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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엘 Feb 20. 2024

내가 뱉은 말 한마디의 무게

“저 기억 못 하세요?”


처음 보는 듯한 여자가 물었다. 너무 서운하다는 투인데, 만났던 기억이 전혀 없다.


유학이 끝나고 귀국을 할 때만 해도 미국이 강 건너 있는 동네 같은 마음이었고, 자주 올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돈도 시간도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언니가 아직 있다는 것과 1년 남짓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잠시 현실을 떠나 머리를 식혀야 한다는 핑계를 겨우 둘러대며 미국에 갔다. 비행기삯은 홀트를 통해 입양 가는 아기를 에스코트하면서 지원받았다.


5년 정도 살았던 뉴욕이 다 내 고향 같을 수는 없지만, 5년 내내 빠짐없이 다녔던 한인성당은 누가 있어서라기보다 그냥 내 마음이 지칠 때 위로가 되어주었던, 상징적으로 고향 같은 곳이었다. 


동양미술사 교수이기도 하신 신부님은 내가 무슨 질문을 해도 잘 받아주셨다. 종교적인 질문을 하든, 문화에 대한 질문을 하든, 쉬우면서도 진지하게 설명해 주셨다. 같이 활동했던 성가대 선후배들은 항상 예의 바르면서도 편했다. 이민자 가족들은 잠깐씩 왔다 가는 유학생들을 제 조카처럼 배려해서 무슨 모임이나 행사가 있으면 제 가족처럼 먹이고 챙겨주셨다.


물론 신부님이 상징적으로 가장 중심이 되셨고, 상대적으로 친한 사람들이 있기도 했지만, 딱히 누가 있어서가 아니더라도 그 성당(장소로서의 성당이 아니고 신자들의 모임으로서의 성당)은 내 마음의 안식처였다.


한국 사람들과의 교류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굳이 매주 한인성당을 찾아가게 만드는 원동력이었다. 하지만, 오가는 데에 드는 시간, 3시 미사 전후에 성가대 연습을 하는 시간, 자주 함께 하게 되는 저녁 식사, 가끔 있는 성당 행사 등에 쓰이는 시간을 생각하면 공부에 전념해야 하는 유학생이 굳이 한인성당을 찾아갈 이유는 없었다. 실제로 많은 학생들이 학교 주변에 있는 성당에 다녔으니 말이다.


하지만 나는 굳이 거리가 있는 한인성당에 다녔다. 4년간은 성가대에서 활동을 했는데, 마지막 1년은 영어로 진행되는 어린이/청소년 미사에서 기타 반주를 했다


그동안 기타 반주를 여러 해 동안 해왔던 아저씨가 사정이 생겨서 하지 못하게 되었는데, 청소년이나 중장년 중에는 기타를 치는 사람이 거의 없었고 청년 중에는 기타를 칠 줄 알면서 매주 나와서 봉사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내가 기본 코드 몇 개 칠 줄 안다고 하자, 나에게까지 제안이 왔다. 


부족한 실력에도 불구하고 지난 4년 동안 거의 빠짐없이 성가대에 나갔던 것 때문에 믿고 맡길 수 있다고 생각하신 것 같았다. 1년 뒤에 한국에 들어가게 될 것 같다고 몇 번을 고사해도, 그동안 다른 사람 찾을 테니, 일단 맡아달란다. 


성가대는 여러 명이 노래를 하는 거라서 약간 묻어가는 느낌이 있다. 좀 부족해도, 틀려도 그냥저냥 했다. 그런데 어린이/청소년 미사에서 기타 반주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였다. 내가 치는 소리를 모든 사람이 다 듣는다. 내가 틀리면 아이들도 덩달아 틀릴 것이고, 아름다워야 할 미사에 잡음이 될 것 같았다. 


미사에서 성가는 기본으로 입당, 봉헌, 영성체, 퇴장 성가 등 네 번을 부르게 되는데, 어린이/청소년 미사에서는 중간에 기도문이나 응송을 노래로 하는 부분이 여러 번 있다. 나는 영어로 미사를 하는 것도 익숙하지 않은 데다, 어렵지는 않지만 생소한 노래도 있어서 집에서 연습을 안 할 수 없게 되었다. 


또 어린이/청소년 미사는 4시에 있지만, 성가대 반주를 하는 언니와 따로 가면 교통비를 두 배로 늘어나니 성가대 연습 시간에 맞춰 일찍 집을 나섰다. 결과적으로 이전보다 성당 활동에 쓰는 시간이 이래저래 늘어났다. 

유학 생활 중 일요일들을 그렇게 보내고 드디어 한국으로 돌아왔다. 


한인성당에서는 일 년에 두 번 조용한 수도원으로 피정 겸 야유회를 가는데, 아침 일찍 가서 미사하고 오후에 기도 시간이 있기도 하지만, 점심은 소풍처럼 즐겁게 먹는다. 이민자 가족들은 유학생들 몫까지 넉넉하게 음식을 준비해 오고, 몸만 가는 나 같은 유학생들은 현장에서라도 도움이 되려고 이리저리 뛰어다닌다. 


