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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궁이 Oct 11. 2023

소소한 추억

대우건설과 지르텍

훈이


집사님에게는 아들이 한 명 있다. 이름은  '훈'.

 

50이 다 되어 결혼하신 집사님 부부가 얻은 늦둥이다. 

귀한 독자 훈이는 부모님과 세대차이는 물론이고 한창 예민한 사춘기 나이에 이민을 오면서 소심한 성격이 더 소심해졌다고 한다. 바푸삼에는 교류할 한인도 없기 때문에 외로움을 많이 타서 반항도 많고 갈등도 있다고  늘 걱정이시다. 


부모님을 도와 바푸삼과 두알라에서 사진관을 운영하고 있는 훈이는 , 불어도 수준급이었고 함께 일하는 카메룬 현지인들과 몇몇 조선족 사이에서는 보스지만 큰 형 같은 존재다. 규모가 꽤 큰 사진관을 운영하고 있었기에 20대 초반의 나이 치고는 성숙해 보였고, 일찍이 윤택한 삶을 누리고 있었다. 경상도 부모님 영향인지 특유의 무뚝뚝한 말투와 무표정이 진하게 배어 있었지만, 직원들 어려움에 티 안 내고 도와줄 아는 정 많고 마음 여린 것이 집사님을 똑 닮았다.


훈이는 조직보스 같은 아우라를 풍겼지만, 막상 말을 걸면 수줍어서 눈도 못 마주치는 시골청년 같았다. 

그런 반전이 재미있어서 나는 사진관에 갈 때마다 굳이 바쁘다는 훈이를 찾아서 말을 걸고 농담을 했다.  그리고 훈이는 한국인 누나가 생겨서 좋았는지 가끔 살갑고 애교 있는 모습으로 반겨주었는데 집사님 부부도 놀라시곤 했다. 훈이는 가끔 현지인 손님들에게 부담스러울 정도로 나를 칭찬하고 자랑스러워했는데, 한국의 좋은 것들을 놔두고 아프리카까지 봉사하러 왔다는 것만으로 과대평가하며 신기해했다. 

주변의 현지인 직원들은 우리가 서로 주고받는 한국말을 흥미롭게 듣고 있다가 따라 하고는 했는데, 한 번은 그중 한 명이 훈이와 내가 하는 말을 따라 " 구루구루구루~" 흉내 내서 한참을 웃었다. 


S사진관은 이곳에 이방인으로 어딜 가나 눈에 띄는 내가 병원이 아닌 곳에서 현지인들과 친해지고 나를 알릴 수 있는 좋은 장소였다. 


한 여름밤의 미팅


단원 모임이 있던 주라 야운데에 며칠 머물고 있었는데, 훈이에게 연락이 왔다. 

내가 야운데에 있다는 소식을 어디서 들었는지 평소에 연락이 없는 녀석이 전화해서는 

대뜸 "누나 야운데 왔죠? 이번 주말에 시간 되시면 미팅하실래요?" 했다. 

"미팅? 토요일 저녁시간은 되는데 무슨 미팅? 넌 두알라 아니야? " 

"아, 토요일 좋아요. 잘됐다. 카메룬에 와서 아스팔트 깔아주고 있는 대우건설 형들이 있거든요. 누나랑 나이가 비슷비슷해서 미팅하면 재밌을 것 같아서요. 혹시 친구분들도 두세 분 같이 오실 수 있나요? "

"나는 미팅을 한 번도 안 해봐서, 친구들한테 한 번 물어볼게. 너도 오는 거야?"

"네, 누나. 그냥 저녁 같이 먹는다 생각하고 편하게 나오세요. 저도 갑니다."  


이 소식을 알리자마자, 30대 언니들이 강력 동의하면서 동기단원 5명 모두 찬성. 

야호~! 미팅을 하기로 했다. 

우리가 만날 수 있는 한국인은 단원들 말고는 없는데, 낯선 한국인들과 미팅이라니 20대 중반에서 30대 초반인 우리 동기들은 그들이 누구인지 정확히 알지도 못하면서 마냥 설레었다. 현지인들과의 일상에 지치고 한국이 그리워지는 우리들에게 재밌는 시간이 될 것 같았다. 

게다가 나는 아직 이 나이 되도록 미팅, 소개팅을 해본 적이 없었으니 많이 기대했던 것이 사실이다. 


다만, 아쉬운 것은 입고 나갈 옷이 없다는 것. 


