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둘째 고모 댁은 우리 일가친척 중에서 가장 잘 사는 집이었다. 광주에 있는 금남맨션에 사셨는데, ‘금남로에~ 꽃잎처럼~”하는 운동가요 ‘5 월가’ 가사에 나오는 바로 그 금남로에 있는 고급 아파트였다.
내가 초등학교 고학년일 때, 둘째 고모 댁에 다녀오신 아버님께서 “그 집에 새 외제 전축을 샀는데, 마치 천상의 음악 같은 소리가 나더라.”라고 하셨다. 나는 ‘천상의 소리’란 어떤 소리 일까가 궁금했는데, 그 해 겨울, 고모 댁에 가서 그 천상의 소리를 경험하게 되었다.
일단 당시만 해도 초호화아파트였던 금남맨션에 기가 죽었고, 푸른빛이 번쩍번쩍하며 지금도 그 이름이 잊히지 않는 매킨토시 오디오 세트에 더욱 주눅이 들었다. 피아노 선생님이기도 했던 둘째 고모가 틀어주는 음악은 찬송가가 아니었고, 남진 나훈아 노래는 더욱 아니었다. 웅장하면서도 감미로운 클래식 사운드였던 것만 기억에 남아있는데, 나 역시 아버님처럼 ‘이게 바로 천국의 소리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고교시절에는 음대 입시를 준비하는 절친이 있었다. 그 친구가 클래식 음악을 듣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는데, 그 첫 단계는 한 곡을 정해 그 곡이 익숙해질 때까지 일상생활 하는 동안 늘 틀어놓고 있으라는 것이었다. 나는 일단 베토벤의 ‘운명교향곡’과 피아노 협주곡 ‘황제’를 첫 후보 곡으로 정했는데, 문제는 우리 집에 전축이 없다는 것이었다.
카세트테이프라는 대안이 있었지만, 왠지 클래식 음악은 고상해 보이는 LP를 전축에 올려놓고 들어야 할 것 같았다. 넉넉지 않은 집에서 비싼 전축이 웬 말인가? 부모님께서는 일언지하에 거절하셨다.
난 강경한 전략을 쓰기로 하고, “그럼 나 밥 안 먹어!”라는 선전포고에 들어갔다. 워낙 얌전한 범생이에다가 부모님 말씀도 잘 듣던 내가 이렇게 나가자, 한두 끼 정도밖에 안 굶었는데, 부모님께서는 바로 항복을 하셨다. 그때 우리 집 형편으로는 굉장히 무리가 됐을 터인데도, 비록 매킨토시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우리 집에는 번듯한 전축이 들어왔다.
한밤중에 헤드폰을 끼고, 전축의 노란 불빛만 있는 상태에서 들었던 ‘운명’과 ‘황제’는 참으로 환상적이었다. 그리고 그 두 곡은 지금까지도 내 애청곡이 되었다.
그 전축은 꽤 오랜 시간이 흐른 후까지도 내 애장품이 되었고, 장교로 군에서 제대한 후 새 전축으로 교체되었다. 장교들은 면세로 여러 가지 물품을 살 수 있었는데, 복무하는 동안의 월급을 모아 전역할 때 여러 전자제품들은 사는 게 일반적이었다. 내가 샀던 몇 가지 중에는 당연히 전축, 아니 오디오세트도 포함되었었다. LP플레이어와 라디오, 카세트 플레이어는 물론, 당시로는 첨단인 CD 플레이어에 이퀄라이저까지 있는, 말 그대로 오디오세트였다. 이때부터는 클래식, 가요, 팝송을 가리지 않고 LP레코드를 많이 사 모았고, CD도 적잖이 사기 시작했다.
결혼해서도 꽤 오래 그 오디오세트를 가지고 있었지만, 작은 신혼집에는 버겁게 큰 데다가 야근 많고 바쁜 직장 생활 초년병이 여유 있게 음악에 집중할 시간도, 마음의 여유도 거의 없었다.
시간이 흘러 사람들은 더 이상 LP를 듣지 않게 되었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 무렵 이사를 하는 도중에 인부 한 분의 실수로 오디오 장식장이 와장창 깨져버렸고, 그걸 계기로 한 때의 내 로망이었던 오디오세트는 폐기되었다.
그래도 250장에 가까운 LP들은 알뜰히 보관하고 있었지만, 들을 일은 없었다. 집이 가까운 직장 선배 중 한 분이 LP 레코드음악을 틀어주는 카페를 즐겨 찾으셔서, 그분과 함께 그곳에서 몇 번 들어본 것이 LP와의 드문 만남이었다.
그런데 요즘 많은 이들에게서 LP 레코드에 대한 취향이 조금씩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고, 큰 아들이 LP 플레이어와 꽤 많은 수의 LP 레코드를 선물 받은 일도 있었다. 내가 LP에 대한 미련이 있음을 아는 아들은 그것들을 내게 선물했지만, 앰프도 없고, 스피커도 없어서 그냥 보관만 하고 있었다.
얼마 전 집안 정돈을 할 때 LP 레코드들도 분류도 하면서 정리를 새로 했다. 그걸 보고 있던 아들이 앰프가 내장된 액티브 스피커를 다시 선물해 주었다. 예전의 오디오세트처럼 거대한 외양과 큰 공간이 아니더라도 깔끔하고 단순한 상태로 LP 레코드를 감상할 수 있었다.
그리고 한 밤중에 다시 플레이어에 올린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황제’에서는 오랜 시간의 기억이 함께 묻어 흘러나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