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 돈조반니 관람 후기
(오랜만에 글을 올립니다. 연재를 준비하느라 시간이 소모되었군요.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I. 나쁜 남자 증후군
대학 1학년 여름방학을 마치고 2학기 개강을 했을 때였습니다. 같은 대학에 다니는 고등학교 동문회에 참석했는데, 군에 갔다 와서 복학했다는 선배가 참석했습니다. 그 선배는 인상이 별로 좋지 않았는데, 느낌대로 얘기하면 족제비상에 양아치 같은 분위기를 풍겼습니다. 게다가 앉자마자 어떤 여학생을 꼬셨느니, 몇 명 하고 잤느니 등등 참으로 저질스런 얘기를 자랑스럽게 늘어놓았습니다. 게다가 그 선배와 같은 과에는 학교 전체에서 소문난 미모의 여학생이 있었는데, 그 선배는 자기가 이미 작업에 들어갔기 때문에 가을이 가기 전에 그 여학생과 자고, 자기 여자를 만들 거라는 얘기를 떠들었습니다.
전 속으로 코웃음을 쳤습니다. 그 선배가 떠드는 얘기가 다 뻥으로 생각됐고, 얼굴도 별로, 체격도 왜소, 성격은 거지 같은 그 선배가 학교 최고의 미인을 얻는 데 성공하리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청아한 가을하늘 아래 캠퍼스를 걷고 있었는데, 선배가 그 미모의 여학생과 팔짱을 끼고 걸어오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선배는 저와 마주치자 한쪽 눈을 찡긋했고, 전 어이가 없어서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습니다.
그 일은 저에게 왜 여자들은 나쁜 남자를 좋아할까라는 큰 궁금증을 남겼고 그 이후에도 그 비슷한 일들은 종종 있었지요. 그 일들은 교회오빠 스타일의 전형적인 착한 남자인 저에게는 콤플렉스이자 풀기 어려운 숙제로 남아있습니다.
II. 나쁜 남자 돈조반니
천하의 바람둥이이자 나쁜 남자인 돈조반니를 보기 위해 예술의 전당 오페라극장을 찾았습니다. 베세토 오페라단의 작품입니다.
돈조반니는 모차르트의 3대 오페라 또는 4대 오페라에 꼭 들어가는 유명한 작품이지요.
스페인 세비야의 귀족이자 부자인 돈조반니는 가면을 쓰고 결혼을 앞둔 돈나 안나의 침실에 침입해 그녀를 범합니다. 그러나 자기의 약혼자가 아님을 눈치챈 그녀의 저항을 뿌리치고 달아나다 뜻밖에도 그녀의 아버지인 기사장과 싸우던 끝에 그를 살해합니다.
돈나 안나는 슬픔 속에, 약혼자 돈 오타비오와 함께 원수를 갚기 위해 그를 추적합니다.
한편 돈조반니는 그 와중에도 시골 마을에서 결혼을 앞둔 체를리나를 유혹해 그녀를 범하기 일보 직전까지 갑니다. 그러나 자기가 과거에 사귀다가 차버린 돈나 엘비라의 방해로 실패합니다.
돈조반니는 이번에는 시종인 레포렐로와 옷을 바꿔 입고, 어둠을 이용해 자신은 돈나 엘비라의 하녀를 유혹하고, 레포렐로는 돈나 엘비라와 잠자리를 갖습니다.
하지만 자신에게 원한을 품은 모든 사람에게 쫓긴 그는 시종 레포렐로와 묘지로 도망칩니다. 그곳에서 자신이 죽인 기사장의 석상이 말을 하는 뜻밖의 상황에 부딪히지만 그는 놀라지 않고 석상을 만찬에 초대합니다.
만찬에 온 석상은 돈조반니에게 잘못을 뉘우칠 기회를 주지만 돈조반니는 이를 거절하고, 그에게 원한을 품은 이들에게 죽임을 당합니다.
오늘 돈조반니 역을 맡은 우경식 바리톤은 최고였습니다. 3일간의 공연 중 매일 돈조반니 캐스팅이 바뀌는데, 오늘 공연으로 끝나는 우경식 님은 모든 걸 다 쏟아붓는 듯했습니다. 속에 있는 걸 다 뱉어내는듯한 창법은 후련했고 힘 있는 액션은 박진감이 있었습니다. 유튜브로 국내외 몇몇 돈조반니 작품을 봤지만 대부분 주인공 돈조반니는 4,50대의 중년으로 보였던 것에 비해 우경식 돈조반니는 젊고 잘생기고 매력이 넘쳤습니다. 저런 나쁜 남자라면 여자들이 반할만하겠다 싶었습니다.
