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첫날, 저는 몸살을 앓았습니다. 새로운 발걸음들이 나아가기 시작하는 동안 저는 바이러스가 첫 발자국을 찍는데 일조한 듯해 머쓱합니다. 간신히 공격을 피해 정신이 들었을 때 켠 핸드폰에는 무수한 덕담들이 와 있더군요. 새해 복을 기원하는 문자들이었습니다.
연락처의 많고 많은 이들 중 저를 찾아 연락을 준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모릅니다. 그게 어려운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짧은 문구에도 진심이 들어있다고 믿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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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다가오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려 하는 편입니다. 주로 어르신 분들이 제게 와 길을, 스마트 기기 사용방법을 묻곤 하신 후로는요. 답답한데 해결이 안 되어서 힘들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저는 저희 부모님을 떠올렸습니다. 시간이 더 지나 새로운 것들이 계속 등장할 때 헤맬 모습을요. 그래서 저를 붙잡는 이들을 뿌리치기 어렵더군요.
그것이 어쩌면 잘못된 판단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새해 들어 종교 전도 목적을 가진 분들을 자주 만났습니다.
저를 붙잡은 이들이 하는 이야기는 제 마음을 흔들었습니다. 과제를 위해, 레퍼런스를 얻기 위해 도와줄 수 있냐는 것이었죠.
처음 보는 이에게 다가가 도움을 청하는 것이 어려운 것임을 알기에, 저는 승낙하고는 했습니다. 매번 20분 정도는 이야기를 나눈 듯합니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이겠지만 열심히 도우려 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자 결론은 다 같았습니다. 대화에서 저의 정보를 알아내고, 이후를 위한 친근감을 가지려는 것이었습니다.
제게 다가오며 하는 말이 거짓임을 깨달았을 때, 정확히는 사실이 진실과 큰 오차로 다름을 안다는 것 자체로도 슬펐습니다. 그런 순간마다 조금씩 사람을 경계하게 되더라고요. 진심이 무엇인지 의심부터 해야 한다는 것이 속상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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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눈이 쌓였습니다. 꽤 큰 덩어리들이 떨어져 잠깐 사이에 소복해지더군요. 제 눈앞에 보이는 것들이 하얗게 물들어가는 모습이 참 아름다웠습니다.
많은 작품에서도 눈을 순수하고 깨끗한 것으로 상징합니다. 눈은 순간 아이로 돌아간 것만 같은 감정을 들게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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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저는 어느 순간부터 하얀 눈보다 녹은 눈이 더 아름답다고 생각합니다. 더러워지고 세상과 경계가 희미해진 눈이요. 세상이 너무나 하얗던 어느 날, 눈이 거짓말 같다고 느꼈거든요. 알록달록한 그네, 낡은 지붕, 칙칙한 길가까지 모두 눈이 덮어 볼 수가 없었으니까요. 하얀 세상에 감추어진 것들을 잊고 길을 걸었습니다.
하나의 거짓말은 많은 것을 숨길 수 있다고 합니다. 진실을 덮는 순간엔 그 영향력을 모른다고도 하죠.
어쩌면 거짓으로 덮인 세상 속에서는 진심을 모르는 것이 더 행복할지도 모릅니다. 아무렇지 않게 주위를 볼 수 있을 테니까요.
하지만 진실은 언젠가 드러난다는 게 분명합니다.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도, 미끄러운 빙판길로 다시 가려질지도 모르지만요.
문득 시 한 구절이 생각납니다.
‘죽은 이로 하여금 죽는 이를 묻게 하라’
오장환의 <성탄제> 중 일부입니다. 정말 많은 해석이 있는 구절입니다.
저는 매번 이 구절을 보면 죽은 이는 ‘녹은 눈’을, 죽는 이는 ‘죽어가는 어미 사슴’을 의미하는 게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눈은 내리고, 죽어가는 어미 사슴 위에서 녹고, 그 투명해진 눈들은 사슴을 묻습니다. 아무리 눈이 떨어져 그 존재를 하얗게 덮으려 하여도, 피 흘린 어미 사슴의 죽음은 숨겨지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계속해서 거짓을 듣고 말할지 모릅니다. 어쩔 땐 거짓에 사로잡혀 빠져나올 수 없을 거고요.
하지만 눈은 언젠가 녹는다는 것. 그렇게 거짓말의 힘은 강하지 않을 거라 믿어봅니다.
많은 변화가 일어나는 1월입니다. 그만큼 자기 자신을 생각해야 하겠죠. 진심으로 나를 대하고 타인을 대할 때 조금이나마 앞길이 더 트여 보이지 않을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