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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담 Apr 28. 2023

그놈의 교리교사

우리 연애 최악의 기간

날씨에도 맑은 날이 있고 눈비가 궂은날이 있듯, 연애에도 서로 좋아죽겠는 날이 있고 미워죽겠는 날이 있죠. 저희 부부 또한 연애하던 기간 중에 최악을 맞이하던 기간이 있었습니다. 바로 제가 성당에서 교리교사를 하느라 바빠졌던 기간이었습니다.


이 매거진을 읽으시는 분 중에 어렸을 적 성당이나 교회를 다니셨던 분이 계시다면 '주일학교'라는 용어를 어렴풋이나마 기억하실 겁니다. 미사나 예배가 끝난 다음 어린이, 청소년에게 종교의 교리를 가르치는 시간이죠.

저는 가톨릭 신자로서 스무 살 때 성당 초등부 주일학교의 교리교사를 한 적이 있었는데요, 교리교사로서 가장 바쁜 기간인 '여름신앙학교 준비기간' 때 저와 아내는 연애 초반이었고 어느 때보다 바쁜 저의 모습이 아내의 서운함을 쌓이게 만든 원인이 되어 많이 다투게 되었었습니다.


여름신앙학교는 여러 주의 시간을 투자해서 준비하는 행사였습니다. 거기에 유치부~초등학교 2학년이라는 매우 어린아이들을 대상으로 진행하는 행사였다 보니 작은 것 하나라도 꼼꼼하게 준비해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렇다 보니 평소에는 어린이 미사가 있는 토요일에만 교리교사 활동을 했지만, 그 시기만큼은 거의 일주일 내내 교리교사 활동을 했던 것이죠.


아내의 서운함은 여기서 출발했었습니다. 가뜩이나 사귄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방학을 맞이한 바람에 함께 보내는 시간이 없던 마당에, 저는 교리교사 활동을 이유로 연락까지 뜸해져버리고 맙니다. 겨우 연락이 되는 시간은 아내가 잠옷을 입고 꿈나라로 가기 직전이었는데, 이마저도 연락을 해서 서운함을 토로했더니 되려 제가 '나도 여름신앙학교 준비 때문에 힘든데 너까지 그러지 마라'며 적반하장의 태도를 보였던 것입니다. 분명 자기가 먼저 사귀자고 했으면서 시간이 지나니 이전과 다른 모습을 보이니 아내는 극대노의 상태가 될 수밖에 없었고, 그 이후부터 제 교리교사 활동에 불만을 갖게 됩니다. 진짜 임용고시 붙어가지고 초, 중등학교에 발령이 나서 급여를 받고 일하는 교사도 아니건만, 대체 교리교사가 뭐길래 그리도 열심히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심지어 이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어서 나중에 아내가 말하길 '곰신 생활은 다시 할 수 있어도 교리교사 하는 건 못 지켜보겠다'라고 할 정도더군요.)


지금 생각해 봤을 때 그 당시의 저는 저조차도 많이 어리석다고 생각이 들긴 합니다. 사실 나름의 명분(?)이라면 있긴 했는데, 저는 애초에 대학교를 입학할 때부터 가톨릭의 사제, 수도자 등의 추천을 받아 지원하는 수시전형을 통하여 합격한 사람이었습니다. 인생의 중요한 순간을 종교의 도움으로 무사히 넘길 수 있었던 것이죠. 때문에 교리교사 활동을 그에 대한 보답으로 생각하고서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제가 생각해도 그때의 저는 교리교사를 기준으로 모든 스케줄을 설정할 만큼 이 활동에 강박감을 갖고 할 정도였고, 이런 모습이 뭐가 문제인지를 자각하지도 못할 만큼 어렸었습니다. 이런 저였으니 아내와의 충돌은 절대 피할 수 없는 것이었죠.


이후 이 문제는 2학기가 시작되며 좀 더 심해지는데, 선배 교리교사들의 의견에 따라 토요일 교사회의 시간을 줄이기 위해 평일 중 하루를 시간을 내어 교사회의를 더 하자고 한 것입니다. 교리교사 활동기간이 주 1일에서 2일로 늘어난 것이죠. 거기에 2학기에도 이런저런 행사가 생긴 탓에 저와 아내의 데이트 가능한 시간은 점점 줄어듭니다. 당연히 아내의 반발은 더 심해질 수밖에 없었고, 저와 아내는 자연히 더 많이 다툴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랬던 상황은 나중에 두 가지 요인이 맞물려 변화를 겪게 됩니다. 첫째는 성당 주임신부님의 결정이었습니다. 당시 주임신부님은 제가 있던 성당에 부임하신 지 1년이 되어가셨는데, 초등부 교리교사를 모두 청년이 아닌 어머니들로 바꾸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둘째가 제 스스로의 의지였습니다. 1년의 교리교사 생활을 하며 아내와의 갈등을 포함한 여러 요인이 교리교사 활동을 이어갈 의지를 상실케 했었습니다. 그 결과 저는 교리교사 활동을 그만두었고, 이후의 시간을 아내와 더 함께하는 시간으로 채워나가는 계기로 삼을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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