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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엘 Mar 14. 2024

소싯적 선생님에 대한 우울한 기억 세 가지

그리고 커다란 위로 

학기 초의 선거


학기 초이다 보니 중고생인 아이들은 학교에서 회장 선거가 있네, 우애부(선도부) 선출이 있네, 하면서 나갈까 말까를 고민한다. 나가면 무슨 이야기를 해야 표를 많이 받을지 서로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고민들을 한다. 나한테도 나가는 게 좋을지, 나가면 무슨 얘기를 하면서 뽑아달라고 하는 게 좋을지 물어본다. 


"당선되지 않더라도 그런 거 시도해 보는 건 좋은 경험인 것 같아. 친구들이 어떤 학교 생활을 원하는지, 회장단이 어떤 활동을 해 주길 바라는 지도 생각해 보고, 어렵더라도 준비과정에서 배우는 것도 있을 테니 해봐."하고 답했다. 둘째와 셋째는 등교 시간에 선생님들과 함께 학생들의 복장 등 교칙 준수에 대한 지원 활동을 하는 우애부를 해 보겠다고 하며 지원서를 채워나갔다. 왜 하려고 하는지, 어떤 활동을 하고자 하는지를 써내는 양식이 미리 주어졌다. 


선거가 있었던 어제, 둘 다 어두운 표정으로 하교했다. 둘째는 장 보러 나가다가 길에서 만났는데, 대뜸 "엄마, 나 안 됐어. 그래서 기분이 안 좋아." 한다. "하지만 발표는 내가 제일 잘했어. 다른 애들은 무슨 말을 하려는 지 모르겠는데, 말도 잘 못했어."라고 스스로 잘 한 점을 돌아보기도 했다. 셋째는 좀 더 늦게 왔는데, 집에 들어오더니 얼굴도 안 보여주고 방으로 들어가서 문을 쿵 닫아버렸다. 결과를 물어보나 마나였다.


투표를 통해 선택되어야 하는 것이니 쉽지 않은데, 아이들은 모두 친구를 사귀는 데에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한 스타일이었다. 아직은 작년에 사귄 친구들이 더 친하고, 새로운 반에서는 이제 천천히 친구들을 알아나가는 단계이니, 어쩔 수 없이 학기 초에 인기투표처럼 진행되는 선거에서 떨어질 수 있다. 


막내가 뽑히지 않아서 서운한 것도 있는데, 제 언니만 되면 비교되어 더 속상해할 것 같아서 "언니도 떨어졌대. 너무 속상해하지 마. 안 돼도 괜찮아."하고 방문 앞에서 알려줬다. 묵묵부답이긴 했지만. 


선거에서 떨어질 수 있지만, 그럴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시도해 보는 것은 큰 용기이고, 떨어지더라도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친구들에게도 내 보이고 스스로도 돌아볼 수 있는 계기이니, 좋은 성장의 기회라고 생각한다. 그 과정에서 다른 이유로 마음만 상하지 않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문득 내가 어린 시절 이런저런 상황에서 고배를 마신 게 기억이 났다. 준비도 제대로 안 돼있는 상태에서 마음만 갖고 회장 선거에 나갔다가 떨어진 일이 있었는데, 그건 잠깐 기분이 나빴을 뿐 그냥 지나갔다. 그런데 가만 생각을 해보니, 학교 생활에서 선생님으로 인해 상처를 받았던 세 번의 시간이 생각났다. 


선생님의 차가움


하나는 초등학교 1학년 때였다. 사실 어떤 특별한 사건이 있는 것은 아니었는데, 선생님은 나를 그냥 미워하고 싫어했다. 당시에는 성적에 따라서 1~2등 중에서 남자는 반장, 여자는 부반장을 맡아서 1년을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등수로 정하는 것도, 성별에 따라 정하는 것도 너무나 말이 안 되는 거지만.) 하여 내가 부반장을 맡게 되었다. 


하지만 다른 아이들에게는 상냥하던 담임 선생님이 나에게는 세상없이 사나운 표정을 하고 매섭게 이야기를 했었다. 나는 내가 왜 미움을 받는지 알지도 못하겠는데, 선생님은 나의 하루하루를 살벌하게 했다. 아마도 나는 선생님 앞에서는 바짝 얼어있으면서도 친구들 앞에서는 큰소리치며 아무렇지 않은 척하지 않았을까 싶다. 


