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ays Dec 02. 2023

정상과 비정상, '괴물됨'과 '인간됨'의 한끗차

*영화 <괴물>에 대한 상세한 내용,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정상과 비정상, 괴물됨과 인간됨의 한끗차

고레에다 히로카즈 <괴물> 리뷰



‘정상성’의 세계는 연약하다.

도로와 인도를 구분하는 하얀 안내선처럼, 그 안내선을 따라 걷다가 다른 색을 밟으면 곧바로 지옥이듯이.


그러나 그 세계는 견고하고 동시에 잔인할 정도로 배타적이라서 많은 이들을 순식간에 지옥으로 보내버리기도 한다.     



영화 <괴물>은 크게 세 파트로 나뉜다. 하나의 사건을 중심으로 흐르는 시간을 세 개의 관점에서 전달한다. 첫 번째는 미나토의 어머니의 '사오리'의 관점이다. 그녀의 관점에서 아들은 점점 일상에서 벗어나는 인물이다. 늦도록 귀가하지 않고, 물통에 물이 아닌 흙을 가지고 온다. 미나토는 갑작스레 질문을 던진다.


"돼지의 뇌를 이식한 인간은, 인간일까 돼지일까?"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께름칙한 질문. 그녀는 그것을 그저 아무렇지 않은 척 넘기지만, 아들의 기묘한 변화를 보며 느끼는 그녀의 불안감을 통해 우리는 어쩌면 '돼지의 뇌'를 이식한 괴물이 '미나토'가 아닌가?라는 질문과 마주한다.


미나토가 늦도록 귀가하지 않던 날, 사오리는 산으로 향한다.

그곳에서 '괴물은 누구게?'라고 외치고 있던 미나토를 되찾는다. 그리고 차를 타고 함께 집으로 돌아오며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아버지가 떠난 후, 미나토가 (정상적으로 규범화된) 가족을 만드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라고 이야기하자 아들 미나토는 곧 달리는 차 문을 열고 뛰어내린다. 우리는 이 장면을 통해 미나토가 사회가 규정한 ‘정상성’의 궤도에서 벗어난 인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사고가 난 후 병원에서 검사를 진행한 미나토. 사오리는 미나토에게 너에겐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말하지만, 미나토는 자신의 뇌에 돼지의 뇌가 들어있는 것 같다고 말한다.


그녀는 이러한 아들의 비정상적 행동이 담임 호리 선생으로부터 기인했다고 확신하고, 학교와의 싸움을 시작한다.  




파트 2는 담임 '호리'의 시점에서의 상황을 그린다. 학교의 '교장'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어른들의 각자 ‘괴물’됨, 그리고 ‘피해자 됨’에 대해 이야기한다. 가해자(괴물)가 되었다가 순식간에 피해자가 되는 사람들. 괴물됨과 피해자됨은 한끗차이고, 그 속에 무수히 많은 사람들의 분노와 상처, 대립과 갈등이 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와 각본가 사카모토 유지는 인간모습의 복잡함, 그 속에 존재하는 다층적인 어둠에 대해 다룬다.


차로 치어 손녀를 죽였다는 소문이 도는 학교의 교장. 교장은 마트를 돌아다니는 아이에게 발을 걸고, 자신과 손녀의 자신을 일부러 잘 보이는 곳에 둠으로써 다른 이의 죄책감을 유발하도록 하지만, 그 슬픔의 무게가 어떻게 그녀의 삶을 요동치게 만들었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그녀는 계속해서 학교의 바닥에 들러붙은 것을 긁어낸다. 마치, 회색의 옷을 입고 바닥을 긁어내는 그녀의 모습은 죄를 받는 수형자처럼 보인다.


사오리는 미나토를 위해 호리선생의 사죄를 받아야 하고, 호리는 자신의 결백을 증명해야 한다. 교장은 자신의 학교를 지키기 위해 손녀의 죽음을 무기로 내세운다.

호리 선생이 ‘당신의 아들이 요리를 괴롭힙니다’라고 말하는 순간, 사오리는 ‘당신이 걸즈 바에 다니는 것을 알고 있다’라고 하며 그에게 방화의 죄를 묻는다. 자신에게 있어 가장 연약한 부분이 건드려지는 순간, 모두가 괴물이 된다.


학교에서 해고당한 호리는 학교로 향해 미나토에게 '괴물'처럼 기괴하게 다가가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느냐 묻는다. 미나토는 틈을 타 도망치지만, 사고로 인해 계단에서 떨어진다.


