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월, 그날은 바람까지 몹시 불어 올 겨울 들어 가장 추웠다.
야근 중이던 나는 강남역에서 이태원역에 가는 손님을 태웠다.
한남대교를 건너 한강진역을 지나자 정체가 시작되었다.
승차할 때부터 여자친구와 계속 통화를 하던 젊은 손님은 소방서 건너편에서 내렸다.
신호에 걸린 내 앞으로 이슬람 성당이 있는 골목에서 좌회전해서 나온 빈 택시가 여러 대 느린 속도로 가고 있었다.
저 앞에 택시를 타려는 여성이 있었는데 택시가 잠시 서서 흥정을 하더니 지나쳐 버렸다.
그리고 그다음 택시도 거절했고 다음 택시는 아예 무시하고 지나쳤다.
벌써 택시 7년 차인 내가 기사들의 마음을 모를리는 없었다.
아마도 가까운 곳에 가는 손님이라 승차거부 하는 것으로 짐작되었다.
그 여인은 너무 추웠는지 장갑 낀 손으로 귀를 가리고 몸을 움츠리며 괴로워하는 듯했다.
손님이 많은 이곳에 온 바에야 장거리 손님을 태우고 싶은 기사들의 마음은 이해하지만 이렇게 추운 날에 너무 냉정하다 는 생각이 들었다.
신호가 바뀌며 내 앞에 빈 택시가 없자, 나는 손님의 목적지에 상관없이 무조건 태워주리라 생각했다.
그녀 앞에 다다르자 조금 열린 창문 사이로 그녀가 '그랜드 하얏트' 하며 외쳤다.
하얏트 호텔은 가까운 남산에 있는 호텔이고 나는 창문을 내리면서 어서 타라고 손짓했다.
그녀는 뒷좌석에 승차하면서 '땡큐 쏘우 머치!' 하며 고마워했다.
내가 '유 웰컴!' 하고 말하자, 그녀는 '오우 유켄 스픽 잉글리시, 아임 러키!' 하며 활짝 웃었다.
출발하려고 했지만 보광동 방향에서 좌회전 한 차들이 꼬리를 물며 이태원역 삼거리는 마비되었다.
잠시 후 간신히 삼거리를 지났을 때 내가 물었다.
'실례지만 어느 나라에서 왔어요?' 하자
'노르웨이.'라고 말했다.
나는 다시 '정말 노르웨이에서 왔어요?' 하자,
'네, 맞아요.' 하였다.
그때 녹사평역 앞에서 신호가 적색으로 바뀌었다.
나는 기어를 파킹으로 바꾼 후 '그동안 여러 나라 손님이 내 택시에 탔는데, 노르웨이 손님은 처음이네요.' 하자, 그녀는 '정말요?' 하였다.
나는 '오늘은 정말 특별한 날이군요. 불과 약 10분 전에 라디오에서 그리그의 솔베이그 송을 들었는데, 노르웨이 손님이 내 택시에 타다니!' 하자, 그녀는 '당신이 우리나라의 위대한 작곡가 그리그를 아신다니 놀랍군요. 당신은 혹시 음악가 이신가요?' 하며 물었다.
'나는 젊었을 때 주한 미 8군 무대에서 기타리스트로 15년간 활동했어요. 그런데 지난여름에 음악이 다시 하고 싶어 져서 30년 만에 기타를 다시 연습하고 작곡을 시작했어요. 나는 자작곡을 유명한 가수들에게 보내 보았지만 반응은 없었지요. 하지만 계속 곡을 만들어 볼 계획이에요.'라고 말했다.
신호가 들어오자 나는 우회전하여 가파른 경리단길을 계속 올라가 호텔에 도착했다.
미터기의 요금은 불과 4,500원이었다.
그녀는 만 원권을 내며 '이렇게 추운 날, 너그러운 당신이 아니었다면 얼마나 고생을 더 했을지 몰라요. 감사합니다.' 하며 잔돈을 사양했다.
벨보이가 문을 열자, 그녀는 오른발을 밖으로 내딛더니, '며칠 후 인천공항에 갈 때 가능하면 이 택시를 다시 타고 싶네요.' 하자 나는 얼른 명함을 주었다.
4 일 후 늦은 오후에 '헬로-' 하며 전화가 걸려왔다.
