히 볼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하지만 세찬 물살을 거스르는 연어는 더 이상 의미심장하지 않다. 온몸으로 물결에 맞서 뛰어오르는 족족 불곰의 발에 가로채이고, 고생 끝에 강의 상류에 다다라 알을 낳고 나면 기진맥진한 몸은 얼마지 않아 힘없이 떠오르고 마니까. 그건 의미심장함이라기 보단 안타까움에 가까운 감정이 되었다.
세상이 요구하는 완벽함에 이리저리 떠밀리는 동안 우리는 온몸으로 팔딱거릴 수밖에 없다. 문제는 완벽함을 요구하는 세상의 물결은 끝이 없다는 사실이다. ‘너는 왜 이렇게 산만하니?’라는 사회의 요구에 우리는 얌전한 아이가 되어야 하고, ‘너는 왜 이렇게 자신감이 없니?’라는 또 다른 요구에 얌전하면서도 도전정신과 자신감이 넘치는 (이상한) 아이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세상의 요구는 끝나지 않는다. ‘당신은 사회성을 좀 길러야겠어요.’라는 핀잔에 더 외향적인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고, ‘사람은 좋은데 카리스마가 부족하네.’라는 소리에 스피치 학원이라도 등록해야 하나 고민하는 것이다.
과학기술이 발달된 사회는 우리에게 더 발전하기를 끊임없이 요구한다. 그것도 아주 혁신적으로. 그래서 우리는 사주팔자를 알아야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하는 세상의 물결에 휘말리지 않도록. 산만하다고 핀잔을 듣던 아이는 활동성이 큰 아이라는 뜻이고, 자신감이 없다고 질타를 받은 아이는 조용하게 혼자 하는 일을 잘하는 아이다. 애초에 결핍이란 결핍된 것 말고 다른 것을 가졌다는 뜻이다. 그 결핍이 없었더라면 가지지 못했을 중요한 것을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이다.
나는 결핍된 존재다. 이 결핍은 나를 다른 사람과 다른 존재로 만든다. 그리고 동시에 다른 사람과 연결된 존재로 만든다. 결핍을 인정하지 않고 물결을 거슬러 오르는 대신 결핍을 끌어안으면 어떻게 될까? 내가 끌어안은 결핍은 곧 부력이 되어 흐르는 물결을 따라 둥실둥실 떠갈 수 있을 테다. 흘러가면서 가끔 발로 물장구를 치면 물결은 우리를 더 먼 곳으로 데려다줄 것이다. 둥둥 떠서 삶의 물결을 따라 내려가는 일이 이렇게나 재미있는 일이었다니, 감탄하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둥실둥실 바다가 나올 때까지 그렇게.
커버 그림 | 고사리 <노란 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