III. 돈나 엘비라의 심리는 무엇일까?
돈조반니를 사랑했으나 그에게 버림받고 원한을 품게 되는 돈나 엘비라. 그녀는 돈조반니가 다른 여자를 유혹해 성공하기 일보직전에 나타나 방해합니다. 특히 체를 리나를 아슬아슬하게 구한 후에 돈조반니의 정체를 얘기해 주며 조심할 것을 당부합니다.
그러나 막상 돈조반니가 시종 레포렐로와 옷을 바꿔 입고 그녀를 유혹하자 그녀는 돈조반니가 자신에게 돌아온 것으로 알고, 가짜 돈조반니인 레포렐로와 뜨거운 밤을 보냅니다.
그녀는 돈조반니를 진짜 사랑한 것일까요? 애증이 교차하는 그녀의 심리는 참으로 미묘합니다.
천하의 바람둥이인 돈조반니의 정체를 알고 미워하지만, 그가 자신에게로 돌아오면 망설임 없이 그를 다시 받아들이는 돈나 엘비라에게서 나쁜 남자에게 끌리는 여자들 모습의 단면을 봅니다.
오늘 돈나 엘비라 역의 김라희 소프라노는 뜨거운 열연을 보여주었습니다.
IV. 두 얼굴의 사나이 레포렐로
돈조반니의 시종인 레포렐로는 극의 참여자이면서 서술을 하는듯한 묘한 역입니다. 맡은 사람에 따라서 극을 끌고 갈 수도 있고, 묻힐 수도 있습니다.
오늘 레포렐로 역을 맡은 손혜수 베이스님은 ‘아름다운 당신에게’ 스페셜 DJ로 친숙하고, 애정이 가는 성악가라 기대가 컸는지 1막에서는 워낙 뜨겁게 분출하는 다른 출연진에 묻힌 듯해서 안타까웠습니다. 그러나 2막에서는 자신의 진면목을 여지없이 보여주었습니다.
공포와 욕망, 돈조반니에 대한 멸시와 부러움, 주인에 대한 배신감으로 떠나려다가 돈에 다시 끌려오고, 수많은 여인들을 범하는 돈조반니에게 욕을 내뱉지만, 식탁에 떨어진 음식을 핥는 개처럼, 돈조반니가 흘린 여인을 탐냅니다.
그를 보면서 관음증에 빠져있으면서 동시에 그런 타인을 비난하는 우리 남성들의 모습을 봅니다.
때론 비굴하고, 또 다른 때는 탐욕스러운 우리는 레포렐로와 얼마나 다른지 의문입니다.
그런 레포렐로의 모습을 때론 코믹하게, 때론 갈등에 사로잡힌 모습으로 표현한 손혜수 님은 희극과 비극이 묘하게 섞인 이 오페라 그 자체를 대변했습니다.
V. 연출의 중요성
요즘 젊은이들은 뮤지컬은 재밌는데, 오페라는 지루하다고 합니다. 물론 오페라의 스토리나 음악이 몇 세기 전인 탓도 있겠지만, 워낙 화려하고 볼거리 많은 뮤지컬에 비해 오페라는 단순하다는 것도 큰 요인중 하나일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돈조반니는 정말 눈요기 거리가 풍부했습니다.
실사에 가까운 다양한 막을 배경으로 적극 활용했고, 조명도 적극 활용해서 사실적이고도 다양한 장면을 연출했습니다. 마치 영화를 보는듯한데 눈앞에서 실연이 펼쳐지는 멋진 경험이었습니다.
서곡이 연주될 때 주요 스텝과 출연진의 영문 이름이 배경 막에 조명으로 흐른 장면은 정말 영화 같았고, 레포렐로가 돈나 엘비라에게 돈조반니가 잠자리를 한 여인들이 얼마나 많은지를 이야기할 때 뒤의 막에 여인들의 이름이 조명으로 흐른 장면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오늘처럼 오페라에서 연출이 돋보인 적은 없었지요. 오늘 연출을 맡은 홍민정 님께 따뜻한 박수를 드렸습니다.
VI. 우리나라에서 19금 오페라를?
오늘 연출에서 주목한 또 하나는 19금 장면의 처리였습니다.
얼마 전에 본 오페라 카르멘에서는 19금 장면을 너무 점잖게 표현해 리얼리티가 확 떨어진 부분이 매우 아쉬웠습니다. 그리고 저는 우리나라 오페라에서 19금 장면을 표현하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생각은 대표적인 19금 스토리인 돈조반니를 보러 간 오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 돈조반니는 유튜브로 접한 서양 오페라단들보다 표현의 수위가 높았습니다. 단순히 야하게만 연출한 것이 아니라 해석의 창의성을 보여주었지요.