나는 늘 교복처럼 입고 다니는 봉사단 운동복 바지에 후줄근한 반팔 티셔츠와 흰색 남방 하나뿐이었다. 그래서 운동복 바지에 흰 남방을 입었다. 각자가 나름 깔끔한 옷을 찾아 입고 평소 안 하던 메이크업을 했는데, 시커멓게 그을린 얼굴에 파우더를 톡톡톡 바를수록 얼굴이 허옇게 둥둥 떠오르는 모습이 우스꽝스러워 우리끼리 꺄륵꺄륵 웃느라 배가 아팠다. 

옷은 당장 풀을 베러 가도 손색이 없는 농활 복장이었는데, 메이크업은 점점 신부화장이 되어가고 있었다. 


데뽀택시를 불러 다섯 명이 타고서 왁자지껄 수다를 떨며 훈이가 알려준 레스토랑을 찾아갔다. 

무슨 말인지 이놈의 중국인들 시끄러워 죽겠다는 표정으로 기사는 가속페달을 밟았다.


저녁 7시가 넘어 도착한 레스토랑은 야외에 테이블이 놓여있는 곳이었는데, 긴 빨랫줄에 동글동글 백열전구가 달려 있어 아늑한 분위기였다. 안쪽으로 들어가 보니, 정말 TV 예능프로에서나 봤음직한 미팅 대열로 테이블이 길게 붙어 있고, 한쪽 줄에 거무튀튀하고 우락부락한 남자들이 나란히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우리가 들어서는 것을 보고 부산스럽게 자리에 일어나 어색하게 인사하기 바빴다. 


훈이와 나는 서로 웃음이 났지만, 눈인사만 하고 나오신 분들과 우리 다섯은 차례대로 자기 소개하며 인사했다. 훈이가 구체적인 정보를 준 것도 아니고 내가 물은 것도 아니기에 뭐라 할 수는 없었지만, 대부분 30대 초반이라는 자기소개가 놀라울 만큼 40대 아저씨 같은 분들이 두 세명은 돼 보였다. 

각자 간단한 자기소개를 마친 후로는 어떻게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부터 시작해서 아프리카살이 무용담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우리 못지않게 그들도 한국어 수다 능력이 뛰어났다. 


자연스러운 이야기가 오고 가는 동안 다들 맥주(기네스)를 한 병씩 들고 건배를 하고 마셨다. 우리 동기 언니들은 모두 주당들이었는데, 술을 많이 먹고도 취하지 않는 능력자들이었다. 유일하게 비주류인 나는 은돌레(Ndole)와 튀긴 쁠랑뗑만 타깃 해서 무섭게 먹어 해치우고 있었는데, 남자들 중 한 분이 소지폼 뽑기 한번 해야 하지 않느냐고 제안했다. 

모두가 언제 적 이야기냐며 비웃더니 너도나도 소지품을 찾기 시작했다. 

난 화장을 고치는 여자도 아니었고, 액세서리도 좋아하는 편이 아니어서 내놓을게 비염약 (지르텍) 뿐이었다. 

이런 걸 하는 줄 알았다면 손수건이라도 빌려왔을 텐데.....


테이블에 모아둔 소지품은 '립스틱, 손거울, 손목시계, 머리끈, 지르텍'이었다. 


남자는 훈이를 포함해서 6명이고 여자는 5명이라 훈이는 모인 사람 중에 가장 막내라고 주선자 겸 진행자로 빠지기로 했다. 남자들은 가위, 바위, 보로 소지품 고르는 순서를 정했고 여자들은 맘에 드는 사람이 없다면서도 자기의 소지품을 누가 골라가나 숨죽여 지켜보았다. 소지품이 테이블에 올려졌을 때 남자들이 지르텍을 보며 누구냐며 다들 웃었다. 

지르텍이 뭐 어때서? 

나에게 너무 소중한 비염 상비약인데, 이걸 고르는 사람은 나처럼 비염이 있거나 특이하거나 하겠지. 



내장은 아무 죄가 없다


깔끔하고 눈은 무쌍. 

남자 중에는 내 맞은편 왼쪽 끝에 앉은 사람이 첫인상은 젤 좋았는데, 

그러나 그분은 롱드레스를 입은 맏언니와 연결되었다.

역시나 예상대로 내 지르텍은 끝까지 남아있었고, 마지막 차례가 선택의 여지없이 가져갔다. 

나와 마주 앉아 있던 남자 막내 '0 태성'. 


