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지금의 삶은 내가 항상 동경하던 삶이었다. 그다지 크게 성공했거나 돈이 많다기보다는 외국에서 공부하고 싶었고, 외국에서 살고 싶었다. 예쁜 딸도 낳고 싶었는데 하나님의 은혜로 예쁜 딸도 낳았다. 농담 삼아 나는 출장을 자주 다니는 남자를 만나 우리 엄마 맨날 우리 집에 와 있었으면 좋겠다라며 엄마에게 말하곤 했는데 정말 남편은 일 때문에 출장을 자주 다니고 우리 마는 우리 집에 자주 오시다가 결국 몇 해전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로는 우리와 6개월씩 미국에서 지내고 계신다.
어려서부터 꿈은 크게 가지려고 노력했다.
물론 현실은 무척 달랐다. 그래도 초등학교랑 중학교 때는 공부를 열심히 한다고 하였으나 그냥저냥 중상위권이었고, 고등학교도 딱히 내세울 것 없이 평범했다.
한국이란 나라에서 정말 무엇이든 탑으로 찍기엔 머리도 그냥 평범, 부모님의 서포트도 그냥 평범이었던 것 같았다.
서울에 있는 대학에 가서 정치외교를 공부하고 외교관이 되어 외국에 살고 싶다는 희망은 결국 수능을 본 날 무너지고 말았다... 그래도 잘했던 사회탐구를 정말 망치면서... 부모님은 내가 간호장교나 선생님이 되길 원했는데 나는 나의 처지도 모르면서 간호장교하면 머리를 자르고 유니폼을 입기 싫어서 싫다고 하였으나 결국 국립간호대학도 수능으로 인해 못 갔다.
대학에 가면 부모님이 학비와 생활비를 대주셔야 하니 결국 아버지의 뜻에 따라 사범대에 진학했다. 이제 생각해 보면 이때가 나의 사춘기가 아니었나 생각이 들곤 한다. 공부보다는 다른 곳에 눈을 돌리게 되었다. 패션을 좋아하고 친구들과 시간을 많이 보냈다. 그래도 행운인 건 공부는 딴전이었으나 여태껏 인생친구들이 내 곁에 그때부터 지금까지 있다. 패션에 너무 관심이 많아 그때 인기였던 보그나 엘르의 에디터를 막연하게 꿈꾸기도 했다. 아무도 모르게 혼자서. 보그는 창간호부터 미국오기 전까지 모았을 정도로 에지중지 했다.
본 전공에는 별로 뜻이 없어 헤매다 아버지의 권유로 영어영문을 부전공으로 하게 되었다. 그래도 영어영문은 성적이 좋았다. 왜냐하면 성적이 B이하면 부전공 자격증을 주지 않기 때문이었다. 영어영문을 부전공을 못 한걸 알면 아버지에게 불호령이 떨어질걸 알았기 때문에 나름 성적을 유지하려 애썼다. 다행히 나는 영어를 예전부터 좋아하는 과목이었고 꽤 잘했다. 가족 중에서도 미국에 사는 친척도 있었고, 중학교 때부터 AFKN으로 베버리힐즈 90210과 프렌즈 등 영어로 봤었고, 학교에 원어민선생님도 오셨었고, 대학에서도 원어민 교수님과 공부할 기회가 있었으니 그래도 영어에 노출이 많이 되어있던 거 같다.
대학을 졸업할 때 즈음 정신을 차리게 되어 다시 꿈을 바꿨다. 친척이 있는 미국으로 가던지 아님 독일로 유학을 가기로. 그리고 교수가 되기로 마음을 먹었다.
졸업 후 다행히 아이들을 가르치며 대학원 준비를 하고 유학을 갈 결심을 했다. 하지만 또 좌절하게 된다. 부모님은 임용고시를 준비해서 선생님이 되길 원하셨고, 죄꼬리만 한 월급으로는 유학 가기가 빠듯해 보였다.
그러던 중 나의 꿈이 사라진 건 대학원에 들어가서였다. 교육대학원에 들어가 보니 다들 현직 선생님들이시고 (기가 죽었다) , 나는 그 대학교를 나오지 않아서 수업 시간에 대놓고 무시를 당하기도 했다. 물론 나의 지식이 얕은 부분도 있지만.
한 번은 이런 일들도 있었다. 교수님들과 선생님들과 답사를 갔는데 그 여름에 비가 어마 무시하게 쏟아지며 도로가 망가졌거나 막혔는데 한 교수님은 송어회 먹어야 한다며 조교가 모는 차에 앉아 학생들을 데리고 갈 땐 정말 어이가 없었다. 이대로 폭우에 떠내려가는 거 아닌 가 싶을 정도로... 이제 와서 보면 대학이나 대학원에서의 교육은 나와는 잘 맞지 않았던 것 같다. 내가 공부하고 싶은 분야의 교수님이 거기에 계셔서 그곳으로 진학을 했는데 나를 지도할 수 없다는 소리를 듣고( 퇴직하신다고) 1년 만에 대학원을 휴학했다.