이유는 생각나지 않는데, 엄마가 학교에 오신 적이 있었다. 무슨 간부 부모님들 회의가 있지 않았을까 싶다. 초등학교 1학년 때 기억이 얼마나 나랴 싶은데, 그 장면은 몇십 년이 지난 지금도 너무나 또렷하다. 엄마가 담임 선생님께 인사하신다고 교무실로 들어갔는데, 담임 선생님이 마침 저쪽에서 이쪽으로 걸어오고 계셨다. 


엄마가 내 귀에 대고 인사를 잘하라고 하셨다. 난 항상 인사를 잘하는데, 왜 그러시지? 하고 생각했다. 그리고 물론 하루 종일 교실에서 봤던 선생님이지만, 당연하게도 나는 선생님께 허리를 굽혀 인사를 했다. 엄마도 옆에서 인사를 하셨겠지? 나야 내 인사하느라 엄마를 보진 못했으니까. 


근데 선생님은 인사를 받기 위해 멈춰 서지 않으셨다. 엄마 인사에 대답도 하지 않으셨고. 그냥 그렇게 지나가셨다. 


선생님이 다가올수록 쿵쾅거리며 뛰었던 내 심장은 다시 오그라드는 것 같았다. 왜 내 인사를 안 받으시지? 엄마는 왜 못 본 척하시지? 근데 표정은 왜 그렇게 차가운 거지? 나는 왜 싫어하시는 거지? 


그 장면이 슬로모션으로 수천번은 '다시보기'가 되었던 것 같다. 그리고 '왜?'라는 질문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내가 못생겼나? 냄새나나? 시끄러운가? 시키는 일을 못했나? 초등학교 1학년 꼬맹이인 나로서는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였다. 그리고 상처였다. 


몇 년 뒤에야 엄마는 조심스레 말씀하셨다. 당시에는 우리가 잘 살지도 못하고 엄마가 주변이 없어서 촌지를 드리지 못했는데, 부반장씩이나 맡으면서 선생님한테 봉투 한 번을 드리지 않아서 그랬던 것 같다고. 우리 집에 여유가 조금씩 생기면서 엄마는 한 학기에 한 번 정도 선생님들께 인사를 가셨었다. (이제는 이런 거 신경 쓰지 않아도 돼서 어찌나 다행인지.)


절차의 불공정함


두 번째는 초등학교 5학년 때였던 것 같다. 전국체전이 있다고 학생들이 개회식과 폐회식 행사에 동원되었는데, 거기에 선발된 것이다. 우리 학교 학생들 전체가 참여하는 행사가 아니고 일부 학생들만 뽑아서 뭔가 시킨다길래 너무 신나 하고 있었다. 그런데 며칠 후 선생님께서 나만 따로 불러서, 미안하지만 나는 거기에 참여할 수 없다고 하셨다. 키가 더 큰 친구가 들어가게 되었다고.


덤덤하게 알겠다고 하고 돌아섰지만, 그때의 서운함은 말도 못 했다. 나는 큰 키가 아니었지만, 내 키로 못하는 것도 아닌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나는 나 대신 선정된 친구의 엄마가 어떻게든 자기 아이를 시켜달라고 한 게 영향이 있다고 생각했다. 나에게 그런 통보를 하기 전에 이미 다른 아이를 확정시켜 놓았다는 게 뭔가 이상했다. 


처음부터 어떤 기준에서 뽑는지 알려주었거나, 혹시 기준을 나중에 알았다면 대신할 사람을 뽑기 이전에 기준이 바뀌어서 다시 뽑게 되었다고 상황을 알려주거나, 전체 반 앞에서 이러저러한 이유로 참여자가 바뀌었다고 하면 차라리 공정하다고 느꼈을 텐데, 어떤 과정을 거쳐서 의사결정되는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일방적인 통보를 받으니, 어린 마음에도 이건 아니다 싶었다. 


이후 몇 달 동안 방과 후에 피켓 들고 땡볕에서 걷는 연습 하느라 신나게 뛰어다니는 그 친구를 보면서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느라 힘들었다. 그 여파로 그 이후에 키가 더 안 자란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도 생겼다. 서러움이 사무쳐서.


선생님의 히스테리


세 번째 힘든 기억은 중학교 1학년 때였다. 성장기 호르몬이 요동을 쳐서 누구나 힘들 수 있고, 누구도 힘들 게 할 수 있는 시기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중학교 들어갈 때의 내 성적이 반에서 1등을 했다. (그 이후에 1등을 그리 많이 하지는 않았는데, 그때는 왜 그랬는지.) 그래서 또 자동으로 반장이 되었다. 여중이었기 때문에 반장 자리를 남자에게 양보해야만 하는 상황은 없었다. 


