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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ys Apr 02. 2024

관계의 순간과 시절 사이를 통과하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영화 <로봇 드림> 리뷰


*영화 <로봇 드림>의 상세한 내용,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

어제 꿈에 네가 나왔어
추신. 나도 네 꿈을 꿔


한때 영화광들을 울리게 만들었던 영화 <윤희에게>의 대사다. 마음은 서로를 향해 있었지만, 가닿을 수 없었던 세월을 아름답게 담은 영화에서 핵심적인 대사는 '꿈'이다. 사실 이 말은 사랑한다는 뜻과도 같다. 차마 입밖으로 내뱉을 수 없는 어떤 소중하고 고귀한, 그래서 말로 뱉으면 사라져버릴 것 같은 감정을 '꿈을 꿨다'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물론 실제로도 그 인물들은 서로의 꿈을 꿨을 것이다. 그러나 어떠한 이상향, 목적, GOAL을 의미하는 단어 '꿈'과, 실제로 수면상태에 머물렀을 때 경험하게 되는 무의식의 세계를 뜻하는 단어 '꿈'이 같은 단어인 것을 보면 '꿈'이라는 것은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인간의 욕망이 담긴 현상적 용어라는 것은 확실하다.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할때면 주관적인 개입의 목소리를 배제하는 편이다. 왜일까. 나도 잘 모르겠다. 영화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싶은 나의 무의식이 반영된 것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영화는 내가 느낀 '감정'을 빼놓고는 이야기할 수 없을 것 같다. 대사 하나 없이 나를 흠뻑 울려버린 영화, <로봇 드림>이다.





전자레인지에 정크푸드를 데워먹고, 홀로 누워 게임을 하던 도그는 문득 TV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보기 싫어진다. 그는 우연히 발견한 로봇친구 광고를 보고, 망설임없이 반려 로봇을 구매한다. 창가에서 로봇이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열과 성을 다해 조립한다. 로봇은 무겁고 커다랗지만, 눈을 뜨자마자 도그에게 웃어준다. 마치, 태어나자마자 당신을 사랑한다는 듯이.






도그는 홀로 다녔던 곳, 가보고 싶었던 곳에 로봇과 함께 간다. 둘도 없는 친구가 되어 세상을 누빈다. 그러나 영원할 것만 같았던 '함께하는 즐거움'도 잠시, 로봇이 바다에 갇혀버리는 일이 발생한다. 수영을 하다가 그만 고장이 나버린 것이다. 도그는 로봇을 구하기 위해 그를 두고 집에 가서 방도를 찾는다. 그러나, 해수욕장을 폐장했고 도그는 들어갈 수 없게 되었다. 결국 그는 냉장고에 '로봇을 되찾아올 것'이라는 메모와 함께 다시 로봇이 없는 삶을 살게 된다. 그는 종종 로봇이 집으로 돌아오는 꿈을 꾼다.


그러나 도그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서 점차 로봇을 잊는다. 냉장고에 붙어있던 메모는 가려지고, 새로운 친구도 사귄다. 하지만 그 시간 동안 로봇은 일어서지도 못한채로 해변가에 누워 오직 하늘을 바라본다. 그리고, 꿈을 꾼다. 로봇의 꿈은 집으로 돌아가는 꿈이었다가, 시간이 흐를 수록 도그의 곁에 새로운 로봇이 들어오는 꿈으로 변화한다. 꿈속에서 로봇은 새로운 로봇을 피해 숨어버리고, 새로운 로봇은 위풍당당한 비웃음을 던지며 도그와 함께 그들이 살던 집으로 돌아간다.


계절이 변하고, 바다가 얼고, 해수욕장에 배를 타고 불시착했던 카누 선수들이 로봇의 다리를 잘라도, 로봇은 웃는다. 가끔 로봇이 꾸는 꿈에는 웃는 도그가 나온다. 멈춰버린 세상 속에서도 여전히 도그를 사랑하는 로봇의 모습은 애처롭기도, 슬프기도 하다. 그리고, 영화를 감상하는 우리는 새로운 인연을 만나 로봇을 잊어가는 도그가 원망스럽게 느껴지기도 한다.