특히 2막 마지막 부분, 돈조반니의 만찬 장면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다른 돈조반니와 달리 오늘의 만찬 장면에서는 음식이 없었습니다. 술잔과 포도, 사과 정도만 나왔지요.
그 대신 섹시한 복장의 거리여자들 8명이 등장했습니다. 그리고 음식을 먹는다는 표현에서 섹스가 이루어지는 비유적인 연출을 했습니다. 돈조반니와 여성이 섹스를 하는 수위 높은 묘사도 있었고, 레포렐로가 식탁에서 떨어진 음식을 먹듯, 여성중 한 명에 탐닉하는 장면도 있었습니다. 야한 것을 떠나 다른 오페라단과는 전혀 다른 해석을 한 점에 점수를 주고 싶습니다.
체를리나를 유혹하기 위한 파티에도 다른 오페라단에서 볼 수 없었던 나른한 무희들을 등장시켰고, 가장 섹시한 배역인 체를리나도 대단했습니다. 이연지 소프라노는 꾀꼬리 같은 음성으로, 귀여우면서도 요염한 체를리나의 모습을 표현하는 뛰어남을 여러 장면에서 유감없이 보여주었습니다.
VII. 옥에 티
● 돈 오타비오 역의 진성원 테너는 시종 지팡이를 짚고 연기를 해서 궁금증을 자아냈습니다. 지팡이를 짚을 아무 개연성이 없고, 실제 다리를 절기도 해 아마 다친 것 아닌가 싶습니다.
다리를 다쳤음에도 불구하고 출연했다는 것은 프로의식으로 볼 수도 있겠지요. 그런데 연기가 너무 뻣뻣했습니다. 저는, 오페라는 가곡의 밤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열연을 펼치는 다른 출연진들 속에서 혼자 연기는 없고 노래만 있는듯해서 다른 의미로 돋보였습니다.
뛰어난 미성이었고 관객들의 박수도 많이 받았지만, 비블라토가 심해 전 좀 불편했습니다.
● 2열 R석은 오페라글라스 없이도 표정을 볼 수 있는 좋은 자리지요. 근데, 출연자가 아리아를 부를 때 그 뒤로 막을 내리고 무대를 전환하는데, 그 소음이 몰입을 좀 방해했습니다. 높이 달린 자막을 보느라 목이 아픈 것과 함께 앞자리 R석에 앉은 값이라고 생각했습니다.
● 지리 미쿨라님이 지휘한 소리얼 필하모닉오케스트라의 연주는 흠잡을 데 없이 좋았습니다. 그런데 2막 중간에 지휘자가 지휘봉을 놓치는 해프닝이 있었습니다.
그것도 제가 지휘자 바로 뒤의 뒤에 앉았기에 소리로 알 수 있었고 미쿨라님은 한동안 손으로만 연주했는데, 조금 후에 보니 다시 지휘봉을 들고 있더군요. 아마 연주 없는 부분에서 앞에 앉은 연주자가 주어 줬겠지요.
오페라니까 표시가 안 났지, 일반 연주였으면 크게 눈에 띌 실수였습니다.
● 관객들의 이미지는 전체적으로 고상하고 점잖아 보이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인지 박수가 좀 약했고, 박수의 포인트들도 잘 못 찾는 모습이었습니다. 박수를 리드하는 박수부대들을 좀 심어 놓았으면 좋았겠다 싶었습니다.
또 하나. 요즘 오페라나 음악회가 꼭 재킷이나 드레스 등의 드레스 코드를 요구하지는 않습니다만, 남성의 반바지는 좀 심했다 싶더군요.
● 몇 가지 옥에 티를 적었습니다만, 그건 그 외의 전체적인 공연이 좋았다는 얘기입니다. 20만 원이라는 작지 않은 티켓값을 아깝지 않게 해 준 출연자와 스텝들에게 감사드립니다.
VIII. 에필로그
레포렐로가 돈나 엘비라에게, 돈조반니가 얼마나 많은 여성과 잠자리를 했는지 설명하면서 이런 얘기를 합니다.
“나이가 어떻든 국적이 어떻든 가리지 않습니다. 숫자를 채우려 할 때는 나이 든 여자도 마다하지 않지만 어린 아가씨들을 제일 좋아하죠.”
그 부분을 보며 제 친구 하나가 떠올랐습니다. 그 친구는 한마디로 이렇게 정리하더군요.
“여자는 누구든 버릴 사람이 없어.”
제 친구가 돈조반니보다 한 수 위일까요?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