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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곡성지에서 구구리 책방까지, 느림이 선물한 하루

by JF SAGE 정프세이지


현관문을 나서며 남편에게 말했다.


“오랜만에 둘이 나들이 가네요?”
“그러게.”


맘먹고 둘이 성지순례를 가기로 했다.
“문경 쪽에 우곡성지와 홍유한 고택지, 청주 읍성 순교성지, 천진암 성지 중 어디가 좋을까요?”
“우곡성지와 홍유한 고택지는 일부러 가지 않으면 못 갈 것 같네요. 거기로 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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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극성당



오늘의 기사는 나.
우곡성지 칠극 성당 11시 미사에 맞추기 위해 부지런히 달렸다.


“홍유한이 누구인지 알려주세요.”
남편은 <한국 천주교 성지 순례> 중 우곡 성지와 홍유한 고택지 편을 읽어주었다. 모르는 내용에 대해서 물으면 검색을 알려주니 좋았다.


천주실의와 칠극을 읽고 스스로 신앙을 받아들인 한국 최초의 신앙인, 홍유한 선생.세례를 받지 않고 신앙생활을 하는 게 낯설었다.
서울에서 예산을 거쳐 영주로 내려와 평생을 칠극을 지키며 믿음 안에 살았다.
금육일을 몰라 평생 좋은 음식을 먹지 않았다는 일화는 신앙의 깊이를 짐작하게 한다.
그 후손 중에 13명의 성인과 복자가 있다는 것도 놀랍다.


우곡성지로 향하는 길가엔 빨갛게 익은 사과가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집에 갈 때 꼭 사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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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사에는 40명 남짓이 참석했다.
그중 젊은 얼굴들이 보여 반가웠다.유혹 많은 세상에서 신앙을 선택한 그들이 너무 예뻐 보였다.
속으로 그들에게 화살기도를 보냈다. ‘주님, 저 친구들을 축복해주세요.’



미사 후 남편이 미리 찾아둔 식당으로 향했다.


“예약하셨어요?”
“아니요.”
“자리가 없어요.”


아쉬움에 돌아서려는데 주인장이 나와 말했다.


“한 테이블 비어요. 들어오세요.”


보리밭과 둥글레 돌솥밥.
짜지만 정갈한 반찬, 따끈한 된장국.
못 먹을 뻔해서 더 맛있었다.
테이블마다 회전율이 빨랐고, 작은 시골 식당은 분주했지만 편안했다.


식사 후 홍유한 고택지를 찾았다.
고택은 단출했다.
집과 칠극기도문, 예수상, 그리고 선생의 증조부가 받은 효자문 하나.
시간이 멈춘 듯 고요했다.


“가는 길에 사과도 사고, 구구리책방도 들려요.” 내 말에 남편은 "맘대로 하세요."로 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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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구리 책방



구구리책방은 폐교를 개조한 책방 겸 카페였다.
창밖 운동장 끝에는 커다란 플라타너스 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햇살 사이로 먼지가 떠다니고, 책장 사이엔 묵은 책 냄새가 났다.
읽은 책을 발견할 때마다 작은 반가움이 피어올랐다.


오는 길에 한적한 과일가게에 들렀다.
가격은 다 비슷했다.
퇴직 후 ‘쿠팡맨’이 된 남편이 검색을 해보더니 말했다.


“이게 더 싸네요.”


이번엔 사과를 사고, 다음엔 온라인으로 사자고 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터널이 끝없이 이어졌다.
터널 하나를 지날 때마다 문득 생각이 들었다.
‘삶도 이 길 같구나.’

긴 터널에서 빛이 보이기 시작하면 불안이 사라져 안도의 숨이 나왔다.
어둠 속을 달릴 땐 끝이 보이지 않지만, 결국엔 빛이 들어온다.
삶의 고비마다 길거나 짦은 터널이 있고, 길이가 어떻든 터널들은 언젠가 끝난다.


남편의 운전연수가 시작됐다.
내 운전은 단순하다.
그냥 달리고, 앞차가 가까워지면 브레이크를 밟는다.
남편은 다르다.


“속도, 뒤차 거리, 옆 차선 다 봐야지. 브레이크 밟지 말고 엑셀에서 발만 떼요.”


좋은 선생인 건 인정하지만, 반복되는 조언에 결국 짜증이 났다.


“이제 당신이 해요.”


하지만 차를 세울 형편이 아니었다.


“잠 와요?” 남편의 물음에 난 묵묵부답.

휴게소에서 당 충전을 하고 나니 기분이 풀렸다.무사히 집에 도착했다.


“수고했어, 잠시 위기가 있었지만 잘 지나갔네." 남편은 나의 오르락 내리락 하는 감정을 알고 있었구나.


무사히 집에 까지 온 나를 쓰담쓰담.

오늘 하루, 느림이 준 선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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