그런데 학교를 갓졸업하고 오신 젊은 담임 선생님은 나만 미워하셨다. 내가 눈치가 없기는 좀 없었나 싶기도 한데, 눈치가 백 단인 부반장은 상황 파악을 빨리 하는 편이어서 좀 이상하다 싶으면 그 친구에게 자주 묻곤 했다. 이 선생님도 신경질이 많으셨는데, 한 번은 나랑 부반장을 같이 교무실로 부르셨다. 선생님 책상에는 선생님이 맡으신 가정시간에 본 쪽지 시험지가 올려져 있었다. 아무렇게나 던진 것처럼 놓여 있는 나와 부반장의 시험지는 둘 다 10문제 모두 맞혀서 100점으로 채점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뭐가 잘못된 거지?


왜 부른 거지? 난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다. 지금 딱히 불러서 시킬 일이 있는 건가? 뭘 칭찬할 일이 있나? 야단칠 일이 있나? 뭐 잘한 게 있나? 하라고 했는데 안 한 게 있나? 근데 저 시험지는 왜 저기 있는 거지? 선생님이 부르시면 영광스럽다는 생각을 하곤 했던 터라, 아직 상황 파악 못하고 좋은 쪽인지 나쁜 쪽인지 왔다 갔다 하며 생각이 요동을 쳤다. 


잠깐 다른 데에 가신 사이에 부반장에게 낮은 소리로 물었다. "야, 왜 부른 것 같아?"

부반장 친구는 얼굴이 굳어있었다. "몰라. 근데 뭔가 안 좋은 것 같아. 저기 시험지 있잖아."

내가 다시 답했다. "근데 시험 다 잘 봤는데, 시험 갖고 뭐 야단칠 일이 있겠어?"

부반장은 자꾸 시험지 쪽을 턱으로 가리켰다. "몰라. 근데 분위기는 이상해."


선생님이 자리로 오셨다. "내가 너희 왜 부른 것 같니?" 

항상 들고 다니며 교탁을 탕탕 치시는 북채로 우리를 가리키시며 허공을 휘저으신다. 


그때 내가 표정 관리를 잘 못했다. 야단맞는 표정을 지었어야 하는데, 그냥 적당히 무표정했거나 사안을 가볍게 생각하는 것처럼 보였나 보다. 나와 친구는 조용히 합창을 했다. "잘 모르겠습니다."

그랬더니 선생님이 갑자기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이게 글씨니? 다 맞으면 뭐 하니? 글씨를 알아보게 써야지, 응? 이게 글씨야? 반장이라고 하는 애가 시험에 글씨를 이런 식으로밖에 못 써?"


허걱. 둘을 불렀는데, 하나만 야단친다. 그런데 그건 나였고. 


"이거 봐. 부반장 쓴 것처럼 이렇게 반듯하게 글씨 못 써?"


글씨가 악필인 게 문제였으면 시험지 돌려주면서 '글씨 좀 잘 써라. 이래서 알아보겠니?' 하며 농담 섞어 구박을 해도 감사할 일이다. 근데 교무실이 떠나가라 소리를 지르면서 반듯반듯 예쁜 글씨로 답을 쓴 부반장의 시험지를 비교해서 보라고 들이미는 건 또 뭔가.


교무실에 있던 선생님들이 모두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게다가 야단맞는 것도 아니고 '비교군'으로 불려 온 부반장도 쥐구멍에 들어갈 것처럼 오그라들었다. 야단의 목적도 잘 모르겠고, 이 많은 사람들을 관중으로 세운 이유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리고 잘못했다는 말을 안 한다고 독하다는 말도 듣고, 결국 말로 못하겠으면 글로 써 오라는 소리를 듣고 자리는 마무리되었다. 이후에 절절한 편지를 써서 마음을 풀어드리고, 글로나마 나도 아부할 수 있는 아이라는 걸 보여드렸다.


그 이후에도 예상치도 못한 이유로 반 전체가 야단을 맞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책상 위에 올라가서 한 시간 동안 무릎 꿇는 벌을 받거나, 쪽지 시험에서 틀리면 손바닥을 맞거나 했다. 근데 누구도 선생님의 히스테릭한 스타일을 교육자의 전형으로 받아들이지는 못했다. 그러는 동안, 부반장과 나는 각자의 장점과 단점을 살리고 보완하면서 손발을 맞춰 잘 지냈다. 


