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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람쥐덕션 Feb 29. 2024

E가 아니면 어때

지금도 가끔 생각나는 황당한 면접자리가 있다. 몇 년 전, 입사 지원을 했던 한 신생회사였다. 신생이지만 구인내용이 꽤 경쾌해서 내 마음에 들었던 것 같다. 하지만 막상 그들과의 만남은 그닥 유쾌하지 않았다. 면접은 4명의 담당자가 둘러앉아 과자를 까먹으며 나를 훑어보는 것에서부터 시작됐다. 본인들의 회사는 도전적인 것을 좋아하며, 자유분방하고 면접 역시 딱딱한 분위기는 싫어 한단다. 그러더니 본지 5분도 안된 나를 제멋대로 평가해댔다. 물론 평가가 당연한 자리이기는 하다. 그러나 그들의 기준은 내가 생각하는 업무 수행능력 등에 있지 않았다. 이력서의 다양한 프로젝트, 자기소개서의 적극적인 문체와 달리 내 말투나 얌전한 액션을 보니 예상과는 달라 보인다고 했다. 평가를 넘어 비난과 같은 지적에 가까웠다.     


“도전적인 것을 좋아하나요? 우리는 영상 말고,

새로운 사업을 하려고 하는데 함께 할 의향이 있나요?“

“혹시 그게 어떤 사업인가요?”

“지금 구상 중에 있어요.

우리가 재미있다고 판단되는 것은 무엇이든지!”

“아...잘은 모르겠지만 저와 맞는 사업이라면

해 볼 생각은 있습니다”

“명확하지 않네요.

OO씨는 도전적인 사람은 아닌 것 같아요”   

  

이 무슨 황당한 평가질인가. 그들이 원하는 대답은 아마도

“어머, 저도 그렇게 재미있는 일을 찾아가는 걸 너무 너무 좋아해요! 해보고 싶은 게 많아요! 얼마든지 함께 할 의향이 있습니다!“ 라며 호탕한 웃음과 함께 두 주먹을 불끈 쥐는 제스처 정도 였던 것 같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안정적인 것을 추구하는 사람이다. 어떤 사업인지도 모르고, 또 그들이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모험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이어지는 평가 중 가장 기분이 나빴던 부분은 취미와 관련된 것이었다.

“취미가 뭐죠? 주말에 스트레스 어떻게 풀어요?”

“저는 책을 읽거나 영화, 전시 보는 것을 좋아합니다. 산책도 하고요”

“전부 내향적인 취미네요. 우리는 외향적이고, 적극적인 사람이 좋습니다”

지극히 실망한 듯한 표정, 그리고 ‘도대체 그런 성격으로 우리 회사에 감히 면접을 보러 왔냐’라는 듯한 말투에서 나도 더 이상 그들과 말하고 싶지 않아졌다. 이후의 질문에는 아주 짧게 성의 없는 답변만 했던 것으로 기억난다.      


면접은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라는 말로 끝이 났다. 그들도, 나도 서로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는 것을 완전히 인정한 채 말이다. 그렇게 깔끔한 결말이 난 면접도 처음이었다. 기분은 당연히 좋지 않았다. 처음에는 그들의 무례함에 화가 났고, 시간이 지나면서 잘못된 평가 방식을 그 자리에서 제대로 지적하지 않은 나에게 화가 났다. 사실 내게는 ‘외향적인 사람’처럼 보이고 싶은 마음이 한 켠에 작게 있었다. 그래서 면접 내내 “아닌데요, 저는 활달하고, 새로운 것을 찾는 일을 즐겨하는데요!” 라며 변명 같은 말들을 횡설수설 해 댔었다.      


나는 새로운 것을 즐기지 않는다. 아, 새로운 것을 지향하기는 한다. 내가 좋아하는 영역 안에서 말이다. 외향적으로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노력하거나, 활동적인 취미를 가지고 있지도 않다. 하지만 적어도 내가 좋아하는 전시관람, 독서 같은 영역에서는 적극적인 사람이다. 일주일에 두세 번은 서점에 들러 읽고 싶은 목록을 업데이트하고, 다양한 전시에서 영감을 얻기 위해 노력한다. 나는 성격상 낯을 가리지만, 많은 사람들 앞에서 발표 하는 내 직업을 사랑한다. 새로운 곳을 여행하는 신체적 활동은 귀찮아 하지만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의 경계 너머 남다른 세계와 분야를 탐구 하고 공부하는 활동은 좋아한다. 면접관들은 그저 그들의 성격과 잘 맞아 떨어지는 사람을 찾는 것일 뿐, 그 기준에 어긋난다 해서 내 성격이 틀렸다고 나를 판단할 자격은 없다. 내향적이어도 나는 충분히 업무영역에서 가치 있는 역할을 할 수 있음을 그때는 왜 말하지 못했을까.  

나는 사람이 복작거리는 곳 보다 혼자 카페에 앉아 책을 읽고, 동물원이나 아쿠아리움에 가서 멍 때리는 것을 더 좋아한다.

한때 극I의 이런 성격을 부끄러워하고, 외향적인 사람들을 부러워 한 적이 있다. 우울해 하는 팀원에게 술 한잔 걸치자는 말 보다 카페로 불러 조곤조곤 이야기를 들어주는 내 방식이 한심하다 생각하기도 했다. 일부러 괄괄한 척, 크게 웃음소리를 내고 다니기도 했다. 그래서였나, 한참 MBTI가 유행하기 시작했을 때 누가 검사해보라고 하면 항상 E로 시작되는 유형이 나왔었는데 그럴 때 마다 친구들은 검사가 잘못된 것 같다고 했었다. 너는 누가 봐도 I인데? 그 말이 나를 특별하지 않은 사람으로 만드는 것 같아 싫었던 것 같다. 한참이 지나 퇴사를 하고, 내가 진짜 좋아하는 게 뭘까로 고민하면서 차분한 마음으로 MBTI검사를 다시 했을 때 비로소 I가 나왔다. 아마도 이전 검사들은 내가 동경하던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해’ 라는 바람으로 답을 택했기 때문에 E유형이 나온 게 아닐까 싶다. 그제서야 ‘나’를 부정했던 그동안, 나는 참 바보 같았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향적인 성격이면 어떻고, 조용한 사람이면 어떤가. 나는 이대로의 내가 좋다. 싫은 것을 억지로 하며 외향인인 척 하는 스트레스 보다 있는 그대로 나를 인정하고 그 안에서 도전적이고, 적극적인 삶을 개척하려는 내가 좋다.      


취미 부자에 사람 만나는 것을 좋아하는 외향적 친구들에게서는 소소한 자극을 받고, 나와 성격이 비슷한 친구들에게서는 깊은 공감을 얻는다. 세상은 다른 유형의 사람들이 서로 맞물려서 살아가기 때문에 재밌어진다. 그래서 내 성격은 틀려먹은 게 아니다. 내•외의 톱니바퀴가 잘 맞아 떨어지기 위해서는 이런 나를 인정하고, 나다움을 사랑했어야 했다. 그렇게 살지 못했던 지난 시간이 조금 부끄러워진다.    

  

몇 년 전, 면접자리에서 솔직히 내향인임을 인정하고 나는 빛나는 사람임을 당당하게 말할 걸. 후회가 된다. 물론 그럼에도 나는 떨어졌을 것이다. 어차피 그 회사가 원하는 인재상은 그들의 기준에서 죽이 잘 맞는 ‘외향적’ 사람이었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적어도 내 성격이 틀렸었다는 기억은 남기지 않았을 것이다. 내향적인 나는 틀린 사람이 아니라 그냥 나인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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