그녀는 자신을 기억하냐고 묻고는, 내일 밤 11시 비행기로 세부에 가는데 인천공항에 갈 수 있냐고 물었다.
나는 당연히 갈 수 있다고 하자, 자신의 이름은 엠마라고 소개하며 내일 보자고 했다.
나는 차량번호를 알려주고 7시에 픽업하겠다고 했다.
다음날 나는 늦지 않도록 서둘러 나갔다.
엠마는 로비에서 나를 기다리다가 차의 번호를 확인하고 밖으로 나왔다.
키가 큰 그녀는 금발머리에 카키색 항공 점버, 청바지에 갈색 부츠 차림이었다.
벨보이가 트렁크에 짐을 싣자, 미소를 띠우며 조수석에 올랐다.
차가 곧바로 한남대교를 건너 올림픽도로를 진입하자 '이렇게 넓은 강은 처음이에요. 그런데 나는 당신이 힘든 택시 영업을 하면서 어떻게 음악에 다시 도전했는지 궁금해요.'라고 말했다.
나는 인천공항까지 도착하려면 한 시간 이상 소요되리라 생각되었고, 오늘 영어 연습하기 딱 좋은 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작년 봄에 딸이 지방대학에 입학하여 집을 떠나고, 여름에는 아들이 결혼해 집을 떠나자 북적이던 작은 집이 썰렁해졌지요.
아내는 아침에 직장에 출근하고 나는 야근을 하니 서로 얼굴 보기도 어려웠어요.
지난 6월의 어느 날 오후, 쓸쓸히 홀로 집에 있는데, '나는 그동안 살아오면서 한 가지도 성공한 적이 없고, 예상에도 없던 택시 노동자가 되어 초라한 생을 마치나 보다'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 티브이의 예술 채널에서 클래식 음악 해설이 있었어요. 강사는 브람스에 관해 강의를 하는데 '브람스는 교향곡 3번을 완성하는데 무려 6 년이 걸렸답니다.'라고 했어요.
나는 교향곡은 연주시간이 보통 한 시간이 넘는 대곡이지만, 이곡을 위해 6년의 시간을 보내다니?'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면서 나의 젊은 시절이 떠올랐어요.
밴드에서 베이스 기타를 연주하며 편곡을 맡았던 나는 실력이 소문나 다른 밴드에서도 편곡을 부탁했었지요.
그리고 어느 날 좋은 가사가 떠올라 밤을 새워 작곡을 해 보았어요.
그런데 다음날 연주해 보니 실망감이 커서 악보를 그만 찢어 버렸어요.
나는 너무 쉽게 음악을 포기한 것이 후회가 됐어요.
내가 가장 잘했던 것은 오직 음악뿐이었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나는 이미 뒤늦은 나이인 63세가 되었지만 다시 한번 작곡에 도전해보고 싶었어요.
며칠 후 우연히 아들이 중학교 입학 때 선물로 사준 통기타가 동네 교회에 방치되고 있는 것을 알았어요.
나는 아내에게 나의 계획을 설명하고 기타를 찾아오라고 했어요.
아내는 '혹시 무슨 좋은 일이 있으려나?' 하는 눈치였고, 곧바로 교회로 가서 목사님에게 이야기하고 기타를 찾아왔어요.
나는 기타 줄을 교체하고 30년 만에 연습을 시작했어요.
그리고 가사를 써 보려 했지만 쉽지가 않았어요.
그러던 8월의 어느 날, 야근을 하려고 택시회사에 도착했는데 전화가 울렸어요.
받아보니 삼십 년 전 내가 속했던 주한 미 8군 전속밴드의 리드싱어였던 조영길 선배였어요.
그는 나 보다 열 살이나 위였고 카우보이 모자를 쓰고 컨트리 송을 부르는 가수로 미군들에게 가장 인기가 있었어요.
우리는 반가워서 옛 시절을 이야기했어요.
그리고 그는 마지막으로 내가 모르는 마지막 활동을 이야기했지요.
오랫동안 이끌어 오던 밴드가 해체되자 그는 은퇴를 했대요. 그런 그에게 강변의 작은 카페에서 혼자서 노래해 달라는 제의가 들어왔었데요.
이미 나이가 육십이 넘은 선배는 젊은 손님들 앞에서 홀로 노래한다는 것이 쑥스러웠데요.