그리곤 다시 임용을 한 번 더 보았으나 역시나 안됐다. 물론 대학 때 실컷 놀았으니 성적도 안 좋아 교대로 편입도 못했다. 학원에서 일하면서 정말 힘들었지만 보람도 되었는데 나와 적성이 안 맞는다고 생각을 많이 했다. 왜냐하면 틴에이져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이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내가 어리기도 했고 아이들을 잘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러고 나서 몇 년을 있다 남편을 만나 미국으로 오게 되었다.
주부로 엄마로 5년을 지내다 남편의 권유로 다시 공부하기로 결심했다. 물론 남편의 직업은 괜찮고 돈도 그럭저럭 잘 벌었지만 어차피 미국에서 살 거면 공부를 제대로 해보고 싶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간호원이었다. 일자리도 많고 보수도 괜찮다고 하길래. 하지만 그것도 쉽지 않았다. 내가 수학은 그래도 조금 해볼 만 한데 과학은 꽝이라... 일단 아이가 있으니 간호원은 주말에도 일하는 상황이 많다고 들었다. 가족 중에 간호원분들이 꽤 있기에 이런저런 정보를 들을 수 있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새로 이사 간 곳엔 가까이에 간호공부를 할 수 있는 곳이 없었다.
그러던 중 한국도 1-2년마다 나가고 싶고 아이도 케어하며 일할 수 있는 게 무엇일까 생각하다 선생님을 해보는 건 어떨까 막연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나중에 한국에 가서 국제학교나 미군부대 학교에서 일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미국에서 산지도 꽤 되었고 영어로 일상생활에 불편한 점은 없지만 영어는 나의 평생숙제이다.
다행히 집에서 1시간 반경엔 초등교육을 공부할 수 있는 곳이 꽤 많았다. 남편과 상의 후 근처에서 teacher's colleage 알려진 곳에 편입을 하게 되었다.
아이를 키우면서 공부를 시작한다는 건 미친 짓이었다. 괜히 시작했나 싶을 정도로 후회했다. 집도 엉망 나 자신도 엉망인 느낌. 이도 저도 아닌...
나는 며칠 전부터 준비를 해 과제를 냈는데 어떤 친구는 그날 아침에 써서 제출해서 A를 받는 모습을 보고 자괴감을 느낄 정도로.
하지만 미국에서의 공부는 한국과 참으로 달랐다. 한국에서도 사범대를 다녔지만 한 번도 우리를 선생님으로 훈련/준비시키고 있다는 느낌을 전혀 못 받았다. 그냥 강의를 듣는 것이지. 나머지는 오롯이 내 몫이라는 느낌. 그땐 어리기도 했고 아직 현실적인 직시보다는 뜬구름을 잡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으나 내가 학교를 다닐 때는 교생실습 16주가 전부였다. 그때도 교생실습은 잘 마쳤지만 뭔가 좀 아쉽고 이게 맞나 고민하던 적도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실제로 학교로 근무하게 되면 더 실무를 익히는 게 가능할지 모르겠다.
물론 내 생각이지만. 내가 다닌 학교와 다를 수도 있다. 공부를 안 하기도 했고. 미국에서 대학 생활은 물론 내가 나이 들어 더 열심히 제일 앞에 앉아 공부를 열심히 하기도 했지만 그보다도 나를 선생님으로 만들기 위한 훈련 같았다. 학생 하나하나에게 신경을 써주며 시간을 내주어 주시고 학생들의 소리에 귀기울여주며 나아갈 방향을 제시해 주는 느낌. 3년 동안 많은 실습들은 지금도 너무 소중한 경험이었다. 워낙 2년 편입과정이었지만 욕심내지 않고 3년에 마쳤다. 물론 마지막 1년은 꽤 벅찼다. 내가 정말 이 수업이 나하고 맞나 보다 할 정도로 재밌었다. 사실 발표수업도 엄청 많다. 한 수업은 큰 강의실에서 했는데 내 발표차례가 왔을 땐 정말 떨렸다. 함께 조원들과 책을 읽으며 우리가 학생들을 어떻게 가르칠 것인지 모델 수업을 하는 것처럼 경험과 리서치에 기반한 수업을 많이 했다. 하지만 조별 수업이 장점도 있지만 단점도 있다. 거의 모든 조별 수업은 그래도 나에게 도움이 됐다. 나에게 도움을 주려는 친구들도 많았기 때문이다.
딱 한번 조별 수업 때문에 난감한 적이 있었다. 그 친구와 어찌하여 같은 조가 되었는데 학교에 자주 나오지도 않고 과제도 하지 않는 친구였다. 그 친구가 자기 몫을 하지 않아 다른 친구와 둘이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지... 기본 교양수업 빼고는 대부분의 수업은 직접 학교나 프리스쿨에 가서 배우고 가르치기도 했다. 정말 열심히 3년을 공부하여 교생실습과 리서치 발표까지 마치고 졸업하고, 펜실베이니아 주 시험을 패스하여 Teahching Certification(주 교육부 교사 자격증)을 받게 되었다. 지금은 가끔 생각한다. 내가 그 3년을 공부하지 않고 그냥 허송세월을 보냈다면 더 후회했을 것 같다고.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