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레 돈키호테 관람기>
I. 자동차 주유는 이슬람 선교자금 지원인가?
젊을 때 잠깐 사귀다 헤어진 후배가 있다. 예쁜 얼굴에 똑똑하고 귀여운, 매우 괜찮은 여성이었다.
그런데 왜 ‘잠깐’ 사귀었느냐고? 내가 찼다. 차인 게 아니고?
데이트 도중 그 친구가 자기 자랑삼아 어릴 때 리틀엔젤스를 했었다는 이야기를 했다. 리틀엔젤스를 했다면 어린 시절에 이미 예쁘고, 노래 잘하고, 춤도 잘 춘다는 공인을 받은 것과 다름없으니 자랑할 만도 했다. 그런데 난 그 순간 정이 딱 떨어졌다. 보수적인 개신교 신앙 환경에서 자란 나는 리틀엔젤스 = 통일교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 이후 그 친구를 보고 싶지가 않았다. 뭐 그거야 그럴 수 있다 치자.
정말 잘못한 건 그 후배에게 왜 헤어지고 싶다는 이유도 설명하지 않고 슬그머니 얼버무리며 만남을 그만둔 것이었다. 최소한 해명의 시간이라도 줬어야 하지 않았을까? 그 친구는 무척 억울했을 것 같다.
지금 신앙관이 크게 바뀌었거나 통일교에 대해 관대해진 건 아니지만, 난 유니버설 발레단의 공연을 자주 본다. 그에 대해 펄쩍 뛰며 반대하는 크리스천들이 좀 계시다. 유니버설 발레단은 통일교 관련 단체이고, 단장이 통일교의 높은 사람이니, 그 발레를 본다는 것은 통일교에 선교자금을 대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뭐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런 분은 안 보시면 된다. 하지만, 이슬람 통치자가 있는 이슬람 국가에서 수입한 석유를 자동차에 넣으면 이슬람 선교자금을 대주는 것일까? 통일교 산하 기업에서 만든 맥콜이라는 음료를 안 먹어본 개신교인이 몇 명이나 될까?
뭐 논쟁하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각자 자기 믿음의 분량대로 판단하고 행동하면 될 것이며 굳이 남에게 이래라저래라 하는 건 좀 아니지 않나?
II. 발레 돈키호테 스토리
유니버설 발레단의 발레 돈키호테 공연을 보기 위해 일산 아람누리를 찾았다. 늘 그렇듯 유니버설 발레단은 정통 발레를 아름답고 화려하게 소화했다.
발레 돈키호테는 우리가 아는 돈키호테와는 약간 스토리가 다르다. 돈키호테는 주인공이 아니며, 심지어 발레 분량도 없다시피 하다.
이 발레에서의 주인공은 원작에서는 비중이 크지 않은 선술집 주인의 딸 키트리와 그의 연인 바질이다. 돈키호테는 이 키트리를 악당들에게 잡혀간 공주 둘시네아로 착각한다.
발레에서 키트리와 바질은 서로 사랑하지만, 키트리의 아버지는 바질이 돈이 없는 가난한 이발사라며 둘의 결혼을 극구 반대한다. 그리고 돈 많은 부자와 결혼시키려 하자 키트리와 바질은 집시들의 구역으로 도망친다.
키트리를 둘시네아로 착각한 돈키호테는 집시 마을에 있는 풍차를 거인 악당으로 여기고 돌진하다 풍차 날개로부터 튀어나와 기절하게 된다. 그 상태에서 꿈을 꾼 돈키호테는 요정들과 큐피드, 그리고 둘시네아가 된 키트리를 만났다가 깨어난다.
키트리의 아버지는 도망친 두 연인을 찾아냈으나 바질은 거짓 자살소동을 벌이고, 키트리의 부탁을 받은 돈키호테는 키트리의 아버지를 위협해 두 사람의 결혼을 허락하도록 한다.
마을에서는 두 사람의 결혼식이 화려하게 열리면서 플라밍고와 판당고 등의 스페인 춤이 찬란하게 펼쳐지고, 키트리는 둘시네아가 아님을 깨달은 돈키호테는 또 다른 모험을 찾아 떠난다.
III. 예습의 부작용
나의 학창 시절에는 예습 복습이 공부 잘하는 요령이자 모범생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했다. 요즘 아이들은 그 예습이 지나쳐 선행학습으로 발전하면서 몇 년 후, 몇 학년 뒤의 학과 내용을 미리 과외 학습으로 공부하기도 한다.
내 경우에는 공연이나 전시회를 가기 전 비교적 예습을 철저히 하는 편이며, 이 글과 같은 후기 작성이 복습을 하는 기회이다.
음악회를 미리 예습하면 현장에서의 감흥이 떨어진다는 분들도 있지만, 난 감성이 부족해서인지, 모르는 음악을 처음 접하면 모르는 언어를 듣는 것과 같은 기분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일상생활을 하는 동안 해당 음악을 반복해서 듣고, 귀에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 싶을 때 연주영상과 함께 차분하게 듣는 것으로 예습을 마무리한다. 오페라나 발레는 유튜브로 예습하는 경우가 많고, 현장 이해와 음악 접근이 비교적 쉬운 뮤지컬은 예습 없이 가기도 한다.