하지만 딸은 유학 가고, 아들은 군대에, 아내는 건강이 좋지 않았고, 수입이 없던 선배는
부끄러웠지만 공연을 시작했대요.
그런데 다행히 손님들의 반응이 좋았고, 정통 컨트리송을 부른다고 멀리서도 외국인 손님들이 찾아오자 업주는 그를 몇 년간 놓지 않았답니다.
나는 통화가 끝나자 선배의 마지막 공연은 이 시대 모든 아버지들의 애환이라는 생각이 들었지요.
나는 차 안에서 가사를 써 보았어요.
OLD SINGER MR. JO
어느새 늙어버린 올드 싱어 미스터 조
아직도 청바지에 카우보이 모자를 쓰고
칸츄리 뮤직을 연주하는 올드 싱어 미스터 조
우-후우우- 오 미스터 조
일단 1절을 써 놓고는 영업을 나갔지요.
아침에 퇴근 후 공원에서 2절을 아예 영어로 썼어요.
Once he was lead singer of the Kimchi Cowboy band
But now he plays alone in cafe at riverside
Singing the old sad songs, Old Singer Mr. Jo
Woo hoo- oh Mr. Jo
(한때는 김치 카우보이 밴드의 리드싱어 였지만
지금은 오직 홀로 호숫가의 작은 카페에서
칸츄리뮤직을 연주하는 올드 싱어 미스터 조
우-후우우- 오 미스터 조)
그리고 집에 가서 잠을 잔 후 일어나 후렴을 써 보았지요.
유학 간 딸이 그리울 때면 외로워지고
군대 간 아들이 그리울 때면 인디언의 슬픈 노래를
라져- 오 라져-
슬퍼하지 말아요 오 미스터 조
라져는 선배가 잘 부르는 HANK WILLIAMS의 KAW-LIGA에 인디언이 먼 곳을 향해 외치는 단어예요.
HANK는 지방공연을 가던 중 어느 지역 상점 앞에 서있는 인디언의 목각흉상을 보고 곡을 구상하게 되었데요.
나는 이 단어를 그리움으로 표현했어요.
나는 슬픈 가사를 선배가 잘 부르는 경쾌한 컨트리풍으로 만들었어요.
한번 들어보실래요?'
나는 방에서 모바일에 녹음한 OLD SINGER MR. JO를 엠마에게 들려주었다.
엠마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리듬에 몸을 흔들더니 끝부분의 우-후우우를 따라 불렀다.
음악이 끝나자 엠마는 '당신은 성공하셨군요!' 하였다.
나는 '성공 이라니요? 이제 겨우 시작인걸요?'라고 했다.
그러자 엠마는 '젊은 시절에 포기했던 꿈을 이루었으니 성공한 거예요.' 하였다.
그때 저 앞에 조명을 받은 영종대교가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이야기에 흥분해 들뜬 나 자신을 달래며 안전운행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엠마가 '혹시 담배 한 대 피워도 될까요?' 하며 물었다.
나는 승낙하며 창문을 약간 열었다.
담배 연기를 창밖으로 내뿜는 그녀의 얼굴이 무언가를 회상하는 듯했다.
내가 건넨 종이컵에 담배를 끈 엠마는 '이번에는 그동안 누구에게도 하지 못한 나의 이야기를 당신에게 해 주겠어요.' 하였다.
'저는 노르웨이의 옛 수도 베르겐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오슬로의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했어요.
졸업 후 운 좋게 저명한 여성 월간지에 입사했어요.
저는 기자로 열심히 뛰었고 회사에서 인정받았지요.
3년 차 되던 해, 영국의 유명한 축구선수를 취재하러, 얀이라는 신입 사진기자와 함께 런던에 갔어요.
취재를 마치고 펍에서 그와 함께 맥주를 마셨어요.
그는 나보다 세 살 어린 귀여운 청년이었어요.
둘은 얼큰해져 펍을 나왔는데, 근처 클럽에서 음악소리가 크게 들렸어요.
얀은 자기가 쏠 테니 들어가자고 내 팔을 댕겼어요.
DJ가 BEE GEES의 NIGHT FEVER를 틀자 얀이 나에게 춤추자고 손을 내밀었어요.
나는 어색했지만 얀은 멋지게 춤을 추더군요.