선생님들의 위로


참 재미있는 것은, 조용히 차가운 대접을 받던 초등학교 1학년 때와는 달리, 중학교 1학년 때의 그 시끄러운 사건을 목격한 많은 선생님들이 나를 위로해 주셨다는 거다. 


사회 선생님은 나중에 담임 선생님이 안 계시는 시간에 교무실로 따로 불러서 무슨 일이 왜 일어난 건지 물어보셨다. 내 입장을 직접 듣겠다는 건데, 이게 나로서는 너무 감사했다. 


"제가 글씨를 너무 못써서 담임선생님이 화가 나신 것 같아요."라고 대답했는데, 나도 말하고 보니 참 웃겼다. 자기 반 아이가 글씨를 못 쓰는데, 왜 그렇게 감정적으로 야단을 치고 흥분을 해야 하는 걸까? 그분이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평소에 나를 못마땅하게 여긴 게 있었는지, 내가 다 알 수는 없다. (단, 이때에는 우리 어머니가 소정의 촌지를 드렸던 것으로 안다. 그게 싫었나? 아님 적었나?)


사회 선생님은 잠깐 가만히 계셨다. '내가 너한테 무슨 말을 하랴, 같은 선생님으로서 담임 선생님 욕을 할 수도 없고, 내가 너를 야단칠 이유도 없고'하는 표정이셨다. 그러다가 "알았어. 선생님이 야단칠만하니까 야단치셨겠지. 앞으로 잘해." 하셨다. 근데 그게 정말 위로가 되었다. 공정하게 양쪽 입장 들어보고 상황 파악 하려고 불러주신 것만으로도 너무 감사했다. 내가 일방적으로 당한 게 옳은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어른이, 선생님이 계시다는 게 너무 감사했다. 


그리고 눈이 나빠 엄청 두꺼운 안경을 쓰신 수학 선생님은 우연히 복도에서 만났을 때 내 팔을 잡아당기셨다. 같이 복도를 걸으며 말씀하셨다. 


"원래 반장은 대표로 일도 하고 야단도 맞고 하는 거야. 너희 반 잘하라고 선생님이 너 혼내신 거야. 너무 개인적으로 받아들이지 말고, 그 자리에 있기 때문에 듣는 야단이라고 생각해."


오마나. 사회 선생님과 수학선생님 모두 다 여자분들이시고 나이대도 비슷해서 담임 선생님과 친한 분들이었다. 그런데 이분들이 나를 위로해 주시다니. 


나는 괜찮은 척하며 "네."하고 대답했다.


근데 수학선생님은 한마디 덧붙이셨다. "그리고 너 수학 열심히 해서 이과 가라. 수학을 잘하면..." 뭐가 좋고 이과를 가면 뭐가 좋고... 한참 당부하셨다. 


그 이후로도 담임 선생님과의 갈등으로 나나 반 전체가 힘든 일이 여러 번 있었지만, 다른 선생님들의 위로가 그 1년을 잘 버티게 해 주셨다. 


2학년에 만난 담임 선생님 또한 1학년 담임 선생님과 친하게 지내는 분들 중 하나셨고, 이전의 사건을 알고 계신 분이었다. 하지만 특별히 왜 1학년 때 선생님에게 미움을 받았는지 물어보지도 않으셨고, 사소하고 이상한 일로 트집을 잡지도 않으셨다. 누구에게도 편애가 없었고 반 전체를 적정한 애정과 공정으로 대해주셨다. 나도 내 자리에서 열심히 살아보려고 애썼다.


이 세 가지 일들 모두 내 성격을 형성하는 데에, 아님 적어도 선생님들을 대하는 내 태도에 부정적인 방향으로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앞의 두 가지는 나름 이유를 추정할 수 있는데, 세 번째 중1 담임 선생님의 히스테리는 정말 궁금하다. 뭐가 그분을 그렇게 히스테릭하게 만들었는지, 학생들에게 일관된 기준 없이 흥분해서 야단치는 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만나면 꼭 물어보고 싶다. 


PS. 고등학교 때 문이과를 정하는 시기기 되었을 때, 적성검사를 해도 시험 점수를 봐도, 문이과 성향이 반반씩 나오기 때문에 너무나 결정하기 힘들었다. 그 때 중1 수학 선생님이 내 팔을 잡고 복도를 걸으며 하셨던 말씀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그 선생님이 나를 붙잡고 정성을 쏟으며 해 주신 말씀이 감사해서, 내내 의지가 되었던 게 감사해서, 그래서 이과를 선택했다. 과감하게! 후회없이! 


(쉿! 외우는 게 힘들어서 문과를 못 갔다는 건, 안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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