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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울 Nov 30. 2023

무언가와 안녕하는 기분으로

시작과 끝은 가장 멀지만 누구보다 닮았다. 마치 가족처럼.

새 학기가 시작하고 한 학년이 끝날 때. 

새해가 시작하며 우울하고 한 해를 보내며 다시 우울해질 때.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의 어색함과 헤어질 때의 아쉬움.

새로운 동네에 애착 가는 산책로가 생기고 그 동네를 떠나야 할 때. 

익숙해지는 일과 다시 익숙해지려는 일. 

끝과 끝에서 안녕을 말하지만, 그 사이에도 무수한 안녕이 있다.


정확히 무슨 말을 하려고 이 글을 쓰는 건 아니다. 사실 하고 싶은 말이 딱히 없을 수도 있다. 그저 요즘 그 '안녕'하는 일을 많이 생각하기 때문에 그것이 항상 마음에 맴돌고 있다. 올해도 벌써 다 가고 30일 정도만을 남겨두고 있다. '안녕'할 일이 생긴다는 뜻이다. 


올해가 시작할 때 나는 너무나 두려웠다. 작년 스무 살을 정말 힘들게 보냈다. 나의 환경에 쉽게 만족하지 못했다. 아무도 뭐라 말하지 않았지만 괜히 자존감은 떨어지고 자격지심만 가득했다. 그래서 내게 주어진 환경을 포기하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위해 새로운 도전을 택했지만, 그것이 첫 번째 시도만에 잘 풀리지 못했다.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냈고, 내가 사랑하는 이들도 같은 이유로 힘들어하는 것이 나를 힘들게 했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스스로에게 화가 났고, 그럼에도 바뀌지 않은 내게 실망했다. 무기력해졌고 겁이 많아졌다. 툭 건들기만 해도 픽 쓰러질 것만 같았다. 처음으로 부모님 앞에서 아주 서럽게 울었다. 엄마의 한 마디에 눈물이 막 흘렀다. 도움과 응원을 받은 만큼 이뤄내지 못한 내 자신이 한심했다. 난 무얼 할 수 있는 사람일까 자문했다. 그래서 작년은, 처음으로 빨리 떠나보내고 싶은 존재였다. 그런 모든 불확실함 속에서 올해를 시작했다. 


올해는 내가 할 수 있는 것, 하고 싶은 것들을 가득 채우고 싶었다. 처음으로 꿈꿔오던 배낭여행을 떠났다. 많은 사람을 만났고, 세상은 내 생각보다 훨씬 더 넓다는 걸 느꼈다. '나'라는 사람에 좀 더 가까워졌다. 그리고 다시 새 학기를 맞았다. 뭐 배낭여행을 한번 갔다 온다고 현자가 되는 건 아니더라. 고등학교 선생님을 만나서 "저 다시 학교에 가서 새롭게 시작하는 게 두려워요. 뭘 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하면서 넋두리를 했다. 선생님은 고속터미널에서 인사하며 샌드위치와 주스를 손에 꼭 쥐어줬다. 그 샌드위치가 힘내라는 말 같았다. 새로운 보금자리에 혼자 떨어지던 날이 선명하다. 나를 두고 다시 돌아가는 엄마에게 "엄마 나 좀 무서워."라고 말했다. 내가 걱정이 많은 걸 누구보다 잘 아는 엄마는 "걱정을 해서 걱정이 없어지면 걱정이 없겠네."라고 했다. 그 말을 노트에 적어두고 두고두고 꺼내 읽었다. 