어쩌면 나는 이 둘이 다시 만나는 해피엔딩을 상상했는지도 모르겠다. 계속해서 도그가 로봇을 데리러 가길, 로봇이 되살아나서 도그를 찾아가기를 바랐으니까. 내 상상은 사랑했던 사람을 계속 사랑하는 일이 완벽하다고 믿고있었던 다소 빈약한 신념으로 부터 기인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영화는 두 인물을 전혀 다른 방향으로 데려간다. 도그는 로봇을 다시 찾았지만, 로봇을 그곳에 없었다. 도그는 새로운 반려로봇을 들였고, 고물상에 팔려간 로봇은 호텔의 엔지니어 라스칼을 통해 새로운 몸을 얻어 그의 친구가 된다.


둘은 그렇게 각자의 삶을 살아간다. 때때로 서로의 생각을 하면서. 어떤 순간은 다음을 기약하지 않고도 영원히 살아갈수 있는 기억이 된다. 로봇과 도그는 서로가 나오는 꿈을 꾼다. 이 둘의 관계에서 (굳이) 을을 골라야 한다면 그것은 반려 로봇일 것이다. 그는 해변에 남겨진채로 도그가 오기를 기다려야만 하는 존재였으니까.





 그러나 영화의 마지막에서 관계의 을인 로봇은 자신의 선택으로 도그를 보내준다. 창밖 너머로 우연히 마주한 다른 로봇과 있는 도그의 모습. 로봇은 도그와 함께 좋아했던 노래 september을 크게 튼다. 라디오가 몸통이 되어버린 자신의 몸을 통해, 그에게 이 노래가 가닿을 수 있게 크게 볼륨을 높인다. 그와 함께했던 노래를 크게 틀고, 함께 있지는 않지만 그를 내려다보면서 춤을 춘다. 함께였던 그때와 똑같이 웃으며 그를 보낸다.


그에게 뛰어가서 그와 재회하는 상상(dream)도 하지만, 로봇은 그러지 않는다.  로봇의 옆에는 다시 그를 세상에 데려온 새로운 사람이 있다. 로봇은 울지 않는다. 우는 법을 몰라서일 수도 있다. (만약 이것이 로봇이 아니라 사람이라면) 맞다. 어쩌면 상처는 지워지지 않을 지도 모른다. 새살이 돋는다는 말은 거짓일수도 있다. 로봇은 그렇지 않으니까. 그러나 부러진 다리를 새로 바꿔주고, 몸통이 라디오여도 그를 사랑해주는 이가 옆에 있다. 로봇은 슬픔을 느끼지는 못할지언정 사랑은 분명히 안다. 사랑이란 누군가의 곁에 있어주는 것이다. 그렇기에 로봇은 라스칼의 곁에 머물기를 택한다.




관계는 영원하지 않다. 누군가와 만날 수도 있고, 헤어질 수도 있다. 다시 이 영화를 곱씹으며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이 순간에, 나는 이 영화와 별개로 고민한다. 더 사랑하는 게 정말로 지는 일일까? 그것은 누군가를, 무언가를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의 특권이자 권력이 아닌가. 얕은 사랑을 하는 이들은 감히 들어갈 수 없는 초월의 영역. 누군가를 너무 사랑해서 놓아줄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진정한 사랑의 형상이자 현상이 아닌가.


영화 <로봇 드림>. 로봇이 꾸는 꿈. 꿈이라는 달콤하고도 잔인한 장소, 그곳에서 만나는 보고싶었던 사람,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일들. 그 모든게 순간이고 눈 뜨면 날아가는 '꿈'인들 어떠하리. 지금의 곁에는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이 있고, 우리는 그 순간을 기억에 새기며 또다른 꿈을 꿀 뿐이다.




끝까지 영화 속의 모든 캐릭터들이 웃고있어서 더욱 아름다웠던 영화. 대사 없이도 섬세하게 감정을 어루만진다. 오랜만에 만난 귀한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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