그가 점점 프로 댄서처럼 열광적으로 춤을 추더니, 마치 영화 '토요일 밤의 열기'에서의 존 트라볼타처럼 너무나 멋지게 춤을 추었어요.
옆에서 춤을 추던 사람들도 추던 춤을 멈추고 얀의 춤에 손뼉을 치며 열광했어요.
얀은 클럽의 스타가 됐지요.
나는 그만 그에게 홀딱 반해 버렸어요.
런던에 돌아오고 며칠 후 우리는 직원들 모르게 데이트를 하고 그만 뜨거운 사이가 되고 말았지요.
하지만 얀은 결혼이라는 말은 꺼낸 적도 없고, 나 역시 연하의 남자와의 결혼은 쉽지 않다는 생각이었어요.
시간이 흐르자 얀이 나를 피하는 느낌이 들었어요.
어느 날 점심시간에 화장실에 있는데 여직원 두 명이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어요.
그리고는 한 여자가 최근 입사한 사주의 조카딸과 얀이 호텔에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는 이야기를 했어요.
나는 숨도 제대로 못 쉬었고 그들이 나간 후에도 일어설 수가 없었어요.
어린 자식에게 차였다는 분노와 배신에 도저히 사무실에 버틸 수 없어 조퇴를 하고 병가를 냈어요.
즐겨보던 티브이의 연속극의 여자 배우의 목소리도 듣기가 싫었고, 인기 코메디안의 연기도 꼴 보기 싫었어요. 식사를 하려고 하면 음식이 입안을 맴돌기만 하고 목안으로 삼켜지지가 않았어요.
이러다 죽는 게 아닌가 하며 겁이 나서 병원을 갔지요.
나는 정신과 의사에게 모든 걸 털어놓았지요.
인자해 보이는 노 의사는 직장은 다시 구할 수 있으니 사직을 하고 쉬라고 했어요.
그는 약 처방을 해 주고는, 혹시 클래식음악을 좋아하냐고 물었어요.
나는 팝음악은 좋아하지만 클래식음악은 별로라고 했어요.
그는 클래식음악 감상은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는데 도움이 된다며 메모지에 몇 곡을 써 주고는 CD 몇 장을 사서 항상 음악과 함께 생활해 보라고 하더군요.
착한 나는 의사의 말을 따랐어요.
며칠이 지나자 약간 차도가 있어 외출을 했어요.
한참을 걷다가 등산로 입구에 예쁜 카페가 있어 들어갔어요.
식사를 주문하고 나니 흐르는 음악이 귀에 익었어요.
나는 이 음악이 의사의 권유로 집에서 항상 듣던 라흐마니노프의 교향곡 2번인 것을 깨달았어요.
집에서 항상 듣던 음악을 예상치 않은 곳에서 들으니 친한 친구를 우연히 만난 것처럼 너무나 반가웠어요.
창 너머 보이는 숲에 예쁜 사슴이 보이는 듯했고, 먼 들에 양들이 풀을 뜯고 있는 것 같았어요.
어머니 얼굴이 떠오르며, 늙으신 아버지가 두 팔을 벌리고 나를 부르는 것 같았어요.
그리움에 가슴이 뭉클하며 눈물이 줄줄 흘렀어요.
그동안 사랑에 빠져 베르겐을 몇 달 가지 않았거든요.
다음날 나는 기차를 타고 베르겐에 가서 부모님과 같이 며칠을 보내고 돌아왔어요.
얄미운 얀의 얼굴도 서서히 잊히더군요.
집에 와 보니 나의 사직을 안타까워하던 편집장에게서 이메일이 와 있었어요.
아시아 투어를 하며 글을 보내면 원고료를 주겠다는 내용이었지요.
그래서 이렇게 한국에 오게 된 것이에요.
나는 그동안 누구에게도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한국에 와서 택시기사에게 하고 말았네요.'
공항이 가까워지자 나는 차선을 DEPARTURE로 변경하고 2층으로 올라가 알맞은 곳에 차를 세웠다.
엠마는 나에게 요금을 넉넉히 주었고, 나는 케리어를 가져와 트렁크를 실어 주었다.
엠마는 주위에 있던 경찰에게 사진을 찍어 달라고 부탁하고는 나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그리고는 '어쩌면 노르웨이 여성지에 그리그를 좋아하는 서울의 택시기사라는 제목의 글이 실릴지도 몰라요. 안녕!' 하고는 공항 안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