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꽃의 마지막 여행 13.
군사정부 시절에 어린 시절을 보내서인지, 자크 루이 다비드의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은 내게 너무도 익숙한 그림이다. ‘불가능은 없다’라는 표어와 함께.
시골에서 태어난 키 작은 소년이 세상을 호령하는 지배자가 된 과정은 비슷한 상황의 야심가들에게 큰 동기부여가 되었었던 듯하다. 그리곤 교육과정에도 그런 나폴레옹 정신을 주입하곤 했다. 교훈이나 급훈이 ‘불가능은 없다’ 였던 학교가 많았고, 유명 학습 참고서의 표지 역시 나폴레옹이 백마 위에 올라 알프스를 넘고 있는 바로 그 그림이었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알프스를 넘던 모습을 실제와 매우 가깝게 그린 것은 폴 들라로슈의 작품으로, 여기서의 나폴레옹은 매우 초라하고 불쌍하게 그려져 있다. 위엄 넘치는 백마가 아닌, 자그마한 노새에, 그것도 고삐를 잡은 하인에 이끌려 추위에 떨며 가는 모습이다. 나폴레옹이 결코 좋아했을 것 같지 않음은 물론이고 당시의 일반 대중도 왠지 그 그림을 반기지 않았었을 성싶다. 하지만 들라로슈가 이 그림을 그린 것은 나폴레옹이 이미 사망한 후인 1851년이었다.
나폴레옹은 1800년을 전후한 시대에 벌써 이미지 making의 중요성을 깊이 깨닫고 있었고 적극 실천했다. 그 대표적인 사례의 하나가 자크 루이 다비드로 하여금 그리게 한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이다. 나폴레옹은 자신의 열렬한 지지자이자 정치 화가였던 다비드에게 ‘역동적인 말 위의 차분한 모습’을 그리라고 주문했고, 완성된 그림에 매우 만족해했다고 한다. 그리고 다비드는 동일 작품을 모두 다섯 가지 버전으로 그렸고, 그중 하나가 벨베데레에 걸려있는 것이다.
자크 루이 다비드는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 <사비니 여인들>, <마라의 죽음>과 같은 명작들을 남겼다. 아울러 앞서 언급한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을 비롯해 <나폴레옹 1세의 대관식>, <서재에서의 나폴레옹> 등의 작품도 그렸다.
사진이 일반화되기 전까지는 회화가 기록과 예술의 역할은 물론이고 선전의 주요 도구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아무래도 주문자인 군주나 귀족을 미화하는 그림이 많았을 것이다. 또한 종교화는 엄격한 교황청의 룰을 따라야 했으며 평단과 일반인들도 그림에 대한 태도가 매우 엄격했다. 인상파의 아버지라 불리는 마네가 <풀밭 위의 점심>이나 <올랭피아> 같은 작품을 발표했을 때 대중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고 많은 비난을 받았던 것이 그런 사례일 것이다.
그러나 19세기 후반, 이미 많은 예술가들은 기존의 격식과 틀에서 벗어나 새로운 예술을 꿈꾸며 시도하고 있었고, 그것은 막을 수 없는 도도한 시대의 흐름이었다.
오스트리아에서도 19세기말, 자유로운 영혼을 소유한 일단의 선구자들이 오랜 세월 예술가들을 묶어왔던 틀에서부터 벗어나려는 몸짓을 시작했고, 그것은 ‘제체시온’이라고 불렸다. 제체시온은 분리한다는 뜻으로, 기존 예술가 단체와 분리해 새로운 예술운동을 한 사람들 또는 그 사조를 일컫는다. 우리말로는 ‘분리파’라고도 하며, 클림트가 중심인물이었다. 그들은 오스트리아는 물론 세계 예술조류의 큰 흐름을 바꾸면서 그 자체가 큰 획이 되었다.
이 같은 새로운 사조의 대표자 중 한 사람인 클림트의 <키스>를 비롯한 주요 작품들이 바로 벨베데레에 전시되어 있다. 그런데 그와 동시에, 정치 선전화의 대표작이라고도 할 수 있는 자크 루이 다비드의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도 같은 벨베데레에 걸려있다.
보기에 따라서는 재미있는 아이러니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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