다행히도 내 걱정보다 훨씬 수월하게 새로운 환경에 익숙해지고 내 생활을 사랑하게 되었다. 새로운 동네에 익숙한 산책로가 생겼고 좋아하는 장소들이 늘었다. 새로운 운동들을 시작했고, 덕분에 좋은 경험을 많이 했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확실히 알았고, 할 수 있는 일들에 모조리 도전했다. 다 잘 풀린 것만은 아니지만, 몇 개의 도전에선 다신 없을 소중한 경험을 얻었다. 친구들, 가족들과 보내는 시간을 더욱 소중히 여길 수 있게 됐다. 다시 돈을 모아서 새로운 곳으로 떠났고, 지금이 아니면 돌아오지 못할 시간의 기록들을 남겼다. 그로 인해 더 성장했다. 무엇보다 소중한 인연들이 생겼다. 난 누구한테 잘 기대버릇 하지 않았는데, 의지할 사람이 생겼다는 것은 꽤 괜찮은 일인 것 같다. 그들에게 많이 배우고 있다. 하고 싶은 것들이 더 늘어났다. 그 모든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 더 자라고 싶다.


생각해 보면 작년의 그 고통밖에 없다고 생각했던 시간들로부터 난 많이 성장했다. 편한 것보다 힘든 것이 나를 더 성장시킨다는 말은,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어느 정도 맞는 말인 것 같다. 살아만 있다면. 땅에 두발 붙이고 잘 남아 있다면. 그 모든 것들은 결국 나를 성장시키더라. 


괜히 하루에도 몇 번이나 기분이 좋다가 우울하다 한다. 지금 나의 상황은 어렵다. 무언가와 안녕할 시간이라 그런 것 같다. 그런 상황에서, 누군가 내게 해준 말이 와닿았다. 후련하면서도 헛헛한 이 마음은, 아마 마음을 다했기 때문일 거라고. 내가 스스로 인정하기 어렵더라도 결국 내가 지낸 모든 시간들에 나는 마음을 다했기에 그런 거라고.

요즘 들어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은 미래로 다시 불안해졌다. 그러다 점점 더 먼일들까지 고민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일어날지도 모르는 일들로 힘들어하는 내가 참 미련하다고 생각했다. 다행히도 그런 내게 필요한 조언을 해주는, 그런 소중한 사람들이 있어 이겨낼 수 있었고, 이겨내고 있다.


엄마한테도 고민을 털어놨다. "나 요즘 스트레스받아"라고 했더니, 엄마도 내가 좀 안쓰러웠던 것 같다. 누구보다 신중하고 미련한 내 성격을, 엄마는 가장 잘 안다. 마트에서 호빵을 좀 사다 먹으라고, 엄마가 말해줬다. 아. 내가 제일 좋아하는 호빵을 까먹고 살았다. 겨울이 됐는데도 아직 호빵 생각을 하지 않았다니. 잊고 있던 호빵을 사서 집에 돌아와 하나를 데워 먹었더니, 기분이 나아졌다. 

그리고 계속 미루던 일들을 정리했다. 책상 위에 계속 거슬리던 쓰레기를 버렸다. 귀찮던 수세미를 드디어 바꿨다. 힘껏 더러워진 오래된 수세미를 버렸다. 밀린 설거지를 하다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생각했고, 그 사람들이 나를 사랑해서 기분이 나아졌다. 문득 사랑받고 있는 온기가 좋았다.


이것들이 안녕하는 것과 얼마나 관계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냥 요즘 내가 '안녕'하면 떠오르는 것들이다. 한 해를 보내려니 오만가지에 정이 붙는다. 내가 과연 새로운 일을 잘 해낼 수 있을까 걱정도 되지만, 내가 처하게 될 모든 새로운 상황들을 기다리는 요즘이다. 무엇이든 어떠하랴. 

지난여름, 일본에서 우리 집으로 편지를 썼다. 일상으로 돌아온 나에게 보내는 편지에 이렇게 적었다. 이번 여름도 치열하게 나아가느라 고생했다. 누구보다 내가 고생한 걸 내가 제일 잘 안다. 비교하면 별거 아닌 일들도, 나에게는 굉장히 큰 걸음들이었다는 걸 안다. 그래서 나를 좀 위로하고 싶었다. 그리고 응원하고 싶었다. 너무 조급하지 말고, 앞으로 처할 일들도 치열하게 나아갔으면 좋겠다. 새로운 '안녕'을 남기고, 다시 '안녕'해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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