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해피엔드>
때때로 어떤 이별은 완벽히 예감할 수 있다. 등을 돌리는 순간, 뒤를 돌아 나의 길로 걸어가는 순간, 적당한 안부인사를 끝마치는 순간, 생각으로만 존재하는 사람에게 지금 연락하지 않으면 아마 영원히 보기 힘들 것이라고 예감하는 순간.
이별이 같은 세계의 양끝을 향해 걸어가는 거라면 작별은 각각 다른 세계로 걸어가는 느낌
작가 정용준의 말을 빌리자면 이별과 작별의 차이는 이렇다. 이별은 같은 곳에 존재하지만 다른 곳을 향해 간다. 그러나 작별은 서로가 완전히 다른 문을 열고 사라진다. 단어가 가진 사전적 의미를 보면 어쩌면 이별이 작별보다 더 멀어보일 수도 있으나, 작별은 완벽히 다른 세계로 향하고 있기에 도리어 더 완벽한 헤어짐이라고 할 수 있다.
영화 <해피엔드>의 유타와 하야토는 어떨까. 날짜는 명확하지 않지만, 분명히 오늘은 아닌 근미래를 배경으로 하는 이 영화는 크게 두 인물에게 초점을 맞추어 진행된다. 유타와 코우는 음악으로 영혼 깊이 소통하는 친구다.
음악감독 Lia Ouyang Rusli의 웅장한 오프닝에 맞추어 해피엔드가 시작된다. 곧 어두운 지하 클럽에서 경찰들의 단속이 들어와도 굴하지 않고 음악을 즐기는 유타의 모습을 통해 그가 가진 자유로움을 엿볼 수 있다. (이때 일본의 DJ 유키마츠가 등장하면서 Sandy's Trace의 Beholden이 나오는데, 영화의 모든 음악이 존재감이 뛰어나고 아름답지만, 이 장면에 대해 모두가 입을 모아 말한 데에는 이유가 있다.. 한 번 씩 들어보시길. 사실 영화 해피엔드는 음악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는 몇 안 되는 귀한 영화이기도 하다. )
영화 속에서의 근미래 일본은 대지진의 공포에 떨고 있음과 동시에 사회 전반적인 부분에서 부패해가고 있다.학교에서는 학생들의 인권을 침해하고 재일교포 3세인 코우는 근미래 배경에서도 자이니치로서의 차별을 받는다. 이 대목에서 현재 세계에 대한 네오 소라 감독의 깊은 고민과 비판을 볼 수 있다. 구름으로 뉴스를 읽는 매우 미래적인 세상에서도 차별은 끝나지 않는다. 일상 곳곳에 스며든 파시즘은 '지진'이라는 매우 피지컬한 멸망과 결을 나란히 하며 현시대의 우리의 모습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사실 개인적인 의견으로 영화 <해피엔드>가 완벽한 '군더더기'없는 영화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록 여러 겹의 서사를 하나로 응집시키는 결속력은 서툴지언정- '잘 만든' 영화라는 점에 이견이 없는 것엔 이러한 이유도 있다. 이 영화에는 세계의 멸망에 대한 불안이 잔존한다. 이것은 관객이나 영화 속 인물들이 '느낌'으로만 체감하는 것이 아닌, 매우 육체적이고 실질적인 공포로 존재한다. 그것을 이끌어내는 것이 바로 지진이다. 영화 내내 '지진'이란 소재는 서사 속에서 대타자로 존재하며, 영화 전반에 균일한 텐션을 유지한다. 결국 지진이란 그들 세계의 균열과도 같은 것이다. 그들은 어떻게 될 것인가? 그 끝에는 과연 무엇이 있는가?
영화 <해피엔드> 두 인물의 공통된 면모를 주목하다가, 외부의 일들로 인해 점점 균열이 발생하는 두 인물의 관계를 따라간다. 여러 사건을 지나며 그렇게 친했던 유타와 코우는 멀어진다. 코우는 더이상 음악을 생명처럼 듣지 않는다. 둘을 이어주던 동아리실, 공사장 클럽은 사라지고 코우는 새로운 친구를 사귀고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뜬다. 때로는 자조적으로 행동하던 유타는 마지막으로 가장 그 다운 행동으로 학교를 떠나게 된다.
종국에 그들은 그들이 늘 헤어지던 육교의 갈림길에 선다. "이제 성인이네"라는 유타 어머니의 말처럼, 새로운 세계로 진입하는 그들의 미래에 아마 서로는 없을지 모른다. 뒤를 돈 순간, 영화의 화면이 잠시 멈췄던 순간에 유타와 코우는 예감했을지도 모른다.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이렇게 끝날 것이라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쩌면 모든 작별의 행위에는 상호간의 협의가 있기에, 그들은 서로의 갈림길로 그들을 보내준다. 헤어지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각자의 세계로 보내준다. 이들의 '헤어짐'은 이별 아닌 작별이다. 멈췄던 화면이 움직이고 유타와 코우가 각각 다른 세계로 걸어들어간다. 그렇게 오랜 시간 진동하던 한 세계가 끝났다.
사실 이 영화를 보면서 허우 샤오시엔 감독의 <밀레니엄 맘보>가 떠올랐다. 이 영화는 20세기가 끝나고 21세기로 진입한 세계가 가진 공허함을 다루는 영화인데, 영상미 뿐만 아니라 새로운 미래가 도래했음에도 불구하고 바뀌지 않은 많은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일맥상통한다고 느꼈다. 물론 밀레니엄 맘보는 해피엔드에 비해서는 좀 더 개인에 초점을 맞추어 이야기를 하고 있긴 하다. 두 영화 모두 청춘이 가진 위태로움에 대해 풀어내는 방식이 매우 아름다운 영화다. 실제로 네오 소라 감독이 허우 샤오시엔 좋아하고, 영감도 받았다고 해서 두 영화를 모두 사랑하는 이에겐 소중한 영화이기도...
사실 파시즘, 근미래, 거대한 단어들 사이에서도 이 영화가 깊이 관객들과 공명할 수 있는 이유는 '우정'이란 소재 때문이다. 가야할 곳, 가고픈 곳, 머무를 곳이 명확하지 않은 시절. 서로가 서로의 방향키가 되어주었던 이들이 이제는 각자의 길을 만들어 걸어가는 영화. 그 모든 엔딩의 끝은 관객이 생각하는 것에 달릴지 언정, 이 영화가 가진 메시지에 마음이 울렁이지 않을 이는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