호리는 자살을 하러 학교 지붕에 오른다. 그러나 그때, 뱃고동 소리 같은 브라스 소리가 들려온다. 그가 그곳에서 어떤 생각을 했는지 우리는 알 수 없지만, 그 소리가 그를 살렸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감옥에서 남편과 면회하며 배를 접었던 교장의 이미지와 겹쳐지면서, 어쩌면 그 '뱃고동'과 같은 브라스 소리가, 무언가 출발하고 세상으로 나아가는 소리로 들렸을 수도 있다고 짐작한다.


집으로 돌아간 호리는 금붕어를 죽이려다가 만다. 그리고 그는 우연찮게 아이들의 장래희망 글짓기 종이에 물을 엎지른다. 그것은 요리의 글이었다. 그리고, 오탈자를 검수하자


호시카와 요리와 무기노 미나토


라는 글자와 마주한다. 그 찰나의 순간, 호리는 자신이 완전히 틀렸음을 깨닫는다. 그는 자신의 오류를 바로잡기 위해 달린다.





그리고 파트 3. 영화는 어른들의 시선이 배재된 채로 오롯이 아이들만의 이야기를 담는다. 


미나토는 동성친구보다 여성친구가 더 많고, 반의 남자아이들에게 따돌림을 당하는 요리에게 '어떠한' 감정을 느낀다. 둘은 다른 학우들이 없을 때 비로소 친구로서 존재한다.


미나토는 요리가 쓰다듬은 자신의 머리카락을 자르는 방식으로 스스로의 감정을 부정한다. 그리고 동성에게 사랑을 느끼는 자신의 뇌가 어쩌면 ‘요리’가 그러하였듯(요리의 아버지가 요리에게 말하였듯이) 돼지의 뇌가 이식된 것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영화의 시선이 달라지자 오해 속에 숨겨져있던 수많은 이야기들이 드러난다.

사오리가 터널에서 미나토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오던 날, 미나토가 차문을 열고 뛰어내린 것은 그가 '이상해서'가 아니었다. 휴대폰에 울린 요리의 전화. 오직 그 전화를 받기 위해서 소년은 달리는 도로 위로 몸을 던졌다.


요리와 미나토는

 이마에 자신을 볼 수 없는 낱말 카드를 붙이고 게임을 진행한다. 그 게임을 시작하기 위해서 '괴물은 누구게?'라고 말해야 한다. 이것은 결국 어른들에게서 부정당한 아이들이 ‘어떻게 해서라도’ 자신을 긍정하기 위해서 만든 일종의 발악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동시에 이 게임은 미나토와 요리가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는 둘만의 행위이기도 하다.


그 속에서 미나토가 '나무늘보'카드를 든다. 요리는 그 동물은 위험에 닥치면 온몸에 힘을 빼고 항복한다고 말한다. 그러자, 미나토가 묻는다.

"나는 호시카와 요리입니까?" 힘을 소진한채로 늘어진 나무늘보는 가정폭력의 피해자인 요리의 이미지와 겹쳐진다.


요리와 미나토는 그들만의 열차를 꾸민다. 천장에 행성을 달고, 조명을 켠다. 어두운 터널을 지나 존재하는 그들만의 우주. 버려진 열차이지만 그들만의 요새인 그곳에서 요리와 미나토는 서로를 부정하다가, 긍정하고, 확인한다.


 수많은 감정의 탈각 속에서도 여전히 남아있는 애정. 미나토는 여전히 요리가 전학가지 않기를 바라고, 요리가 오기를 바라며 폐허가 된 열차 안에서 불을 켜고, 축축한 터널에서 자신을 알아봐주기를 바라며 라이트를 켠다.     


그렇지만 미나토는 요리를 좋아하는 것을 누군가에게 말하면 모두가 행복해질 수 없음을 안다. 미나토가 교장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하자, 교장은 브라스를 건넨다.


둘은 브라스를 불며 세상에 꺼낼 수 없는 말을 한다.  소리는 발화되지 않지만 '음성'이다. 언어가 가닿을 수 없는 그곳에 존재하는 인간의 마음.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이 장면이 영화가 향해야 할 길"이라고 하였듯, 인물들은 마음 속에 자리한 수많은 엉킴을 악기의 소리로 표출한다.




그리고 모두를 휩쓸어갈 수 있는 태풍이 온다. 빅크런치가 온다. 미나토는 요리를 만나기 위해 달렸고, 호리와 사오리는 아이들을 되찾기 위해 달린다. 미나토는 아버지에게 폭행당한 후 마치 나무늘보처럼 늘어져 있는 요리를 욕조에서 끌어낸다. 그리고 그들이 그들 다울 수 있는 '그들만의 요새'로 달린다.