나와 동갑이라는데, 햇빛에 시커멓게 그을리고 여드름 피부인 태성은 키가 185cm에 우락부락하게 생겼다. 그는 상체를 바짝 앞으로 당겨와 자기 누나도 산부인과 의사라며 간호사냐고 묻기를 시작으로 이런저런 질문을 했고 나도 편하게 이야기를 나눴다. 개인적으로 연하나 동갑까지는 이성으로 생각이 안돼서 더욱 편했다. 

 

그때였다. 나 혼자 이것저것 먹어댄 많은 것들이 아랫배에 신호를 보내왔다.

현지의 화장실 사정을 아는 나는 어떻게든 참아야 했다. 내 앞에 앉은 사람이 무슨 말을 하는지 들리지도 않고 내가 하고 싶은 말도 생각나지 않았다.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히는 것 같았고 심장이 더 빨리 뛰는 것 같았다.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을 때, 

이상형이 어떻냐는 진중한 질문을 하는 그의 말을 끊고 눈빛으로 간절한 상태를 전달하고 말았다. 

화장실을 가야 할 것 같다고 했다. 

너무 창피했으나, 식은땀이 나도 눈앞이 노래질 정도로 뱃속은 응급상황이 돼서 눈에 뵈는 게 없었다. 

종종걸음으로 그 자리를 박차고 나와 화장실을 찾아갔다. 


아니나 다를까 문을 열었다 다시 닫았다. 못 들어가겠다. 

내가 왜 이렇게 많이 먹었나 원망해 봐야 소용없다.

화장실이 푸세식이라는 것과 실내가 어둡다는 게 문제였다. 뭐가 있을지 모르는 공포...


발을 동동 굴리고 있는데, 이 와중에 자기도 볼 일을 본다며 그가 왔다. 

화장실은 한 칸이고 남녀구분이 없으니 순서대로 하면 내가 먼저인데, 아니 난 특별한 상태인데 굳이 화장실을 따라 나오다니 눈치가 없는 거 아닌가 속으로 욕을 한 바가지를 했다. 

나보고 어서 들어가라 하면서 자기가 앞에 서 있을 테니 필요한 거 있으면 부르란다. 

일단 나에게 일회용 티슈는 충분히 있었고, 다른 필요한 것은 없는데 지체할 시간이 없다.


그에게 플래시 불빛을 천장 쪽으로 비춰달라고 부탁하고 들어갔다. 

오, 노우... 꿈틀대는 구더기들이 보인다. 너무 많다. 

게다가 똥통을 자주 안 비우는지 너무 가까이 올라와 있는 구더기들이 내 용변이 떨어질 때 튀어 올라올 것만 같았다. 아니 그냥 발을 대고 쭈그려 앉아 있는 동안 그것들이 내 발등에 올라올 것만 같았다.

'으으으~~~~~~~~~~~~' 하는 비명이 절로 나왔다. 

그가 "왜 그러세요?" 하는 소리에 대답 없이 입을 틀어막고 볼 일을 보았다. 

처음엔 밖에 있는 그가 의식돼서 조심조심 힘을 주어 조금씩 나눠 쌌는데, 이게 어디 내 맘대로 되던가? 


배가 사륵사륵 아프더니  더 참기 힘들었는지, 엄청난 천둥소리를 몰고서 응가가 한 바닥 나왔다. 

식은땀이 주룩 , 천둥이고 번개고 마음껏 나오라 문을 열어주었다. 

볼일을 다 보고 나니 구더기가 어디 튀어올라 묻었을까 살피느라 시간이 걸렸다. 아직 비추고 있는 천장불빛이 그가 아직 밖에 있다는 것과 이 모든 것을 알 것이라는 사실에 밖을 나가기가 너무 민망했다. 


하지만, 또 볼 사이는 아니니까 모르는 척 나왔다. 

눈치 없이 나를 보며 괜찮냐 묻는 그에게 짜증 났다. 

다시는 만날 일이 없을 테니 철판을 깔자. 여기는 카메룬이니까...


나도 천장에 불을 비춰주겠다 했는데, 

극구 사양하며 어서 자리에 가 있으라기에 돌아서서 나오는데 기분이 매우 찝찝했다. 

굳이 이 화장실에서 이런 추억을 만든 태성에게는 전혀 호감이 가지 않았다. 



오늘 미팅은 그날 구더기 화장실로 추억 속에 꽁꽁 넣어버리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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