내가 오랜만에 미국을 다시 찾았을 때 마침 이 야유회 날이었다. 그사이 낯선 얼굴들이 많이 생겼고, 나는 어떻게든 어색하지 않으려고 아는 얼굴들을 찾으며 무슨 일이든 하려고 하고 있었다.


그 가운데에 어떤 얼굴이 튀어와서 반갑게 인사를 하더니 내가 쭈뼛쭈뼛하는 걸 보고는 자기를 기억하지 못하느냐고 서운해하고 있는 참이었다. 


아, 이걸 어쩌나… 내가 전에 만났던 사람이니까 반갑게 와서 인사를 했을 텐데, 성가대는 아니고, 어린이/청소년 미사에서는 어른과 뭘 한 일이 없고, 기존의 이민자 가족이었다면 언니도 알아야 하는데 언니는 전혀 모르는 눈치고, 같은 학교 선배라기엔 분위기가 유학생이 아닐 뿐더러 나이가 좀 많고… 전혀 가닥을 잡지 못하겠다.


할 수없이 털어놨다.


“죄송한데요, 제가 기억이 잘 나지 않아요.”

“너무 서운하네요. 난 너무 생생하게 기억하는데…”


정말 미안했다. 나를 이렇게 기억해 주는 사람을 난 전혀 모르겠으니.


“언제 뵀었죠? 저는 작년에 한국 들어갔다가 오랜만에 왔는데요…”

“그때 만났어요. 작년에 한국 가기 직전이라고 하면서 바로 이 야유회에서요.”

“아, 그랬어요? 정말 죄송해요. 제가 그러고는 바로 한국 가는 바람에 기억이 끊겼나 봐요.”

“네에…”


“근데 어떻게 저를 그렇게 잘 기억하세요? 한번 만나고 일 년 만에 봤는데, 어떻게 한 번에 알아보셨어요?”


“저는 그쪽 생각 진짜 많이 했어요. 지난번에 만났을 때 저한테 그러셨잖아요. 성당에서 봉사하는 거 시간 낭비라고 생각하지 말고 열심히 하라고. 봉사를 하면 시간을 쓰는 건 맞지만, 그 시간 여기서 쓰지 않아도 자칫 낭비하기 쉬운데, 남을 위해 시간을 쓰고 나면 오히려 나머지 시간 더 열심히 살게 돼서 결국은 도움이 될 거라고요.” 


그제야 슬슬 내 기억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내가 그 말을 했던 상황이 기억이 났다. 


“그때 그 말 듣고 열심히 성당 나오고 내가 할 수 있는 거 최대한 봉사도 하면서 지냈어요. 그리고 그렇게 살다 보니 그 말이 맞더라고요. 사실 고민했었거든요. 성당까지 오가는 게 시간이 들기도 하고, 나 살기도 바쁜데 성당 활동까지 신경 써야 하나 싶기도 하고, 내 인생도 고민이 많고… 근데 오히려 성당 활동을 한 게 도움이 됐어요. 진짜 나머지 시간을 더 열심히 살게 되더라고요.”


갑자기 번개 맞은 것처럼 머리가 띵했다. 내가 남에게 그런 말을 하고 갔는데, 나는 지난 1년 간 그렇게 살았는지 순간 돌아보게 되었다. 그리고 내 말 한마디에 한 사람이 어떤 결심을 하고, 그 결심한 대로 1년 넘게 살아왔다고 하니, 엄청난 책임감이 느껴졌다.


“아, 감사합니다. 제가 드렸던 말씀을 그렇게 중하게 생각해 주셨다니 정말 감사합니다. 제가 바로 기억나지 않았지만, 그 말씀은 진심이었어요.


“그랬겠죠. 진심이라고 느껴졌으니까 저도 그 말을 깊이 생각했고 그 말대로 살기로 결심했고, 그렇게 산 거겠죠. 가끔은 시간이 부족해서 버겁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는데, 그만큼 다른 시간을 효율적으로 쓰게 되된 것 같아서 후회는 없어요.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활동 하려구요.”


그제야 우리는 같이 웃었다.


이 일이 있고 나서, 나는 누구에게든 어떤 상황에서든 어떻게 살라든가, 어떤 일을 하라든가 하는 말을 하게 될 때 두 번 세 번 생각하게 말하게 된다. 


남이라서 쉽게 말하는 것은 아닌지, 내가 한 말이 일파만파 퍼져나가도 일말의 후회 없을 말인지 생각하게 된다. 내가 그 말을 했던 것을 혹여 잊어버린 상태에서 다른 사람이 그 일을 언급해도 부끄럽지 않을 말인지 꼭 미리 생각하게 되었다. 


나의 말 한마디가 한 사람의 1년 또는 그 이상을 변화시켰다. 그 사람의 행동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그 말이 묵직한 부메랑이 되어 나에게 돌아왔다. 


이것이 바로 말의 힘이다. 


때론 기댈 수 있는, 때론 무섭기도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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