미술 전시회는 유튜브의 설명 동영상을 많이 이용하고, 사전에 오디오 가이드를 다운로드할 수 있으면 미리 다운로드하여 인터넷에서 해당 작품을 띄워놓고 오디오 가이드를 듣는다.
이와 같이 예습을 하면 공연이나 전시회에 보다 잘 몰입할 수 있게 되며, 나중에도 기억에 오래 남는다. 또 나중에 후기를 쓴다는 생각을 하면 현장에서 더욱 집중하게 된다.
이 같은 예습 위주의 문화활동은 당연히 장점이 많지만, 단점도 있는데, 바로 눈높이가 높아진다는 점이다.
직장 생활할 때 은퇴하시고 연세가 높으신 VIP 고객이 있었는데, 사고 싶은 집의 모델하우스에 같이 가 달라는 부탁을 하셨다. 어려운 부탁도 아니어서 별생각 없이 동반해 드렸는데, 최소 100평 이상의 넓은 평수 모델이 여러 개 있었고, 모델하우스니만큼 내부 인테리어와 전자제품 배치들이 최고급으로 화려하게 되어있었다. 그날 퇴근했더니 우리 집이 그리 좁고 후줄근해 보일 수가 없었다.
이번 발레 돈키호테를 보기 전 주로 예습한 유튜브 동영상은 러시아 마린스키 발레단의 공연이었다. 그런데 바질 역할의 주인공 발레리노가 동아시아 사람으로 보여 찾아보니 한국인인 김기민 발레리노였다. 김기민 님은 이미 세계적인 발레리노로 유명한 분이었지만 내가 모르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가 한국인이라 팔이 안으로 굽은 것이 아니라, 그의 발레는 정말 감탄할만했다. 아니 유튜브로 보는데도 탄성이 절로 흘러나왔다.
탁월한 신체조건을 갖고 있는 데다가 파워, 섬세함, 우아함을 두루 갖췄고, 상대 발레리나를 가벼운 인형 들듯이 들어 올렸으며, 다리를 뒤쪽으로 회전시킬 때는 엄청나게 큰 원이 그려졌다.
이번 유니버설 발레단 공연에서는 임선우 발레리노가 바질 역할을 맡았다. 그는 바질의 발레와 연기를 충실히 소화했고 흠잡을 곳이 없었지만, 높아진 내 눈높이에는 좀 아쉬웠다.
미소년 스타일의 외모에, 단아한 연기와 춤을 선보였으나 파워는 좀 아쉬웠고, 동작의 크기와 화려함도 좀 부족해 보였다. 물론 내 지나친 예습의 탓도 있었겠지만.
이유림 발레리나는 아름답고 우아하게 키트리의 역할을 수행했고 가장 어렵다는 연속 32회전도 비교적 무난하게 수행했다.
임선우 이유림 커플은 지젤에서도 좋은 호흡을 보여주었었는데, 이번 돈키호테에서도 역시 멋진 하모니를 이루었다.
그 외 유니버설 발레단의 단원들은 치열한 연습의 흔적이 보이는 동작의 일치, 표정부터 손동작 하나하나까지의 세심함에 신경 쓴 흔적들을 보여줘 프로다웠다.
스페인의 분위기를 한껏 머금은 화려한 복장과 플라밍고, 만당고 등의 스페인 춤도 이날 공연의 빠질 수 없는 매력 포인트였다.
IV. 단상
세르반테스의 소설에서 돈키호테는 자신을 기사로 착각한 주인공이었으나, 발레 돈키호테에서는 그나마 유지하던 주인공의 자리마저 잃어버렸다. 그저 젊은이들의 아름다운 사랑을 이루어주는 조연으로 서성대다가 다른 모험을 찾아 떠나는 그의 모습이 쓸쓸했다.
2막에서 요정들과 큐피드에 둘러싸여 둘시네아로 변한 키트리와 아름다운 조우를 하지만 한낱 꿈일 뿐이다.
그의 모습에서 한때는 이 나라의 산업화를 이끈 주역이었으나 이제는 인생 2막을 향해 떠나는 쓸쓸한 우리 세대의 모습, 그리고 나의 모습을 본다. 각자의 직장에서, 일터에서 우리는 얼마나 영웅적이었고 주목받는 일꾼이었나.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주먹에 쥐었다가 펼치면 날아가 버리는 모래알 같이 이제는 기억의 저편에서 돈키호테의 꿈처럼 자리하고 있는 추억이 되어버렸다.
지금 아름다운 젊은이들이 그들의 꿈을 펼치며 새로운 세계를 열어가고 있다. 그래도 그 기반에는 우리 세대가 만들어놓은 기반이 있음을 생각한다. 그대와 나는 이제 키트리와 바질에게 주인공을 양보한 돈키호테일지 모른다. 그래도 즐겁지 아니한가? 그들은 내 덕분에 사랑을 얻었으며, 나에게는, 우리에게는 남아있는 또 다른 모험이 있으니.
(이미지 출처 : Pixabay, 직접 촬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