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은꿀 May 11. 2023

마드리드 #0 - 아이들이 가득한 기내에서

뒷 자석의 싸커킥을 맞아도 난 괜찮아.

밤 11가 넘어 아부다비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3월 중반을 향해 달려도 겨울의 찬바람이 휘몰아치던 서울과 달리 깜깜한 밤 중에도 따뜻한 중동의 온기가 멀리 나왔음을 일깨워준다.


인천-아부다비 (EY857편) - 총 10시간 30분의 비행 후 아부다비에 도착했다.


레이오버 3시간.

빡빡한 일정은 아니지만 환승 편 동선을 미리 파악해 두면 라운지에서 더욱 편하게 쉴 수 있을 것 같아 분주하게 움직여본다. 서두른 발걸음 탓일가. 분명 여러 인종이 뒤섞인 그룹에서 앞서거니 뒷서거니 걸었던 것 같은데 어느새 동양여자 한 명이 걸어 다니는 것이 어떤 볼거리가 되는 것처럼 부담스럽고 길고 느린 시선들이 쫓아오는 곳에 나홀로 던져져 있다.


'Hello? This is the 21st century for god’s sake!' (Urr -_-)


한국을 떠나기 전에 히피펌 풀어 헤치고 기존세로 걸어 타닐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남편을 안심시켰던 건 분명 우수갯 소리였지만 지금 내 발걸음이 더욱 빨라지는 걸 보면 아무래도 그 말들은 내재된 두려움에 대한 무의식적 방어기제였던 것 같다. 늘어져 따라오는 이 시선들.. 정말 싫다.


게이트에 도착해서 편명을 더블체크하니 온몸에 피로가 쏟아진다. 얼른 라운지에 가서 시원한 음료도 좀 마시고 몇 장 남은 '돈 키호테, 라만차의 기발한 기사'도 마저 읽고 불편한 시선이 없는 곳에서 편안히 쉬고 싶다.


아부다비 국제공항 라운지 (PRIORITY PASS 이용) - 새벽 1시 이후에는 앉을 자리가 거의 없을만큼 붐볐다.


——


다행히 보딩은 딜레이 없이 시작됐다. 마드리드까지는 다시 8시간을 더 가야 하고 도착 예정시간은 아침 8시기 때문에 반드시 기내에서 시차를 맞추리라 숙면의 결의를 다졌다.


등받이 쿠션이며 담요며 완벽하게 세팅하고 추가 쿠션을 더 받아서 다리받침으로 놓으니 남부럽지 않은 이코노미석이 완성되었다. 이런 게 작지만 확실한 행복이 아니겠는가. 혼자만 아는 만족감으로 입술 근육이 씰룩 움직인다.


거대한 배낭을 짊어진 젊은 커플이 다가온다. 캐리온으로 부적합 한 사이즈일 것만 같은 그 배낭들을 덜커덩 텅텅 투박하게 올리고는 "Sorry" 하며 안 쪽 두 좌석을 가리킨다. 아. 이 스페인 커플이 내 비행 메이트구나. 그래도 듀오링고로 며칠 공부해서 이탈리아어와 스페인어 정도는 구분 할 수 있게 됐다. 우훗. 역시나 혼자만 아는 만족감으로 내적 미소를 지어본다. 그런데 그 때,


“퍽!!!!”


뒷자리 꼬마의 발길질에 좌석 3개가 동시에 흔들렸다. 기내에 착석하고 세팅하는 그 순간들에 발생할 수 있는 뭐 늘 발생하는 그런 사소한 일이겠거니 다시금 머리 위치를 재세팅하고 얌전히 눈을 붙이려는 그 순간,


“아~~아아아아아~~~”


단순한 울음의 데시벨이 아니었다. 아기가 아닌 여덟아홉 살은 되어 보이는 몸집의 거대한 어린이가 마치 타잔을 빙의한 것마냥 소리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이대로 숙면에 대한 희망은 사라지는 것일까. 그래도 아이의 부모가 어떻게든 통제를 하겠지 - 이런 믿음과 매정한 눈빛으로 주의를 주는 불편한 타인은 되고 싶지 않다 - 이런 생각으로 몇 분을 버텨 보았지만 소용없었다. 숙면의 계획이 흐트러진 나는 조금씩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승무원에게 말을 할까 뒤돌아 최대한 정중하게 부탁을 할까 몇 번을 두리번 두리번 거리던 나는...


... 이내 조용히 눈을 감았다.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승객들이 정말 단 한 명도 예외 없이 너무나 편안한 마음으로 이륙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옆에 커플들도 다시 담요로 전신을 덮고는 숙면의 세계로 다가가기 위해 집중하고 있었고 그 누구도 소음에 대한 불편함을 공유하고자 두리번 거리고 있지 않았다.


'!'


순간 나와 그 아이를 제외한 모든 승객들이 '어른' 처럼 보였다. 나는 이렇게 아직도 사춘기 소녀처럼 툴툴거리는데… 이 사람들은 '이해'하고 '불평'하지 않는구나. 맞다. 생각해 보면 새벽 2시에 마드리드로 넘어가는 이 8시간의 비행은 정말 그 누구에게도 쉽지 않다. 하물며 한창 뛰어다니고 응석부릴 나이의 어린이들에게는 어떨까. 부끄러웠다. 그래. 나의 불편함 말고 저 아이의 불편함을 이해해 보자. 이 기회로 조금 더 어른다움을 갖춰보자. 머리를 조금 더 기울여 눈을 감았다. 몇 번의 툭툭.퍽.이 지나간다..

스.르..륵


———


“Would you like to drink coffee or tea?”

“!! Uh??? Ah! Coffee with lots of sugar, please”


벌써 도착이란다. 

잘 잤다. 식사 시간도 놓치고 푹잤다. 요란스러운 뒷자리는 새까맣게 잊고 정말 잘 잤다. 따뜻한 종이컵을 두 손으로 받아드니 더욱 좋다. 내가 원하는대로 설탕 두 팩을 툭툭 다 털어 휙휙 젓고 맛을 보니 '하아...' 너무너무 좋다. 


그래 이 번 여행은 기존쎄고 뭐고 조금 으른답게 성장 할 수 있는 여행을 해보자.


Mi amor, Madrid! 내가 또 왔다. ;)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