자연 앞에서 인간은 평등하고, 아들에게 폭력을 가하던 요리의 부父는 폭풍에 미끄러진다. 요리와 미나토는 ‘빅크런치’와 만날 준비를 한다. 사이렌이 울려 퍼지고 모두가 두려움에 떨지만, 폐허가 된 열차의 앞으로 다다라 핸들을 돌리며 나아갈 준비를 한다. 폭풍 속에서도 출발할 준비를 한다.



다소 엉뚱하고 상상력이 풍부한 요리가 이야기하는 '빅 크런치'는 모호하다. 이것은 태초, 그러니까 현재의 정상성과 비정상성이 존재조차 하지 않았던 세계를 뜻한다. 일종의 유토피아와 같은데, 한 가지 다른 것은 ‘빅크런치’는 세상을 파괴하는 방식으로 이 세계에 온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빅크런치’는 기회다. 무슨 기회냐면, 세상이 바뀔 수 있는 기회다.


어른들이 미나토를 이해하고 요리를 구해낼 수 있는 기회다. ‘기회’는 일시적이고 단편적이다. 그렇기에 어쩌면 그런 일은 일어날지 않을지도 모르고, 여전히 누군가는 정상성과 비정상성을 구분 지으며 자신도 모르는 새에 괴물이 될 수도 있다.



‘빅크런치’가 오기 전, 산속에서 뛰어놀던 아이들은 기찻길을 가로막은 철창을 만난다. 그러나 태풍과 산사태를 만난 후 밝은 세상 밖으로 나온 아이들은 철창 하나 없는 기찻길을 달린다. 그것은 환상일까, 현실일까. '빅크런치'로 인한 결과가 어떠하든, 그들은 그들의 그들됨을 인정하였고 나아가 계속해서 달린다.


"우리 다시 태어난 걸까?"

"그런 건 없는 것 같아."


라고 말 하는 아이들의 모습. 그들이 다시 태어나는 것은 결국 '현재'에 대한 부정이기에. 미나토와 요리는 자신들을 긍정하는 결말과 마주하며 영화는 끝난다.






어른들의 룰과 "정상성", 규칙과 관습으로 점칠된 세계는 어떻게 하여도 아이들의 세계에 완벽히 가닿을 수 없다. 어른들은 도식화된 기표이고, 아이들은 기의다.


그들만의 세계에서 태어나고 시작되는 애정을 입으로 꺼낼 수 없어서 차마 거짓말을 해야 하는 아이들, 서로가 올 때까지 불을 켜놓고 기다리는 아이들, 어른의 협박과 폭력에도 좋아하는 마음을 감출 수 없는 소년들이 있다.


그 소년들의 뇌에는 돼지의 뇌 같은 것이 있는 게 아니다. 끔찍하고 무섭고 이상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 소년들은 서로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다. 내내.     


그러니 긴 태풍을 지나고 나올 아이들에게 우리는 철창으로 막힌 길이 아닌, 아이들이 영원히 뛰어갈 수 있는 길을 만들어주어야 한다.

새로 태어나지 않아도 서로를 만나고 같이 있을 수 있는 곳을 만들어주어야 한다.


아이들이 흙탕물을 뒤집어쓰지 않고도 머물 수 있는 곳이 필요하다. 아이들이 스스로를 괴물이라고 생각하지 않도록. 누군가를 사랑하는 감정이 ‘이상한 것’으로 치부되지 않도록. 그리하여 모두와 같은 행복을 누릴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는 도로와 인도를 나누는 안내선 처럼 너무나도 연약하다. 그곳에 너무 쉽게 나갔다가 들어올 수 있는데도, 우리는 그 선 밖으로 나가면 지옥으로 떨어진다고 한다.


그런데 그 지옥에 떨어져도 괜찮다고 해주는 것. 나아가 그건 지옥이 아니고 네가 있는 곳이 어디든 그곳이 네가 있을 곳이 맞다고 해주는 사람이 단 한명이라도 있다면 아이들은 숨지 않아도 된다. 거짓말을 하지 않아도 된다.


‘이상하고 아름다운’이라는 말에 대해 생각한다.

창문으로 몰아치는 바람에 휘날렸던 괴물 카드. 미나토와 요리가 그린 괴물은 새카맣고, 이상하게 생겼지만 여전히 하트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심장에서 가장 가까워서 사랑을 상징하는 기호가 된 하트.

 "괴물은 누구게?"라고 물으며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던 그들에게 있어 '괴물'은 언제나 이상하지만 아름다웠던 '사랑'이었다.


 그들 스스로가 아름답고 서로가 아름답듯이. 그리하여 그 아름다움의 행복이 그들과 무관하지 않음을 증명해 주는 것. 

그것이 때때로, 혹은 자주 괴물이 되고야 마는 이 세계의 어른들, 그리고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자 진정한 '행복'의 가치인 것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